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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인간(1)

기타 조회 수 9588 추천 수 34 2004.07.02 16:32:00
성경본문 : 창세기 3:8-19 

노동하는 인간(1)
창 3:8-19

창세기 3장만큼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있는 성서 본문도 드물 것입니다. 그 본문은
외면상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벌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인간의 본질이 죄라
는 주장의 증거 자료로 인용되곤 했는데,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여자가 뱀의 유혹에 더
욱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남녀 차별의 성서적 근거로 삼기도 했습니
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3장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를 매우 부정적으로 각인시키
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는 타당한 주장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 만연한 모순과 부조리의 원인을 일단 인간의 죄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간의 죄를 숙명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의 생명 의지를 송두리째 박멸시킨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
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오용되기도 하는 창세기 3장을, 주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다가 하나님에게 들켰습니
다. 그 당시는 하나님과 사람이 직접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
산을 거니신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니까 이런 성서의 보도는 사실적이기보다는 전형적인
설화적 이야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추궁을 받고 결국 죄를 자백
합니다. 아담은 이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브는 뱀에게 책임을 미루었습니다. 하나님
은 뱀이 변명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배로 기어다녀야 한다
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어서 여자에게는 세 가지 벌을 내리셨습니다. 임신과 분만의
고통, 남자에 대한 그리움, 남자에게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지배당함. 전통적 신학자
들은 이런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남자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고 주
장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그렇게 읽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문제의 원인을 따져서 그런 일을 야기한 사람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통찰
을 그런 설화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성들의 임신과 산고, 사회
적인 불이익 같은 문제들은 이브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니까 '끽' 소리
내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가는 그 현실을 설명하는 것뿐
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이에 못지 않은 징벌을 내리십니다. 17-19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기울인 노력만큼의 결실을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아담은 평생 고생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절은 약간 다른 전승이지만, 여기서도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에덴 동
산을 쫓겨난 후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지며"(23)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해
졌다는 점에서 앞 단락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인간의 노동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그렇게
적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의 묘사 자체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보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
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17,
18a).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전승되는 그 '삶의 자리'를 약간 들여다보면 이들의 주장
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런 민담이 형성된 시대는 짧게 잡아도 3천년 전입니다.
혹은 4천년 전쯤으로 올려 잡아도 될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이 이 땅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노동의 대가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요즘처럼 영농기
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농사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닌데 3,4천년 전 시대에는 그
야말로 몸으로 때우는 방식의 농사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던 팔레스틴 지역은 일부만 제외하고는 척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땅은 한
마디로 그들에게 저주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나일강을 중심으로 상당히
풍요를 일구던 이집트로 이민 갔습니다. 그곳에서 대충 4백년쯤 살다가 돌아오면서 팔레
스틴 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만 인간이 더불어 먹고살기에
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그런 삶의 조건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을 우리는 나무랄 수 없습니다.
노동의 문제는 척박한 땅에서 생존의 위기를 겪었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3
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인 유인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형태의 사회 구조를 발전시켜
온 인류 전체가 씨름한 문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노획한 노예의 노동력
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 문명의 꽃을 빛낼 수 있었는데, 로마 귀족들이야 그런 방식으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노예와 그 이외의 식민지 주민들은 훨씬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 축성에 강제 동원된 사람들은 오늘 본문
의 표현처럼 땅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잉카 문명의 특징은 돌이라고 합
니다. 안데스산맥 고지대에 정교하고 엄청난 거석 문화를 건설한 그들의 그 역사에는 노
동을 신의 저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규가 베어 있습니다. 고대 문명 치고 이런 노동
의 혹사가 없이 이루어진 문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고대 문헌을 연구해야만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분명합니다.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가장 깊이 들어다본 근대 학자는 당연히 칼 마르크스입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피치를 올리고 있던 그 시대에 마르크스가 본 노동의 현실은 고대 제
국의 노예들이 감당했던 상태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지요? 고대
사회는 기술 문명이 발전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
고, 생존에도 부족했던 노동력을 전쟁과 건축 등에 쏟아 붓게 되니까 인간이 노동으로부
터 소외되기 마련입니다만, 산업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런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게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시대에 비해 오
늘 우리는 그 이전의 전체 인류 역사가 이룩한 발전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루었지만 이
런 노동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빈곤으로 인해서 학대받고 버려지는 아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다는 현실을 보면 지금 우리가 21세기를 사는지 아니면 19세기를
사는지 착각할 정도입니다. 최저임금이 여전히 5,60만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이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는 말씀이 딱
들어맞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느냐, 하면 상대적으로 양호할
뿐이지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괜찮은 부분은 우리가 가능한 빨리 배워서 따라가는
게 좋습니다. 임금 격차가 우리보다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게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컨대
의사나 변호사들의 수입이 다른 직종보다 높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큰 차이가 나지는 않
습니다. 그리고 수입이 많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세금으로 내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삶의 수준에서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즉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서 그것으로 교육과
의료를 완전히 정부가 책임지는 형태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으니까 노동으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우리보다는 덜 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여전히 노동시간과 임금
문제로 인해서 불평도 많이 하고, 시위와 폐업의 악순환도 여전합니다. 여러분이 뉴스를
통해서 잘 알다시피 복지 문제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잘 짜여진 독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실업 문제로 인해서 사회적 갈등이 적지 않습니다. 4월29일자로 유럽
연합 가입국수가 25개국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차원에서
미국에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연합체를 만들었겠지요. 이것은 곧 옛날에 비
해서 현대인들이 아무리 잘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노동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
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반증입니다. 과연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우리 인간
이 영원히 짊어져야 할 숙명인가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약간 다른 시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창 2:17절에 의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반드시 죽어야'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실제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음을 모면한 것은 큰 행운이며 은
총입니다. 물론 본문에 '흙으로 돌아간다'거나 '먼지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죽음을 가리
키는지 아닌지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일단 그것이
인간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이 범죄한 아
담과 이브를 당장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도 역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죽는 것과는, 즉 무화
(無化)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흙으로 돌아간다
는 것은 죽는다기보다는 생명 형식이 달라진다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심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총입니다.  
따라서 땀을 흘려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는 이 진술도 역시 하나님의 징벌이라기
보다는 은총의 구도에서 읽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는
대신 좀더 심한 노동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한편으로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기 이전에도 이들은 에덴 동산을 돌보는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보면(창 2:15) 노동이 단순히 죄의 징벌은 결코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빌려서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죄를 짓기 이전에 에덴 동산을
돌보는 책임이 너무 한가했기 때문에 아담이 결국 이브와 더불어서 뱀의 유혹에 넘어갔
다고 말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으려면 노동 조건이 열악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생산성이 바닥으로 떨어진 고된 현실에 내맡겨진 아담이 이제는
엉뚱한 데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생존을 위해서 최선으로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
입니다.
저는 오늘 성서 본문을 읽으면서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생존 조건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노동 문제를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 바르
게 해석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해석은 노동을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살기 위해서 노동한다기보다는 노동함으로써 인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노동하
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수도사들이 종교적 명상 훈련과 육체 노동
을 한 이유도 노동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서구와 그 서
구를 따라잡으려는 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노동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노동을 늘
돈과 연결키는 데 있다고 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경우에도 노동자, 기업가, 정부가
노동을 거의 소유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즉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노동을 연봉과 직결시키고, 기업가는 노동을 통해서 기업을 확장시키고, 정부에서는 그
런 관계를 적절하게 운용함으로써 개인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야심만 드러내기
때문에 사안마다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
조조정과 일자리 창출은 서로 모순되는 행위인데도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
여지고 있습니다. 경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는 내가 이런 국가 경제에 대해서 이러
쿵저러쿵 시비를 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노동 문제를 단지 생산성 제고와 연
봉 높이기 차원에서만 생각하다가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입니
다.
노동의 존재론적 해석이라는 말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 분이
있을 것 같아서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
지만,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오래된 미래>는 티베트 라다크 마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야크를 키우며 살
아갑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건강만 허락하면 모두가 일합니
다. 그들 마을 공동체에는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모두가 일하고 함께 축제를 즐기면서,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매우 지루하게 일상을 살아갑니다. 땅의 임자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처럼 사유재산의 의미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지을 능력만큼만 자기 땅으로
삼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노동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
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오늘 우리의 삶은 매우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면은
별로 풍요롭지 못합니다. 가능한대로 불로소득을 기웃거리고, 노동의 능력이 단지 연봉
으로만 평가되는 이런 시스템에서는 결코 우리가 노동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할 수 없습니
다. 흡사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사람들처럼 영혼이 시들어갑니다.
노동에 대한 존재론적인 접근은 한 개인을 인간답게 만들뿐만 아니라 사회구조를 정
의롭게 만드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서 생존을 보장받는 것으
로 만족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사는 나라가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서 벌어들인 것을 자신들의 생존 차원에서만 사용
한다고 한다면 가난하기 때문에 굶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데 오늘의 현실에서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또는 거기서 벗어나
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 힘을 보존시켜나가려고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선
진국에서 그렇게 열을 올리면서 자유무역협정을 밀고 나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
다.  

