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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질문

기타 조회 수 13919 추천 수 27 2004.07.02 16:04:59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2-6 

세례요한의 질문
마 11:2-6

세례요한과 예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그렇게 멀지 않은 친척 벌 되는 인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요한은 그 당시 로마의 오랜 식민지 생활로 지쳐있던 이
스라엘 민중들에게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닌 예언자로 활동했습니
다.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요단강 근방의 광야에서 메뚜기와 꿀벌을 먹으며 낙타 가
죽옷을 걸쳐 입고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불을 토하듯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고 설교했습
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도 요한 앞에 서면 주눅이 들 정도로 그는 예언자로
서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세례 요한의 등장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요? 자신의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명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계기를
요한이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까지 했고,
요한의 제자들이 훗날 예수의 제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아가 등장하기 전에 그 길을 준비해야 할 엘리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렇
게 질문하게 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3절). 세례 요한은 영어(囹圄)의 몸인 자신에
게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고 있다는 예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렸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순
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영주였던 헤롯은 동생 빌립이 죽자 그의 아내 헤
로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일들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왕의
처신으로서는 바람직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드러내 놓고 비난하지 못한 이 사건
을 요한이 노골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자기 체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일로 요한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마침 헤
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었습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헤
롯은 이 아이에게 무슨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고 약속했습니다.
헤로디아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온 이 소녀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고 했습니다. 허튼 소리였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약속이었기 때
문에 헤롯은 그 약속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보면서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나 기대와는 다
른 방식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역사에는 요한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헤롯같은 인물이 필요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헤롯에 의해서 요한이
처단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죽을만한 일을 벌였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것도 아니
고 소녀의 춤에 취해서 내뱉은 헤롯의 허튼 소리 한 마디에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는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아마 헤롯은 이스라엘의 민중들이 영주인 자기
보다는 예언자 요한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며, 헤
로디아라는 여자는 자기를 요부처럼 취급하는 요한에게 어떤 증오심이나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소녀의 춤으로 인해 발설된 약속을 빌미로 이스
라엘의 정신적 큰 스승을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요한의 질문
죽음을 예감한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예수 당신이 바로 우리 이스라엘 민중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인가?"에 대한 질문이
가장 절실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세례 요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더 나
아가서 인류 전체에게 해당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해결해야 할 수많은 현안들이
있긴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이 질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
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가? 이런 질문은 반드시 종교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비록 이렇게 정리된 언어나 사유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인간의 삶은 이런 궁극적인 주제와 연결되
어 있습니다. 예컨대 돈을 버는 일이나 정치 같은 것도 역시 그것이 자기를 구원할 것
으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거꾸로 구원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라도 붙들
려는 심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에는 자신의 일상이 구원론에 토대를 두
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사
이비 구원론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말하자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돈이 있으면 행복하게
된다는 신념을 붙들고 살거나, 친구들이 많으면 생명의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만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회적 신분이 상승해도, 친구들 사이에 '짱'이 되어도 그
런 것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은 결코 감옥 안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동굴과 같기 때문에 동굴 밖의  절대적 세계인 이데아를 추구
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이 염불 소리처럼 들릴 뿐입니다.
  
진리의 길이 막히는 이유
요한은 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요? 정말 세례 요한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
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이런 소
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 3:17).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었을 것입니
다. 자기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약간의 알력 다툼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질문했다는 것은 그가 아직 예수의 정체에 대
해서 명확하기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사실 예수의 어머니인 마
리아도 예수를 임신하는 사건에서부터 출산에 이르는 과정에 하나님의 영이 개입하셨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를 실제로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러 가
지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톨스토이의 동화라고 생각됩니다만,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하던 어떤 구둣
방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꿈에 나타난 예수님의 약속대로 하루 종
일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시 꿈에 나타난
예수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이 노인에게 이미 다녀갔노
라고 대답합니다. 사과를 파는 노파로, 아기를 업고 구걸하러 온 가난한 여자로, 이른
새벽부터 동네의 쓰레기를 채우는 청소부로 나타났는데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틀 안에서만 세상을 보기 때문에 메시아와 그의 사건
앞에서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이나 마리아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생각
이 짧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
간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관점인데, 우선 인간의 입장에서부터 살펴보도
록 하겠습니다.

첫째,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진리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한 아무리 참된 것이 그에게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
습니다. 마리아의 경험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것이
었든지 마리아의 그런 특별한 경험이 곧 예수 메시아성(性)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었
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이스라엘 사람들 일반이 갖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고정
관념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받을 때 일어났던 현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런 현상들이 세례 요한에게 아무리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예수의 사건을 이스라엘의 메시아 상과 일치시킬 수 없었습니
다. 어디 그들 만이겠습니까? 예수와 함께 생활한 제자들의 예수 경험도 거의 같은 수
준이었습니다. 예수가 아무리 자기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일들을 설명해주어도 제자들
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만 듣고 필요한 현
상만 보았을 테지요. 메시아 상에 대한 그 차이가 바로 요한으로 하여금 "당신이 바로
우리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둘째, 진리의 속성은 근본적으로 은폐의 방식을 취합니다.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도 역시 이런 은폐의 방식에서만 유효합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인 예수의 메시아성 문제도 이런 연관성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메
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인정할만한 근
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신학자인 마틴 부버가 신학자들 앞에서 행한 연설해서
그런 질문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럴만한 증거들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메시아는 바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이후의 인
간 역사에 그 이전 보다 훨씬 뚜렷한 구원의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을까요? 어떤 점에서
는 오늘의 역사가 그 당시보다 훨씬 나쁘게 진행됩니다. 그 당시의 마차에 치어죽은 사
람의 숫자와 오늘 자동차 사고로 죽는 사람의 숫자를 비교해보십시오. 일본에서는 작
년 한해만 하더라도 3만 명 이상의 사람이 자살했다고 하는데, 2천년 전에도 그렇게 많
은 사람들이 자살했을까요? 이런 비교가 별 의미가 없긴 하지만 어쨌든지 인간의 역사
가 뚜렷하게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틴 부버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강변합니다. 일리 있는 말
입니다. 이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다른 방식으로는 그 어떤 대답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들어
간 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훨씬 인간다워졌다거나 잘 살게 되었다는 식으로는 설득력
있는 대답을 도저히 발견할 수 없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은폐의 방식이라는 것이 우
리의 대답입니다. 이 문제를 요한의 제자들에게 준 예수님의 말씀에서 다시 검토하겠
습니다.

