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사랑의 계명과 기쁨

기타 조회 수 13893 추천 수 45 2006.05.21 14:00:44
성경본문 : 요한복음 15:9-17 
http://wms.kehc.org/d/dabia/06.05.21.MP32006. 5.21. 요 15:9-17
사랑의 계명과 기쁨

계명과 사랑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요지는 아주 명확합니다. 마지막 17절에 진술된 그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사실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막 12:28-31, 마 22:34-40, 눅 10:25-28) 이 사실이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신 6:4,5절의 ‘쉐마’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온 영혼을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 12:31b)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이 똑같이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 또는 예수님의 계명으로 진술하고 있지만, 사실 사랑을 계명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그렇게 정확하다고 볼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누구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처럼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식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는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식간에 위선에 빠지기 때문에 그것이 곧 사랑 자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사랑이 곧 예수님의 계명이라고 설명하는 걸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의 맥락을 통한 설명입니다. 이 말씀은 15장1절 이하의 ‘포도나무’에 대한 설명을 배경으로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만약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5b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 상당히 위태롭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내적 단결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계명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대교의 율법과의 관계를 통한 설명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誡命), 즉 훈계와 명령입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는 율법을 극복하고 있지만 이런 유대교에 익숙한 사람들의 방식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이 곧 하나님의 계명이며, 예수님의 계명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을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율법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주도권
사랑의 계명이 율법이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율법은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어떤 절대적인 규범을 가리킵니다. 가장 대표적인 율법인 십계명을 보십시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자기 기분에 따라서 선택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헌법을 무조건 지켜야 합니다. 세금을 내는 건 선택사양이 아니라 의무조항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을 그런 율법의 차원과는 다르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9절 말씀을 유심히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렇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거나 아니면 사랑하고 싶다는 의욕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속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셨다는 말은 사랑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인 능력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오지만, 그것이 곧 사랑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사랑이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사랑의 계명을 언급했을 뿐이지 사랑이 흡사 수학 실력이나 피아노 연주능력, 또는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도력 같이 우리의 노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나 도구는 아닙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결식노인들과 거리의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식사도 많이 벌이고 있습니다. 남한의 교회는 북한 식량원조에서 상당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회에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부분에서 개신교회는 다른 종파에 비해서 월등하게 뛰어난 업적을 쌓았습니다. 저는 이런 구제나 복지사업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부연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이러한 노력들을 곧 사랑과 일치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은 “그리스도인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주장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자고 역설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곧 율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모범적으로 살면서도 역시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듯이, 또한 한국교회가 북한 식량을 도와주면서도 가난한 북한 앞에서 자만심을 보이고 있듯이 근본적인 사랑의 능력을 보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일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깨닫고 그 안에서 살았던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은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즉 성육신의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 나타나신 분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이 예수님과 일치되었으며, 예수님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전체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9b)는 말씀은 예수님과 일체가 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스스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사랑하는 척 시늉만 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론 진실하게 사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좀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예를 하나 들어야겠습니다. 마더 테레사처럼 사랑을 실천한 분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 실천이 완벽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의 일방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의 사랑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사회구조의 정의로운 변혁에는 역설적으로 그녀의 행위가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숭고한 사랑의 실천을 폄훼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사랑실천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결국 사랑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를 온전하게 믿는 것이 곧 우리가 사랑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의 삶을 원하는 사람은 사랑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야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의 실천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만 마음을 두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요? 믿음만 있으면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사랑의 실천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걸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의 근원적인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속했지만 그것의 실천은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비롯한 복음서는 사랑을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 계명 중의 하나가 바로 유대교로부터의 따돌림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인들 끼리 일단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인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랑의 계명이 강조되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교회 공동체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단지 마음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실천으로 당연히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계명이고, 16b절에 의하면 삶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랑의 주도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를 인식하고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과 일체가 되신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사랑의 실천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14-17)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이 무엇인지, 그 방법론이 무엇인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을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위에서 야고보 선생이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우리의 사랑이 실천되어야 내용들이 그렇게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서는 모든 문제를 시시콜콜하게 가르치고 있지도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런 구체적인 사안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동성애자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요?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부부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무조건 참고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게 사랑인지, 아니면 훌훌 털어버리고 새출발하라고 말하는 게 사랑인가요? 파괴되는 생태계 앞에서 어떤 태도가 사랑의 마음인가요?
이런 점에서 사랑은 치열한 세계인식과 연관됩니다. 단순히 착하게 살겠다거나 남을 위한다는 마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국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랑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비록 완벽한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랑의 능력이 우리에게 엄습하면 우리는 그것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위한 우리의 인식과 판단과 결단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달라는 기도를 간단없이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과 기쁨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 주제는 거의 언급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훨씬 본질적인 사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인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기쁨의 토대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이 곧 기쁨의 근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발견한 사람만이 기쁨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말씀이겠지요.
저는 앞에서 사랑의 주도권을 말씀드리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만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그 사실에서 우리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 기쁨을 발견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사랑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에게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쁨으로 이끕니다. 복권 당첨은 잠시 우리를 흥분시킬 뿐이지 기쁨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일단 사랑실천의 의무감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삶의 기쁨을 발견하는 게 우선적입니다. “프로이데!”를 반복해서 외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주제처럼 그런 기쁨이 여러분을 사랑의 힘으로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게 곧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활동하시는 고유한 방식입니다.  

