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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노래, 12월18일

기타 조회 수 8490 추천 수 37 2005.12.18 18:33:55
성경본문 : 누가복음 1:46-56 
http://wms.kehc.org/d/dabia/12월18일.MP32005. 12.18.      
눅 1:46-56
영혼의 노래

본문 배경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에 관해서 관심을 보일 뿐이지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복음서마다 이에 대해서 약간씩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가장 일찍 기록된 마가복음과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대충 서른 살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애만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 비밀을 약간씩 다루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마태복음에는 그녀와 정혼한 요셉에게 전달되는데 반해서 누가복음에는 마리아에게 직접 전달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교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저자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누가복음은 이와 약간 달리 이방인, 여자, 어린이,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저자에 의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런 신학적 배경을 가진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말씀이라는 걸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흡사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무대장치와 비슷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을 세례요한의 출생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중요한 장면에서 누가는 엘리사벳이 어떻게 임신하게 되었는지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 내용은 눅 1:5-25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서 임신할 수 없었지만 늙은 몸으로 사무엘을 출산한 한나와 마찬가지로 임신했습니다. 그녀가 임신한지 6개월쯤 지난 다음에 마리아도 역시 임신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기는 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아직 동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어쨌든지 임신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눅 1:42-45). 엘리사벳의 이런 말을 듣고 화답한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대림절과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읽고 읽어도 물리지 않을 만큼 동화처럼 아름다운 장면이 여기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서의 설명에 따르면 두 여자 모두 특별한 방식으로 임신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임신 사실을 그들에게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임신할 나이가 지난 상태였고, 마리아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한쪽은 늙었고, 다른 한쪽은 새파란  나이였습니다. 두 여자 모두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임신했습니다. 이럴 때 당사자들은 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뭐가 뭔지 중심을 잡기가 힘듭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것처럼 이 두 여자가 만났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끼리만 통하는 영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통찰력이 있는 분들은 이 이야기를 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엘리사벳은 인생경험도 많고, 남편이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신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지만, 마리아는 기껏해야 15,16세에 불과한 소녀였습니다. 이렇게 어린 소녀가 사회혁명적인 내용이 담긴 노래를 부른다는 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여러분은 성서 텍스트에 가까이 다가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는 정말 이런 노래를 불렀을까?” 하는 질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마리아의 어린 시절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아마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 전승된 노래를 그대로 여기에 받아 적었을지 모릅니다. 그 노래가 원래부터 마리아의 노래로 전승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전승이었지만 누가복음 기자가 마리아와 연결시킨 것일지 모릅니다. 어떤 사연을 통해서 이렇게 마리아의 노래로 자리를 잡았는지 우리가 그 실체를 정확하게 잡아낼 수는 없지만, 이 노래가 바로 초기 기독교 신앙을 구성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더 구체적으로 누가 공동체는 왜 이런 노래를 불렀을까요? 이 노래는 도대체 무엇에 대한 것일까요?