예수의 대답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
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4-6절). 당신이 메시아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
수는 '가타부타'라는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대신 몇 가지 일어난 사건들만 지
적해주십니다. 이런 사건들은 물론 구약성서를 배경으로 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사야 35장 5절 이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이사야 61잘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구
절은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최초로 회당에서 설교하신 본문으로 등장합니다(눅
4:16 이하). 구약성서도 역시 메시아의 표상을 이렇게 왜곡된 공동체가 제자리를 회복
하는 것에서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이런 대답을 하시는 걸까요? 장애인들이 그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일이 곧 메시아의 일이라는 뜻인가요?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말씀도 사실적
인 것인지, 아니면 또 하나의 다른 차원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말씀도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
런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대별됩니다.
하나는 여기의 이런 모든 진술을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확증이라고 간주하
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의 기적 신앙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서 무언가 구체적인 성
과를 얻어보려는 쪽으로 진행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질병도 기적적으로 치료하
고 사업에도 성공하고 자식들의 출세도 보장한다는 식입니다. 돈독한 신앙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그렇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만 그것이 흡사 주
술적인 차원에서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
다.
다른 하나는 앞서의 입장을 무시하면서 좀더 지성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이 말씀
을 해석합니다. 즉 예수님의 메시아성은 휴매니즘의 회복이라고 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큰 휴매니즘은
장애의 극복이 아닐까요? 월급이 많다 적다 말들이 많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그런
투정조차 부릴 수 없는 처지입니다. 장애인들의 입장에서는 장애만 극복될 수 있다면
제대로 월급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하여진다는 말씀도 역시 인간다운 삶의 차원이라 할 수 있습니
다.
이런 두 가지 입장 모두 바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고난을 기적적인 방식으로 해
결하는 것이 곧 메시아의 일도 아니고, 인간의 휴매니즘을 확대시켜서 복지사회를 이
룩해나가는 것이 메시아의 일도 아닙니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손상되고, 후자의 입장에서는 그와 반대로 인간의 능력이 절대화되고 맙니다. 물론 인
간 삶에 담겨 있는 고난은 메시아가 재림할 때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 것만은 분명합니
다만 그것이 동일시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각 장애인이 개안 수
술을 통해서 시력을 되찾는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삶의 다른 문제가 다시 시련으로
다가옵니다. 옥에 갇힌 사람이 풀려나면 이 세상에서의 문제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걸까요?

예수는 메시아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전하려는 대답의 핵심은 끝에 놓여 있습니다. "나에게 의
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던
세례 요한에게 메시아 표상에 대한 구약성서의 자료들을 제시하시면서 바로 자신의 메
시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행복
하다고 말입니다. 예수의 메시아성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은폐의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단하게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고정관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예수를 인식할 수 없었고 약간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기존
의 틀이 없는 사람은 훨씬 명백하게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거꾸로 예수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이런 질문을 제기할 당시의 예수에게는 이스라엘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아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메시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에게는 그런
개연성이 보였지만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예수가 신성을 모독하는 인물
도 비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메시아 모습은 아주 평범한 유대
인 남성이었던 예수와는 달랐습니다. 훨씬 역동적이고 분명하고 힘이 있어야 했습니
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이 메시아로 인식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들이 예수를 그렇게 배척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나사렛 목수 예수가 메시아일 까닭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그들
과 같은 범주로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지만 메시아 상이라는 점에서만은 그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예언과 독설에도 변하지 않는 이 세상을 인간다운 세
상으로 바꾸려면 자기보다 훨씬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등장해야만 했는데, 예
수는 그런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상식적으로 의심을 품을만한 대상인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세례요한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메시
아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이비 메시아에 마음을 빼앗기며 사
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은폐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신 메
시아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고 있습니까?   <200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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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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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 찾아오실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게는 좀처럼 그쪽으로는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두려움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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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869
303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859
302 창조절 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2019-10-27 7827
301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7765
300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759
299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639
298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7607
297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602
296 성령강림절 산과 언덕이 노래하리라. (사 55:10-13) [6] 2014-07-13 7584
295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577
29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7569
293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555
292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547
291 대림절 늘 깨어 기도하라! (눅 21:25~36) [1] 2021-11-28 7537
290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7520
289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3] 2016-02-21 7490
288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476
287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7474
286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463
285 성령강림절 집행 유예의 삶 (마 1324-30, 36-43) [14] 2014-07-20 7441
284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7437
283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401
282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380
281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368
280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7349
279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317
278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297
277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291
276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7288
275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286
27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274
273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270
272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7227
271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216
270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7205
269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7194
268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7184
267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7170
26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7146
265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7105
264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7104
263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7103
262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7089
261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7083
260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7081
259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7043
258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7034
257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973
256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6957
255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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