오늘의 인류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미래를 내다보십니까?
매일 먹고 놀면서 취미 생활이나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을까요? 만약 그런 때가 오
면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세
상은 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며, 인간이 가야 할 길도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노동이라
는 게 반드시 육체를 쓰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 사람의 병
을 고치는 사람, 설교하는 사람도 역시 노동하는 사람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어
떤 방식으로 일을 하든 우리의 노동에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참여한다면 노동은 바로 우
리가 구원받는 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궁
극적인 차원에서는 이 현실에서의 생존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2004.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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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7479
292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436
291 성령강림절 산과 언덕이 노래하리라. (사 55:10-13) [6] 2014-07-13 7434
290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7421
289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3] 2016-02-21 7414
288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402
287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400
28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7379
285 대림절 늘 깨어 기도하라! (눅 21:25~36) [1] 2021-11-28 7366
284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7348
283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336
282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95
281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276
280 성령강림절 집행 유예의 삶 (마 1324-30, 36-43) [14] 2014-07-20 7265
279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7227
278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218
277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217
276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214
275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206
274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202
273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7185
272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184
271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7146
270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142
269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7097
268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7078
267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7067
26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7046
265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7029
264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7014
263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7014
26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7007
261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7004
260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7004
259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969
258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968
257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901
256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6873
255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867
254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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