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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기타 조회 수 10398 추천 수 26 2005.09.04 18:45:35
성경본문 : 마태복음 18:15-20 
http://wms.kehc.org/d/dabia/9.4.MP3http://wms.kehc.org/d/dabia/9.4.MP32005. 9.4.          
마 18:15-20
제목: 죄를 어찌할 것인가?

죄란 무엇인가?
요즘 한국교회 안에 ‘사형제도’ 문제로 시비가 분분합니다. 그 시비의 빌미는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 먼저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사형제도가 성서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KNCC(한국기독교협의회)는 사형제도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들의 주장을 각각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린이 유괴 살해범은 완전하게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고, 아무리 그렇지만 인간의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폭력이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형제도를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매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사회와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서로 얼굴 붉히고 대립적으로 투쟁하기보다는 각자의 주장에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결과를 끌어내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사형문제에 관한 논의는 ‘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도대체 인간은 왜 죄를 짓는 걸까요? 아니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죄라고 생각하나요? 인간은 원죄에 숙명적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의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될까요? 이런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차원까지 나갈 것도 없이, 그냥 우리의 일상에서 이 죄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못을 축소시키고 남의 잘못은 확대합니다. 예컨대 부동산 투기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잘못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런 기회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교회에 다니거나 다니지 않거나 이런 문제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삶을 따라가고 싶지도 않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인격이 왜곡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 문제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양심적으로 사는가, 또는 조금 더 윤리적으로 사는가의 차원에 속한 게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훨씬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적대감만 품을 뿐이지 실제로는 죄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생명의 파괴를 막지 못합니다. 죄가 왜 법이나 사회윤리의 차원보다 훨씬 근원적인 차원인지 오늘 마태가 전한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죄, 혹은 죄인 앞에서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본문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벌어진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범죄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잘못입니다. 아마 어떤 분은 예수님께서 뭐 시시하게 이런 문제를 거론하실까 하고 시큰둥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보다는 세계 평화를 파괴하는 로마의 시저가 저지르는 만행을 언급하셨어야 마땅하다고 보시나요? 요즘도 그런 논란이 많습니다. 사회정의, 국제평화 문제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런 유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회정의나 세계평화보다는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자기의 구체적인 일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경제정의와 지속가능한 생태보존을 위해서 투쟁하는 진보적 목사와 지성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매우 노골적으로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인지 모르겠습니다. 멀리 있는 불의에 맞설 수는 있지만 자기 안에 있는 불의는 보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매우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본문은 네 단계로 대처 방안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개인적으로 충고할 것이며, 둘째는 한 두 사람을 증인으로 데리고 가서 충고하고(신 19:15),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공식적인 충고마저 거부하면, 마지막으로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 방식은 부분적으로는 구약과 연결되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몇몇 증인을 내세우는 중간 단계에서 구약과 일치하지만, 그 결과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구약은 죄 문제를 기본적으로 이렇게 처리합니다. “그런 자는 애처롭게 여기지 말라.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라.”(신 19:21).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17절) 가르칩니다.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이 말씀은 해석하기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으로만 본다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긴다는 게 일종의 징벌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이방인과 세리는 그렇게 나쁜 뜻으로만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하신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이 말하는 이방인과 세리를 호의적인 사람들의 표본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본문 자체만으로 해석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것 전후의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2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의 결론도 역시 형제에 대한 용서입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
이런 문맥을 고려한다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가르침은 결국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이 용서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을 좀 면밀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게 잘못한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면 나의 형제가 되고, 깨닫지 못하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 지은 형제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 결과가 어떻든지 그에 대한 나의 일관된 태도입니다. 나는 그를 용서할 따름입니다.
사형 제도를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려도 괜찮겠지요. 사형제도가 성서에 근거한다는 한기총의 주장은 구약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며 죽어야 한다는 논리가 구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사람을 죽여야만 사회가 안전하게 작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을 악으로 정죄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죄를 그렇게 폭력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게 바로 악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 방식이었습니다.

땅과 하늘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런 처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이런 방식으로 이 세상에 폭력이 종식되고 진정한 평화가 실현될까요? 기독교의 이런 용서 행위, 궁극적으로 원수 사랑이라는 이런 행위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나이브’ 한 방식 때문에 오히려 이 세상에 악이 준동하는 게 아닐까요?
예수님은 순진하기 때문에 죄 지은 형제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훨씬 심층적인 세계에 뿌리를 둔 세력으로 보셨습니다. 그 심층으로부터 접근하지 않는 한 인간의 죄와 악은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18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즉 땅의 문제는 하늘과 직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19,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슨 일’은 곧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송사문제(고전 6:1)를 의미합니다. 기도하면 이런 송사 문제가 해결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는 곧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나님에 의해서 판단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히고설킨 문제는 어떤 율법적 규정을 적용하는 데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한번 언급했듯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것의 뿌리는 하늘, 즉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죄의 뿌리가 하늘에 있다는 말을 좀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제가 지적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기억하시면서 설명을 들으십시오. 우리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할 이유는 인간은 늘 그렇게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실존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인간에게 원죄에 물들어 있다고 가르치는 이유도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서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고, 그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이 원죄 개념은 인간의 실존에 내재하고 있는 그 죄의 깊이를 성찰한 데서 나온 결과입니다. 저는 여기서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얼마나 죄의 경향성에 쉽게 노출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권모술수, 인간의 이기심,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의 뿌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파렴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비교적 교양이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작용하는 그런 악한 힘입니다. 저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나를 성취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자기를 합리화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죄 숙명주의를 옳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그래서 결국 죄의식 가운데서 불안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모두가 죄의 뿌리를 갖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입 벙긋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는 가능한대로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새로운 지평을 구체화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건 그것대로 구체적인 대안들을 찾아나가야 하겠지만 이 문제의 근본을 훼손시키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땅에서 푸는 기도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훼손시키지 말아야 할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이고, 그것에 대처해나가야 할 당사자들에게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입니다. 죄를 짓는다는 건 구체적으로 이웃을 향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실정법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는 결국 죄입니다. 이런 잘못의 피해를 받는 우리가 그들을 향해서 구체적으로 책임을 지울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만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속을 인간이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 죄의 여파가 어디까지 이를는지 인간이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죄의 판단과 징벌은 곧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게(롬 12:19) 옳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정도 안에서 충고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받아들여지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악을 그냥 모른 척 하고 묻어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밝힐 건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하십시오. 그게 땅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를 이방인처럼, 세리처럼 여기십시오. 그것이 용서하는 길입니다. 그런 용서가 안 된다면 기도하십시오. 두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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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7155
269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7116
268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7091
267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7089
266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7073
265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7057
26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7045
263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7031
26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7025
261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7025
260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7015
259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995
258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983
257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6926
256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917
255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886
254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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