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현절 조회 수 12531 추천 수 115 2008.01.20 15:23:46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80120.mp3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9 
mms://wm-001.cafe24.com/dbia/080120.mp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008.1.20.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굵은 대목만 뽑는다 하더라도 다섯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심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자처하는 이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그 파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그들이 부도덕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음행과 교우끼리의 송사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가 원래 그리스의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어서 옛날부터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돈이 많이 모이면 결국 소비와 향락 문화가 꽃을 피우기 마련입니다. 고린도에는 요즘의 올림픽에 버금가는 스포츠 제전이 열렸고, 그리스의 온갖 신에게 동물을 바치는 이교 제단과 성전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신전에서 일하는 여 사제들은 몸을 파는 일을 겸했습니다. 이런 도시에 사는 기독교인들도 역시 그런 환락적인 삶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신앙적 특징은 열광적인 신비주의인데, 대표적인 것이 방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전 14장을 그 문제에 할애합니다. 그가 거기서 말하려는 핵심을 끊어서 본다면, 방언을 자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방언과 예언(설교)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상한 언어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19절) 어쩔 수 없이 방언을 하려면 통역을 세우라고 합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27절) 물론 그는 교회에서 방언을 굳이 막지는 말라고 했지만, 그것은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열광적 현상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것뿐이었지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런 열광적 상태에 빠진 것은 고린도교회의 부도덕성이 고린도라는 도시의 총체적 부도덕성에 영향을 받았듯이 고린도라는 도시의 열광적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에게 지금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이런 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무조건 질책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책망을 듣는 걸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책망을 듣는다고 해서 잘못을 고치지도 않습니다. 물론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삼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서로 분열되어 있고, 열광주의에 빠져 있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신앙의 토대가 무엇인지를 우선 설명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우상숭배를 하거나 않거나,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거나 상관없이, 도덕적인지 아닌지 불문하고, 열광적이던 이성적이든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영혼의 디딤돌로 삼아야 할 신앙의 토대를 말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서론인 1:1-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열 번 이상 거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다양하고, 이질적인 신자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공동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9절 말씀이 그 모든 것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작은 공동체인 샘터교회에 모인 우리도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가치관도 다르고, 교육관도 다르고, 세계관도 다르고, 심지어 정치관도 다릅니다. 취미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릅니다. 이런 걸로는 교회에서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잘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취미 동아리도 아니고 정치결사체도 아닙니다. 교양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교회 회중이 한 가지 색깔로 편중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적인 사람만 모이는 교회라거나 진보적인 사람만 모이는 교회는 건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이어야겠지요. 그게 가능해야만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나요? 신앙의 가장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사실에 집중할 때만 그게 가능합니다.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사실은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이시다.
아마 여러분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속한 이들을 가리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2절) 같은 구절에서 고린도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 속한 이들도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와 다른 모든 교회, 그리고 오늘 온 세계의 교회와 지금 샘터교회에 속한 우리는 모두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실을 우리가 실제로 믿고 있는지, 또한 그 믿음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아무리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낸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인 거와 같습니다. 일부러 남편과 아내를 속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구요. 그래도 나름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부부들 중에서도 마음이 실리지 않은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을 담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 채 그 말의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잘 알지 못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말을 아주 쉽게 뱉어내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거나, 예수는 주님이라는 말은 혁명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 이 용어의 쓰임새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는 물론 유대 남자의 평범한 이름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요셉을 아버지로 하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는 유대인 한 남자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그 뜻은 구세주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곧 예수는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여러분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이를 구세주라고 믿는 사람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거나 믿게 될 일정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특별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말은 다시 그가 주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주(퀴리오스)는 그 당시에 로마 황제에게만 붙여지는 호칭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그 당시에 생명여탈권을 가진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퀴리오스라고 불렀다는 말은 이제 황제숭배를 거절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삶을 맡겼습니다. 네로 황제 같은 이들에 의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로마 황제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퀴리오스, 즉 주인이었습니다.
저는 위에서 사랑한다는 말과 실제로 사랑 안에 거하는 게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게 무엇인지 조금만 돌아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주식과 부동산에 영혼을 심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테니스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을지 모르겠네요. 믿음과 삶을 그렇게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주님을 믿는 것과 세상살이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는 게 옳지 않냐,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그런 주장은 옳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진지한 태도로 세상살이를 해야 합니다. 교회 일을 한다는 핑계로 회사나 학교나 가정 일을 대충 때우는 식으로 넘어간다면 아주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마세요.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한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소중해도 그것은 여전히 부차적입니다. 세상살이는 잠정적이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으로는 우리가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섬겨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주 빨리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관심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이 아주 빨리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이 세상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이런 것은 물리적으로도 진리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지구를 자식처럼 데리고 있는 태양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앞으로 45억년 남았습니다. 우주에는 이런 별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젊음과 건강을 아무리 지켜내고 싶어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외모를 가꿔도 결코 지켜낼 수 없습니다. 모든 게 빨리 사라집니다. 지금은 2008년입니다. 100년 전은 1908년입니다. 그때는 조선이 일본의 압력으로 합방되기 바로 직전이겠군요. 100년이 휙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다시 100년이 흐르면 2108년이 됩니다. 그때 우리 후손들은 100년 전인 바로 지금의 우리를 뒤돌아보겠지요. 그런 방식으로 1천년이 흐르고 1억년이 흐르겠지요. 그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죽고, 많은 사건들이 시작했다가 끝나겠지요.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를 포함해서 아주 빨리 사라집니다. 이런 것에서는 우리의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의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7b) 주님의 재림이 바로 세상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런 세상의 완성은 로마 황제가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로마 황제를 퀴리오스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세상은 정치 지도자와 CEO가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세상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위와 같은 설교를 듣고 여러분은 겁이 납니까, 아니면 기쁩니까? 개인에 따라서 생각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실제로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쉬울 거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이런 재림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에서 우리는 종말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신앙으로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런 재림과 종말의 생명을 알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바울을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재림으로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 말은 곧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제도나 그 어떤 세상의 일로도 생명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완성이라는 말을 잘 생각하세요. 지금 우리는 아직 생명의 완성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완성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시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완성하십니다. 아니 생명 자체가 곧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생명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분은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론에서 볼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이십니다. 다만 역사를 초월하신 하나님과 구별되는 역사적 예수님을 가리킬 때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지만(Homo ousios) 역사적인 차원에서 다른 위격(persona)으로 존재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나님도 사람처럼 자식을 낳느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바로 이 단어를 이해하는 데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아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과감하게 선포했을까요? 저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그것이 바로 생명의 능력과 연관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곧 생명의 완성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이런 고백을 드리면서 여러분의 영혼은 생명의 신비와 그 완성을 향한 희망으로 불타야 합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이 시간 안에서 아주 짧은 생명을 맛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전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영적인 만족과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진실하시다고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의 친교를 맺었습니다. 옳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삽니다.(요 11:25,26)

