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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긴장감

사순절 조회 수 14382 추천 수 106 2007.03.11 20:08:31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0:1-13 
2007.03.11. 고전 10:1-13
영적 긴장감

고린도교회의 특수성
편지는 일반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보내는 게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용무가 있을 때 보냅니다. 바울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아주 독특했고, 그 안에 있는 고린도 교회도 역시 독특했습니다. 예컨대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오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할 때 남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고, 여자들은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가톨릭의 미사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미사보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찬식 때 서로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거나, 술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들은 고린도교회의 독특한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8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8장에서 말하는 우상숭배 문제는 주로 시장에서 사먹는 고기에 관한 것입니다. 그 당시 고기는 대개 신전에서 바쳐졌던 것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고기를 사먹어도 되는가 아닌가 하는 논쟁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상은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전에 바쳐졌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먹는데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자유를 강조한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양심이 약한 사람들이 이런 일들로 인해서 시험에 들린다면 자기는 고기를 절대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우상으로부터 자유롭지만 형제와 자매를 위해서 그 자유를 유보하겠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제 10장에서 다시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8장에서는 구체적인 문제인 (소)고기만을 언급했지만 10장에서는 훨씬 포괄적인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 내용은 구약의 사건들과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연결시키면서 설명하기 때문에 마치 신학논문처럼 조금 복잡합니다. 우선 그가 예로 든 구약의 이야기를 간단히 간추리는 게 좋겠습니다.

홍해와 광야
본문 1절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인도로 모두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2절에서 바울은 이 사건을 일종의 세례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의 세례와 같은 의미입니다. 유형론적 해석처럼 보이긴 하지만 양쪽 모두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것이니까 그의 해석은 옳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을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5절) 자신이 선택해서 애굽으로부터 탈출하게 하셨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으며 광야에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두 죽게 했습니다. “그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5b) 그 이유가 5-10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들은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악은 우상숭배입니다.(7절) 바울은 출애굽기 32:6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백성들이 앉아서는 먹고 마셨고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고 말입니다. 우상숭배는 곧 음행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2만3천명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을 하다가 죽음의 천사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10절) 바울은 이런 일련의 예를 일일이 제시하면서 그것은 악을 행하면 안 된다는 경고라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설명을 고린도교인들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을 죄책감에 떨거나 주눅 들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이 바로 오늘 “세상의 종말”을(11b) 앞에 둔 기독교인들에게 교훈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은 단지 시간적인 종말이라기보다는 예수 사건으로 인해 선취된 카이로스로서의 종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곧 영적인 차원에서 종말이 시작된 것이니까요. 즉 기독교인들이 이제 새로운 시간에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서 홍해를 건넜지만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고만 구약의 이스라엘 조상처럼 우상숭배와 악을 행하지 말라고, 즉 영적인 긴장감을 늦추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파
고린도교인들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미 잘 알고 있는 구약의 끔찍한 사건들을 열거한 다음에 바울이 정작하고 싶은 이야기는 12,13절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지만,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약성서 학자 C.K. 바레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한 부류의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헬라 지역에 영지주의가 광범위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가현설이 초기기독교 안에서 매우 강력한 가르침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바레트의 설명은 옳습니다.
영지주의들의 주장은 명백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와 성만찬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 어떤 악과 죄를 범한다고해도 자신들의 영적인 구원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주 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아니 믿음으로만 본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돈독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있는 믿음이 아주 좋은 신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일과 상관없이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도덕적인 문제까지 초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상 앞에 가서 함께 무엇을 먹든지 그 당시에 퇴폐적인 윤리를 따르든지 아무런 상관없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거의 광신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삶과 아무런 상관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구원은 실제적인 구원이 아니라 단순한 심리적인 구원입니다. 심리적으로 위로를 받을 뿐이지 실체가 없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박옥수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구원파입니다. 구원파는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의 짝퉁인 셈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한편으로 구원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높이 사야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구원과 믿음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큰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늘 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실존적인 삶의 무게를 저들은 간단하게 해체해버립니다. 그렇지만 다시 이 세상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겉으로는 모든 걸 해결한 것처럼 시늉을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삶에 지쳐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구원에 대한 확신 가운데 몰입하려고 애를 씁니다. 악순환에 빠진 셈입니다.
구원파는 노골적으로 그쪽으로 떨어져나간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정통교회 안에서 적지 않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공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왔으니까 구원받았고, 다른 이들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사는 거야 당연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이 극단화하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향에서 기독교 신앙을 파괴합니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질 사람 취급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잘못이고 신앙적으로도 잘못입니다.
일전에 가까운 곳에서 의사생활을 하고 있는 친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군요. 포항에서 의사회의 모임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기독교인 의사와 비기독교인 의사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 의사들은 비기독교인 의사들을 흡사 벌레 보듯이 한다는 군요.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뉘앙스였습니다.
“예수구원, 불신지옥”이라는 공식에 의해서 일어나게 될 또 하나의 왜곡은 오늘의 삶 자체에 대해서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삶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는 곧 신앙과 삶의 분열입니다. 그들에게서 신앙과 삶의 일치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태계가 허물어지는데도 그걸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소외되고 억압받는데도 나 몰라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자신들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에는 체면 몰수하고 극단적으로 투쟁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늘나라만 사모하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의 손해는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지난 몇 달 동안 서울 영락교회당에서 사학법 재개정을 위한 기도회와 삭발 사건이 몇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일들은 정치적인 것들입니다. 서로 찬반으로 논쟁할 필요는 있겠지만 순교의 정신으로 투쟁할 사안은 아니겠지요. 이런 일들은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게 아닐는지요.