영혼의 노래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말씀이 여러분을 어떤 영적인 세계로 끌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나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성서 텍스트를 건성으로 읽습니다. 조금 열성이 있는 사람들은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듯이 성서를 종교적 만족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읽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열광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말씀과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서 텍스트가 우리를 끌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독서삼매에 빠진다는 말처럼 그럴 때 우리는 성서 텍스트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영혼이 담겨있는 성서읽기입니다.
오늘 마리아에게서 이런 영혼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46절). 영혼이 찬양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 성서 안에서 이런 표현들을 자주 대하지만 늘 그러려니 하고 지나갑니다. 우리는 많은 기도를 드려서 목소리가 쉬거나, 성서를 많이 읽어서 낡은 성서를 갖고 다니면, 그게 영혼으로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열정적인 신앙생활도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단지 우리의 건전한 종교습관입니다.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회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가가호호 방문 전도하는 걸 절대적인 의무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기의 노력에 따라서 이런 습관을 키울 수 있습니다. 영혼이 주님을 찬양한다는 건 이런 종교적 습관이나 훈련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저의 설교가 어떤 한계에 부딪칠지도 모르겠군요. 왜냐하면 ‘영혼’이라는 걸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설명하거나, 나의 짧은 경험을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의 상식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의 예배가 바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몸과 정신이 일치하고 있다는 걸 느끼시나요? 영혼은 몸과 영이 하나 된 우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혼’으로 살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영과 몸이 분리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영과 몸이, 또는 정신과 몸이 일치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과 몸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이 세상을 형식적으로만 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체 존재, 우리의 전체 운명을 던지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이 이미 제공해준 어떤 답을 흡사 퍼즐 맞추기 하듯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내가 나의 전 존재를 어디에 걸어두고 있을까? 사실 모든 걸 걸어둔다는 사실 자체도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그런 영적인 삶의 지평을 무시하는 현대인들에게 영혼의 노래는 애초에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마리아의 노래는 47절에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이런 기쁨의 설레임은 다시 주님을 찬양하게 만듭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에 대한 생각은 곧 구원문제와 직결됩니다. 이 세상에 구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죽음, 허무, 좌절, 무의미를 깊이 뚫어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문학도 구원을 말하고, 요즘 심각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는 배아줄기 문제도 결국은 구원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구원 문제에 완전히 천착하는 태도가 곧 영혼으로 찬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구원을 일으키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노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무엇이라고 노래합니까?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인간에 의해서 왜곡된 질서가 반전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51-53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들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으신 구약성서 이사야 61:1,2절과 그 의미가 비슷합니다(눅 4:18). 그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병행하는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와도 거의 비슷합니다(6:21-26).
마음이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에 반해 보잘 것 없는 이, 배고픈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인간사회는 어디나 이런 계급화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괜찮은 사회라고 하더라도 사람 사이에 이런 구분, 차별, 갈등이 자리하게 마련입니다. 완전한 평등 사회를 꿈꾼 공산주의가 실패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에 대한 반증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이런 계급화한, 비틀린 사회를 완전히 새롭게 하신다고 노래합니다. 위로 올라간 사람을 끌어내리고 아래로 처진 사람을 끌어올려서 평등의 사회를 만든다는 건 듣기에 따라서 매우 불온한 노래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분명히 인간에 의해서 고착화한 악한 질서를 그대로 묵인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능력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고대시대에는 기독교가 콘스탄틴 황제 이후 로마 제국과 하나 되었다는 게 그 이유라 한다면 현재에는 자본주의와 결탁했다는 게 그 원인이겠지요.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난의 대물림 앞에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대신 개정된 사학법 앞에서는 순교의 각오로 투쟁하겠는 걸 보면 우리 기독교가 얼마나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집단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읽은 우리는 무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마음이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요한 사람을 색출해서 강제로 모든 것을 박탈하는 게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인가요? 그러나 성서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사회개혁에 나서라는 의미로 이런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잘난 척 하는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는 게 교회의 구체적인 일은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한순간 통쾌할지는 몰라도 주님을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주님의 능력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며, 거룩한 분이십니다(49,51절).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52절). 우리는 전능하신 분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50절).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십니다. 누가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 세상의 참된 새로움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게 그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좀 더 생생하게 실감하려면 누가복음이 기록된 그 시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흡사 해방신학이나 마르크시즘의 선언문처럼 들리는 이 마리아의 찬양은 로마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때 나온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모두가 두려워하던 그런 절대 권력을 하나님이 꺾으신다고, 그 모든 권력 위에서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노래했다는 게 말입니다. 오직 전능의 하나님에게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던 마리아에게 로마의 권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정당이나 시민단체처럼 사회변혁과 혁명의 현실화를 신앙의 근본적인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날 것을 희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기도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아니면 구체적으로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까? 이 두 가지 태도, 즉 기다림과 참여는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태도입니다. 영혼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이 긴장을 놓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참여합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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