profile

[레벨:1]박상열

January 20, 2008
*.139.176.150

목사님, 힘이 되는 설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새기고 갑니다.
그분을 믿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을 받는것이 새해의 소망입니다.
그분께만 집중된 마음을 말입니다.
profile

[레벨:0]hanal

March 24, 2008
*.162.23.58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을 바꾸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천문학을 공부한 제가 45억년의 지구역사에서 7000년 정도의 역사로 전환은 저의 죽음 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비는 내 안에 임했습니다. 목사님 언제 메일로 창조과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지구역사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임하길 기도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1883
4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988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985
451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976
450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972
449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949
448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926
447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8] 2014-06-15 9923
446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861
445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856
44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843
443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839
442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835
441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822
440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815
439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803
438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792
437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788
436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787
435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86
434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773
433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772
432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761
431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9760
430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752
429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716
428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712
427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710
426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705
425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701
42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9699
423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643
422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629
421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629
420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620
419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615
418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610
41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580
416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562
415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531
414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530
413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524
412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497
411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94
410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488
409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87
408 부활절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벧전 2:2-10) [2] 2014-05-18 9479
407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477
406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473
405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472
404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467
403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460
402 성령강림절 선과 악 (롬 7:15-25a) [16] 2014-07-07 9458
401 사순절 의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 (사 50:4-9a) [16] 2014-04-13 9457
400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457
399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446
398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444
397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439
396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436
395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436
394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407
393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396
392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392
391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381
390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304
389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287
388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286
387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280
386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254
385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9194
384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189
383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9185
382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9181
381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9180
380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159
379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9155
378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9145
377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9130
376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9116
375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110
374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9080
373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9074
372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056
371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9034
370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9024
369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996
368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978
367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971
366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945
365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943
364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8930
363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917
362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911
361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879
360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874
359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866
358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8789
357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770
356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764
355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741
354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72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