시련 가운데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그렇게 넘어지는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겁니다. 영혼만 구원받으면 되니까 어떻게 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에서는 영적인 긴장감이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인들은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생각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이 무뎌진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이며, 무엇이 세상의 요구를 따라가는 건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믿는 우리의 마음보다도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무조건 믿는 것은 광신자들,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긴장감을 갖고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상에서 감당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릴 때 이런 데 마음이 쏠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풍요롭게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왜 우리에게 없겠습니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시험에 들기도 하고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13절 말씀에 ‘시련’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는 걸 보면 아마 고린도교회에도 이런 일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은 그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13절) 그렇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권고하며, 거기에 만나게 되는 시련들을 이길 수 있다고 용기를 줍니다. 물론 누가 보더라도 힘든 시련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가, 그런 영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십시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에게 운명을 맡긴 사람들은 이 현실과 투쟁하면서 겪게 되는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길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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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無名齋

March 11, 2007
*.6.213.211

자유의 실존적 차원.
자유의 사회적/공동체적/생명계적 차원.
실존의 사회적/공동체적/생명계적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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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rch 12, 2007
*.104.194.19

고린도 전서 10장 1절- 5절까지의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하겠습니다... 모세 때에 우리 조상들은 구름의 인도를 받았고 모두가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었고,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

영적 바위, 즉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영적 음료인 물을 마셨다는 말이 너무 인상적인데요...

아직 예수께서 오시지도 않은 모세 시대 이야기에 "그리스도"가 언급이 된 것 같아서 약간 생뚱맞습니다만... 어쩌면 바울의 모세 이야기가 단순한 역사적인 서술이 아닌, 영적으로 재해석하여 바울 당시를 조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무리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문득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자신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언급이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종교로 모습을 드러낸 기독교에서 급조한 기독교만의 개념 표상거나 명명이라기 보다는, 시대를 초월하여 온 우주에 실재하여 편만한 "근원적인 생명의 원천"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논란이 될까요? ^^;;;)

기독교의 믿음이 단순히 표상과 명명을 인식하고 개념을 이해하고 나면 끝나는 수준이 아닌, 실제적인 것을 접촉하고, 느끼고, 마시는 수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실존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말씀에는 그런 치열한 노력이 엿보여서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단지 문법책만 가지고, 한국말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영어에 대해서" 의식 수준에서 공부 해서는 어쭙잖은 해석은 하겠지만 귀가 열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어로 입을 한 마디도 못 뗍니다... 그렇지만 영어를 쓰는 분위기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단어와 구조가 무의식의 수준에서 실감나게 느껴질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게 됩니다...

