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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오리라

대림절 조회 수 18477 추천 수 2 2010.11.28 22: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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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24:36-44 

인자가 오리라!

(마 24:36-44), 11월28일, 대림절 첫째 주일

 

     오늘 설교 본문에는 특별한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인자’가 그것입니다. 37절은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고, 39절은 홍수로 사람들이 모두 멸망당하기까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는데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다고 했으며, 44절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자(人子)는 헬라어로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라고 하는데, 이는 ‘사람의 아들’(son of men)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성경을 철저하게 읽지 않는 증거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 사람의 아들이 아닌데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이 왜 인자를 자기와 구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때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당신 자신이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남의 이야기하듯이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36절의 보도에 따르면 그 날과 그 때를 아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마지막 때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의 고유한 영적 경험과 동시에 고유한 신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파루시아

     그 중의 하나가 묵시문학입니다. 묵시사상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많은 내용이 이런 묵시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약성서에도 한 가지 사상만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전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과 거기에 반응하는 방식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는 학파도 있었고,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학파도 있었습니다. 예언자 전통도 있고, 제사장 전통도 있습니다. 이런 전통들이 각자 하나님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인식과 경험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묵시사상은 구약의 역사에서 비교적 후기에 나타난 독특한 사상입니다. 그들의 핵심사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직접 심판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36절이 말하는 ‘그 날과 그 때’를 가리킵니다. 계 1:10절은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날과 그 때에 전권을 쥐고 세상을 심판할 이가 바로 ‘인자’입니다. 인자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37절과 39절은 ‘인자의 임함’이 노아 홍수 사건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임함’은 헬라어 ‘파루시아’의 번역입니다. 파루시아는 coming, arrival, presence라는 뜻입니다. 파루시아는 곧 하나님의 임재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 파루시아는 구원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임재, 구원의 실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묵시사상은, 그리고 묵시사상에 영향을 받은 여러 성서구절들은 왜 파루시아를 말했을까요? 파루시아를 말하는 것보다는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힘쓰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도 많은 정치인, 경제인, 사회운동가들이 세상을 바꿔보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도 그런 일에 힘을 쏟습니다. 서울 강남을 대표하는 어떤 교회는 ‘정감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정직과 감사 운동이라고 합니다. 파루시아는 그것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경제가 좋아지고, 사람들이 정직해지고, 문화 활동이 풍부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 방식입니다. 왜 이런 사상을 말하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묵시사상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와 신구약 중간인 암흑시대의 경험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완전히 악의 지배 밑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총체적으로 부패했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에게는 세상을 바꿀 능력도 없었습니다. 완전한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치 시한부 암 선고를 받은 사람과 비슷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낡은 세상(올드 에온)은 가고 새 세상(뉴 에온)이 와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실행할 이가 바로 인자라는 겁니다. 그 인자의 오심을 ‘파루시아’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파루시아가 이뤄지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늬가 바뀌는 게 아니라 실체가 바뀝니다. 이런 묵시적인 희망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어졌습니다. 종말에 재림하실 예수님이 바로 인자라는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 신앙이 바로 오늘 본문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루시아 개념을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거나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월적인 인자의 파루시아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금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개량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역사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인자의 파루시아를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역사적 책임을 유기하면 곤란합니다. 이 역사에 두 발을 탄탄하게 딛고 사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명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총체적인 절망으로 떨어집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늙고 곧 죽습니다. 이걸 늦추거나 막을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늙고 죽지 않으면 생명이 아닙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에 인간이 살지 못하게 될 날이 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인간 종 자체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변하든가요? 옛날에 비해서 인간 세상이 더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었나요? 지금의 제국은 옛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던 로마 제국보다는 더 신사적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인생살이는 비루하고 잔인하고 구질구질하고 이기적이고 전투적입니다. 이 세상을 뿌리째 바꿀 인자의 파루시아를 우리도 고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인자의 힘으로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를 비롯해서 모든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신앙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그 날과 그 때