profile

[레벨:4]이동주

May 24, 2006
*.216.92.68

계속되는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실은 오늘 설교가 어렵네요. 제가 이 본문을 접할때도 그렇거니와 직접 설교자로 선다해도 역시 어렵네요. 수없이 듣고 말해온 사랑이지만 정작 오늘은 너무나 낯설게 다가옴을 물리칠 수가 없군요.사랑이신 하나님안에 깊이 들어 가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소위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원천적으로 없어서인지는 모르지만요. 하나님을 아는자 만이 사랑을 알고 그 사랑안에 담겨있는 자만이 기쁨의 심연에 들어가겠군요.

사랑의 무게를 견딜수 없어 대만의 杏林子라는 작가의 글로써 말의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면서

愛是接受(사랑은 받아들이는 것)
中國字,是世界上最美麗的一種文字。
중국글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자중의 하나입니다

常常包含了許多奇妙深奧的哲理。
종종 많은 기묘하고 오묘한 철학과 이치를 담고있죠

比如説,愛。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글자입니다

愛。拆開來是兩個字.「心」和「受」。
“사랑”을 나누어 보면 “마음”과 “받아들임”의 두 글자로 되어있습니다

愛的意義就是心理接受。사랑의 뜻은 바로 마음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有時候我們把施捨誤為愛。不,施捨中含了太多的高傲.,會刺傷別人的自尊。
而愛,卻是謙卑的。
어떤 경우에 우리는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베품에는 너무 많은 교만과 오만이 들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겸손함입니다

有時候我們把憐憫當做愛。不,憐憫中含了太多的輕視,惹人反感。
而愛,卻是柔和的。
어떤 경우에 우리는 연민을 사랑으로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연민은 너무 많은 경시를 내포하고 있기에 반감을 야기시킵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오히려 온화함입니다

有時候我們也以爲了解,容忍,幫助,責任等等就是愛。
어떤 경우에 우리는 이해,용인,도와줌,책임등등을 사랑으로 여깁니다

不錯,愛裏都包括了這些,但如果我們不能從心裏去接受對方,
這些仍然算不得愛.耶穌叫我們愛人如己。
옳습니다 사랑에는 이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에서부터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耶穌叫我們「愛人如己」。你什麽時候能愛別人如同自己一樣,接受他的優點,
也接受他的缺點,接受他的成功,也接受他的失敗.,接受他的快樂,也接受他的眼淚。那麽,你才算真正懂得了愛。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능히 자기와 같이 사랑해서 그의 장점과 결점을 받아들이고, 그의 성공과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의 기쁨과 눈물을 받아 들일 수 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진정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1488
453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962
452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958
451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958
450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948
449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929
448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913
447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8] 2014-06-15 9884
446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844
445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841
444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817
443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814
442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813
441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801
440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786
439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783
438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778
437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773
436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70
435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752
434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750
43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739
43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738
431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737
430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9698
429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98
428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97
427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95
426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90
425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667
42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9663
423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622
422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614
421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608
420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607
419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603
418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593
41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560
416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543
415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512
414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505
413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504
412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79
411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71
410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465
409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462
408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453
40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445
406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444
405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442
404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435
403 부활절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벧전 2:2-10) [2] 2014-05-18 9433
402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433
401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431
400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428
399 성령강림절 선과 악 (롬 7:15-25a) [16] 2014-07-07 9422
398 사순절 의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 (사 50:4-9a) [16] 2014-04-13 9419
397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419
396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417
395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414
394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388
393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381
392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375
391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359
390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293
389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268
388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267
387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264
386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241
385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9174
384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166
383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9164
382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9158
381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9158
380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140
379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9126
378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092
3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9088
376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9080
375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9077
374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9055
373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034
372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9022
371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9019
370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8991
369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973
368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959
367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952
366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923
365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920
364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894
363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8893
362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893
361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862
360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851
359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845
358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753
357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752
356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8735
355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720
354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706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