문장 몇 마디 외워서 영어 몇 마디 던지는 것을 영어 하는 줄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영어가 무의식적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그런 영어가 진정한 영어인 것처럼, 그런 신앙을 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은혜롭고 좋은 말씀을 읽고 어쭙지않은 사족을 달아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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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March 12, 2007
*.236.180.63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심으로 광야에서 흩뿌림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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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rch 12, 2007
*.104.194.19

글 쓰기가 너무 조심스러워 또 고치고, 또 고치고 했습니다... 전문적으로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설치는 거 같아서 많이 부끄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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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rch 12, 2007
*.85.66.14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교회에서 설교하시는 방식은, 온통 표상과 상징만이 난무하는 말 잔치를 하고는, 그 이후에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이 "바르게 살자" 라는 단순한 도덕률로 끝나버리는 그런 방식입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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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사오정

March 12, 2007
*.144.231.203

본문을 보면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시는 종교적 체험이
신앙을 보장하거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신앙에 유익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체험이 우리에게 주는 위험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관계성에 집중하는 우리의 촛점을 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주님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야 한다고...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철저하게 거부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집중하십니다.
현상 즉 종교적 체험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그것이 아닐까요?
물론 여기서도 만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거울과 경계가 되라고 기록한 말씀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령한 음식을 추구하고 신령한 음료를 마시고 몸부림치는지......
관계성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까?
모든 상황 속에서 늘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는 깨어있는 영적지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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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March 12, 2007
*.236.180.63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시는 것이 종교적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까?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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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사오정

March 12, 2007
*.144.231.203

만나와 물을 마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관계성 지향) 아닐 수도 있지만
만나와 물 등등의 체험으로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지고....
필요가 채워질 때만 하나님이 하나님이 된다는 관점이라면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의 종교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체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아닙니다.
단지 체험이 지향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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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March 13, 2007
*.150.83.45

신약에서 만나, 즉 신령한 음식은 생명의 떡(요 6:35)이신 주님을, 생수, 즉 신령한 음료는 생명수의 강이신 성령(요 7:37)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심으로 생명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여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되지 않는다면 광야에서 흩뿌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고전 10장에서 말하려고 하는 요지가 아닐까요.

고전 8:1~11:1절 까지는 먹고 마시는 문제, 즉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서 합당치 못하게 먹는 것도 있고 합당하게 먹는 것이 있듯이 우리가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를 합당하게 먹으면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되고 합당치 못하게 먹으면 광야에서 흩뿌림을 당한 사람들과 같이 된다는 뜻이 이 글의 요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2절의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철학적인 고린도인들에 대하여 한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철학 안에서 강하고 견고하여 굳게 선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흩뿌림을 당한 것처럼 당하지 않게 조심하라는 뜻이지요.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심으로 광야에서 흩뿌림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지식 안에서 강하고 견고하여 굳게 선 줄로 생각함으로 넘어지는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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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rch 13, 2007
*.104.197.192

말씀은 "내적 믿음"의 "외적인 통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토마스 뮌처)

다르게 말하면 말씀이란 것이 "진정한 영성, 진정한 영적인 체험"으로 인도하는 가이드라인 역할을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의 소중함과 중요성이 나오는 것이구요...

솔직히 과장해서 말하면 "교회"는 죽은 말씀의 장이 되었고, "기도원"은 무당 푸닥거리같은 접신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와 기도원의 괴리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기도원에서 하는 "체험" 이란 것이 무당과 철학관의 그 것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영험(?)하시다는 어떤 권사님은 여 성도 한 분이 부부관계가 좋지 않아서 해결책을 찾으러 갔더니, 기도를 해보고는 이름에서 기운이 드센 느낌이 있어서 남편과 자꾸 충돌한다고, 이름을 바꾸랬답니다... 이런 곳이 한두군데겠습니까?)