     인자의 파루시아는 언제 실행될까요? 본문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심지어 아들도 모르고 하나님만 압니다. 노아홍수 때도 사람들이 홍수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38절) 모든 것이 완전히 멸망당할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파루시아가 얼마나 갑작스러운지,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지 그 순간까지 사람들이 밭을 매고(40절) 맷돌질을 하게(41절) 될 것이라는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혹시 인자가 데려가지 않는 한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본문은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일상이 여전할 것처럼 생각되는 어느 순간에 마치 도둑이 예고 없이 침범하듯이 인자의 파루시아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른다면 오지 않는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말입니다. 또는 이런 표현을 만화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흥미가 있긴 하지만 실제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 오해에 일리가 있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외쳤지만 아직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재림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우리의 일상은 아무 변함없이 계속되는 걸까요?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2천년이 긴 시간이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지구 전체의 나이를 24시간으로 계산하면 2천년은 몇 초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숫자로 우리의 삶을 희화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에 토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저는 지금 58년 가까이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각각 나름의 세월이 있습니다. 그 세월은 그야말로 한 순간입니다. 각각의 세월이 득달같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순간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죽음의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밭을 갈고 맷돌을 돌리고 있는데 그 순간이 왔습니다.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는 말은 모든 순간이 그 날이요 그 때라는 뜻입니다. 3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있는 시간이 한 순간이듯이 파루시아가 일어나면 모든 시간이 바로 그것에 융해되어 한 순간이 됩니다.

     위의 설명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저걸 모르면 신앙생활이 불가능한가요? 파루시아는 우리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내용입니다. 마태가 전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깨어 있으라.”(42절)고 하며, “준비하고 있으라.”(44절)고 말합니다. 영적 각성과 준비는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파루시아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여기 사형수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게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깨어 있음과 죽음에 대한 준비로 충일합니다. 여기 마약과 도박, 또는 주식투자와 부동산 투기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일상은 몽롱한 정신과 돈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깨어 있다는 것과 준비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모든 일상을 팽개치고 수도원에 들어가 버리는 것이 대답은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수도원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 삶은 세속에서 이뤄집니다. 예수님도 홀로 한적한 곳으로 나가기도 했지만 결국은 사람들이 지지고 볶듯이 살고 있는 시장 바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세속에서 살되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걸까요? 예, 그게 일단 대답입니다. 교회생활은 개인 신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생활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과는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기복주의는 한국교회의 영원한 로망입니다. 매일 새벽에 “나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치듯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이 모두 오늘의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것에 집중됩니다. 서울 강남지역의 요지에 2천억 원이 들어가는 교회의 신자들이 인자의 파루시아를 간절히 원할까요? 인자의 파루시아는 이런 모든 것들을 상대화하는 사건입니다. 조금 더 선정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일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아무도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을 겁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따지고보면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심정으로 살고 싶으신가요? 예, 그건 옳은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사과나무를 심는 일인지를 뒤돌아보면 됩니다. 현대인들은 사과나무가 아니라 돈나무를 심는 데만 열을 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이 어떤 것이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제 3자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최소한의 기준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지금 당장 손 놓아도 아쉬울 게 없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면서도 거기에 내가 천년만년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놓쳐도 아쉬운 게 없어야 합니다. 목사가 큰 교회로 부흥시킨 다음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건 단지 교양이나 인격이 아닙니다. 영성입니다. 표면적인 삶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고 궁극적인 현실에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인자의 파루시아에 영혼이 민감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속임수가 아닙니다. 민중의 아편이 아닙니다. 이런 영적 각성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늘 팽팽하기 유지되지도 않습니다. 세속의 일들이 우리를 둔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인자가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분은 곧 오십니다.

 

 

 

 

 

 

 

 

 

 

 

 


profile

[레벨:4]pingdol

November 29, 2010
*.227.83.101

인자가 오리라!

 

대림절 첫째 주일의 설교 제목으로 딱이네요.

베토벤 심포니5번 1악장 첫소절을 듣는 느낌입니다.

 

영적 각성과 준비는 파루시아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씀에 새삼 일어나 허리를 동이게 되는군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당장 놓아도 아쉬울게 없는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해도 괜찮은가...

연습하고 있긴 한데...쉽지는 않습니다.

목사님의 이런 설교가 연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도 감사.

얼굴을 반듯하게 들고 주를 맞는 그날을 기다리며.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29, 2010
*.120.170.250

핑돌 님,

고맙습니다.

여전히 난삽한 저의 설교를

빛난 문구로 그럴듯하게 평해주셨네요.

주님의 오심,

그의 파루시아,

세상의 마침과 새로운 세상의 시작,

생명의 질적인 변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서의 교회,

우리가 대림절에 생각해야 할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마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와 같습니다.

함께 그 물에 목을 축이며

그날을 기다리십시다.

동지여! 

profile

[레벨:33]달팽이

December 02, 2010
*.83.92.39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문을 외우면서

치열한 현실성을 유지하면서 자유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한치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 간다는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이 현실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더 치열하게 소망이 밝게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자가 오리라!"

자신의 삶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하는 자에게는 늘 구원의 소망으로 주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길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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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2, 2010
*.120.170.250

달팽이 님,

하늘이 잔뜩 찌푸리고 있소.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세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인자'가 온다는 사실을 믿고 선포했겠소?