소위 말하는 "체험", 깊이 없는 말초적인 환희의 상태로는 절대로 "영적인 실존"의 깊이 속으로 파고들거나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 많이 보았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약중독처럼 "체험 은사 중독"상태가 되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영성이나 체험...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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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rch 13, 2007
*.104.198.40

그리고 비유를 하자면, 소위 말하는 체험이 콜라와 같은 청량음료의 맛이라면, 진정한 영성 체험은 깨끗하고 맑은 무색 무미의 생수 맛이라고 생각합니다...

콜라는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만 먹게 되면 될수록 몸이 망가지지만, 생수의 맛을 들이면 자꾸 먹으면 먹을수록 몸의 노폐물을 빠지게 하고 몸을 건강하게 정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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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求道者

March 13, 2007
*.241.161.130

첫날처럼님의 체험에 대한 비유가 재미 있네요.^^
'무색 무미'라...짝! 짝!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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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rlagmlrnjs

March 13, 2007
*.22.17.68

수고하십니다. 설교음성이 안 나오는데요? 어떻게 된거죠?
profile

[레벨:0]求道者

March 13, 2007
*.241.161.130

저도 그렇던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3, 2007
*.150.14.104

설교음성이 안들려요?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기도가 부족했든지...
글만 보도고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들리는데요.
ㅎㅎㅎ
실상은 이래요.
이번 주일에 엠피쓰리에 문제가 생겨서 녹음 못했습니다.
막내딸이 기숙사에 가지고 갔다고 빠뜨리고 왔네요.
교회에 있는 신형 엠피쓰리는 녹음파일이 달라서
올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했습니다.
다음 주일에 목소리로 만나겠습니다.
제 설교는 듣기보다는 읽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은데....
profile

[레벨:29]캔디

March 13, 2007
*.86.154.210

저는 글만보고도 들리던데요^*^.ㅋㅋㅋ
profile

[레벨:0]求道者

March 13, 2007
*.241.161.130

오호! 신령한 캔디님!!
사랑채에 가보니 ...
PSTM이란 청년이 화장실에서 '불' 받았던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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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rlagmlrnjs

March 14, 2007
*.22.17.68

어떻게 아셨죠? 제 믿음과 기도가 부족한 거ㅋㅋ
하지만 교수님의 잔잔한 음성 속에서 느껴지는 ...
저는 믿음이 부족해서 듣고 싶습니다^^
막내따님! 이번 주에는 엠피쓰리 꼭 챙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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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8] 2014-06-15 9770
443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761
442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50
441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742
440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732
439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724
438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722
43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16
43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98
435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97
434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694
433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91
432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689
431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87
430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51
429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46
428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33
427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29
426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597
425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594
42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9578
423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64
422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63
421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62
420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547
419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546
418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9537
417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529
41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95
415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473
414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63
413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450
41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44
411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25
410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19
409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95
408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89
40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382
406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79
405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376
404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366
403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65
402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62
401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58
400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57
399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51
398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338
397 부활절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벧전 2:2-10) [2] 2014-05-18 9330
396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322
395 사순절 의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 (사 50:4-9a) [16] 2014-04-13 9315
394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314
393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314
392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313
391 성령강림절 선과 악 (롬 7:15-25a) [16] 2014-07-07 9310
390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308
389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236
388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217
387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206
386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84
385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181
384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9122
383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9101
382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100
381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97
380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9084
379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9080
378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9067
377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029
376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8991
375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70
374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8964
3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944
372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941
371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931
370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8911
369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8908
368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907
367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98
366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8885
365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61
364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847
363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835
362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834
361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8814
360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808
359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803
358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93
357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704
356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89
355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77
354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635
353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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