2천년 전 그들의 영적 경험을

오늘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하려면

우리에게 좀더 치열한 영적 수고가 필요한 것 같소이다.

깊은 웅덩이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그 사실에 매달려봅시다.

대림절과 성탄절 절기로 채워진 12월,

기쁨과 평화의 기운으로 살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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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December 02, 2010
*.164.230.230

유대인들이 '희망을 말 할 수 없는 현실  ' 속에서 인자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처럼

기독교인은 어설픈 희망을 말하거나 또  거기에 마음을 둘 게 아니라,

절망, 고통같은 것들과 친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거기서만 간절한 기다림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교회마저도 사이비 희망이 판을 치는 마당에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서 전 너무 좋아요.

사는 게 구질구질할 때가 있는데 전 오늘이 그런날이었어요.ㅎㅎ

자기자식 잘난 맛에 사는 부모랑 한판했답니다.

목사님은 하루 잘 보내셨어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December 02, 2010
*.120.170.250

이선영 선생,

'사이비 희망'이라는 말을 했나?

그걸 눈치챘다니 대단하군.

인생살이에서 조금이라도 손해볼까봐 조바심을 내면서

40일 특새에 매달리는 모습이 바로 그거 아닐는지.

오늘 한판 했다고? ㅎㅎ

나는 오늘 주보 만들고,

"기독교가 뭐꼬?" 교정 좀 보고,

테니스 운동 좀 하고,

<기독교사상>에 연재할 글 구상을 하고,

그리고 빨래 널고,

큰 딸을 좀 도와 주고(그럴 일이 있어서)

다비아 사이트 좀 돌보고,

밥을 차려 먹고....

그렇게 보냈네.

금년 다 가기 전에

대구샘터교회 예배에 한번 참석하러 오시게.

남자 청년들이 많으면 말 안 해도

자주 올텐데.

마지막 한 달, 굳세게 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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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오명철

December 04, 2010
*.174.213.48

더 좋은 교회, 더 좋은 환경에서 예배 하고 싶었습니다.

조국을 잠시 떠나 살면서 내 교회 하나 없이 매주마다 백인들 눈치보며 의자를 옮기고, 음향을 셋팅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예배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다비아에 와서 대림절 설교를 보면서

이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한다는 말씀, 정치인, 교육인, 경제인 사회운동가들이 세상을 바꾸려 하듯이

나 또한 더 좋은 예배와 환경을 생각하고,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바꾸려한 그들과 다를바 없는 무지했던 죄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인자가 오시는것에 촉수를 세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민 생활속에서 나도 모르게 그만 잠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이민생활을 하는 한인들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의 이민자들이 오늘 하루를 살기위해

되지도 않는 영어를 구사하며 가족을 살리려고,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들과 함께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대림절 희망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초월적인 임재를 기다리는 삶.

무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바꾸는 그날! 두발을 이 땅에 딛고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희망하며

오늘도 인자가 오시는 그 날을 향해 다시 일어나기쁜 소식 전해주며 달려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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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4, 2010
*.120.170.250

오명철 님은 외국에 거주하시는군요.

미국이겠지요?

인자가 오시어 바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허무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희망이 자칫하면

사변에 치우칠 수도 있긴 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사변적인 것으로 이해되듯이 말입니다.

종말의 세상, 인자의 통치는

우리의 능력을 완전히 초월해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에,

그리고 역사 전체에

실질적인 생명의 능력으로 자리해야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느끼고,

실천하고 살아가는지 늘 영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겠지요.

좋은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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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765
615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753
614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2011-06-20 11736
613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729
612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729
611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729
610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712
609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707
608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704
607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699
606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89
605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682
604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666
603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638
602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636
601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627
600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614
599 주현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 24:12-18) [14] 2014-03-03 11603
598 사순절 영원한 생수는 예수다! (요 4:5-26) [10] 2014-03-23 11592
597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92
596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571
595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66
594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62
593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539
592 주현절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 (마 4:12-23) [4] 2014-01-26 11520
591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519
590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509
589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507
588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497
587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483
586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457
585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447
584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444
583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443
582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2013-04-07 11436
581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388
580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368
579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350
578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342
577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336
576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1332
575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321
574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305
573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304
572 창조절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8] 2013-11-10 11295
571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269
570 창조절 죄의 심연 (딤전 1:12-17) [6] 2013-09-15 11258
569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212
568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206
567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1190
566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188
565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183
564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78
56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절망 (사 5:1-7) [1] 2013-08-18 11130
562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106
561 창조절 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 4:4-9) [15] 2013-11-18 11082
560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1080
559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1067
558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1052
55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1003
556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94
555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985
554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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