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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기타 조회 수 11674 추천 수 62 2005.10.09 23:39:28
성경본문 : 출애굽기 32:1-14 
http://wms.kehc.org/d/dabia/10월9일.MP3http://wms.kehc.org/d/dabia/10월9일.MP32005. 10.09.       출 32:1-14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노하신 야훼
요즘도 간혹 목사님들이 설교 시간에 어떤 사회적인 큰 사건이나 자연 재해 같은 것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연말에 있었던 서남 아시아의 쓰나미를 가리켜 예수 믿지 않는 지역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처럼 말하거나 지난달 미국 뉴올리안스에 닥쳤던 카트리나 해일 사건을 동성애자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징벌하실까요? 그렇게 말씀하는 목사님들의 주장은 옳은 걸까요? 이 세상의 일들은 우리의 판단을 넘어서기 때문에 이런 독단적 언행들이 멈추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만 할까요? 가장 우선적인 방식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서 성서가 무슨 대답을 주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앞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축제를 벌인 사건이고, 뒤 단락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에 관한 것입니다. 뒤 단락인 7-14절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야훼와 모세가 이스라엘의 큰 잘못을 놓고 옥신각신 하는 것 같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먼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내려 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에서 데려 내 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저들이 내가 명령한 길에서 저다지도 빨리 벗어나 저희 손으로 부어 만든 수송아지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라고 떠드는구나!”(7,8절). 그리고 이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백성을 잘 안다. 보아라.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진노를 내려 저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리라. 그리고 너에게서 큰 백성을 일으키리라.”(9,10절).
이런 구절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읽는다면, 야훼 하나님이 참으로 시시한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그렇게 화가 치민다는 건 그만큼 성숙하지 않다는 의미이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노를 내신다는 게 말이 되나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약점도 아시고, 그 속 중심도 아시고, 그 결과도 다 아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화를 낼 것까지 없다고 보는 게 옳은 거죠.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이런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화를 내고 징벌을 가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과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나요?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 인간과 다를 게 하나도 없겠군요.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렇게 노를 내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도 그렇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모세가 하나님 야훼의 노기를 풀어 드리기 위해서 애원하였다는 11절 말씀을 보면 그 사실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모세가 이제 하나님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오셨는데, 이제 와서 이 광야에서 모두 죽여 버린다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 말하겠느냐, 하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모습은 흡사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왕에게 그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해서 백성들이 견뎌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호소하는 신하와 비슷합니다. 모세는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제발 화를 내지 마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의 명예를 걸고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다 너의 후손에게 주어 길이 유산으로 차지하게 하겠다’고 맹세해 주셨던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12,13절). 이 말을 듣고 야훼는 재앙을 거두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사람처럼 마음을 바꾸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의 호소에 징벌을 내리지 않을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그러실 일이지 왜 이렇게 말을 바꾸시는 걸까요? 성서는 왜 야훼 하나님을 우리 사람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일까요?
우리는 일단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성서 말씀은 야훼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게 아니라 그의 인격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시고, 자신의 의지를 펼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교류하신다고 말입니다. 원래 계획했던 징벌을 거둔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쉽게 변한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비하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비록 성서에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한 품성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기계적으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인격적으로 활동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금송아지 제작
정작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제작했다는 게 과연 그렇게 노를 낼만한 일인가에 있습니다. 물론 금송아지는 우상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을 조금만이라도 이해한다면 우리가 이 문제를 한 두 마디로 재단할 수 없을 겁니다.
오늘 본문의 앞 단락을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이집트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곧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일은 아주 요원하게 보입니다.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병 치료 문제, 가족관계 등, 수많은 문제들이 이들의 광야생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그들이 소수민족으로서 업신여김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생존 자체는 크게 위협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자유를 얻은 것 말고는 모든 게 불안한 상태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자신들이 의지하던 모세는 40일 동안이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대변자 노릇을 하던 모세의 형 아론을 찾아가서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1절). 이런 요청은 매우 절실한 겁니다. 이집트에서 자신들을 이끌어낸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이 상황은 불확실성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성만큼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이런 경험은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있을 겁니다. 대학입시를 앞둔 입시생들이나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은 불안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 전체가 이런 불안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어떤 것을 성취하면, 그 즉시로 그런 것들은 불확실한 것들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삶을 견뎌낼 수 없을 만큼 불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와서 신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요구한 신이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야훼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야훼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모세를 직접 보기만 하면 그들이 그런대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세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으니까 결국 하나님이 안 계신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을 좀 더 확실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믿고 싶었습니다.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모든 인간들에게 있습니다. 일단 우리의 감각에 들어와야만 우리는 그걸 확실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마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는 그것만큼 확실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조건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바로 이런 물질에 달려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먹을 걸 찾아 헤매고, 그런 경험이 많았던 사람이 무슨 방법으로라도 먹을 걸 비축하려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고집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인간들에게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야훼 하나님이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훼 하나님은 무엇을 문제로 삼으신 건가요?
다시 9b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이 백성을 잘 안다. 보아라.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제작 사건을 ‘고집’으로 보셨습니다. 아마 정확하게 말한다면 모세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에 들어간 모세에게 그런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 것이겠지요. 모세는 이 백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고집이 센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진탕 먹고 마시고, 춤추며 ‘정신없이 뛰놀았습니다.
그 당시의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광야생활에 지쳐있던 그들이 용케도 금으로 된 송아지 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마 자신들을 대견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비록 그들이 지금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이지만 금송아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의 과학기술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누가 보더라도 이건 ‘인간승리’입니다. 그럴듯한 제사를 드리고 멋진 한 마당 축제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런 행동을 고집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야훼 하나님은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시는 분이라는 말인가요? 축제 자체를 부정하신다는 말인가요? 이스라엘 역사에도 축제는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황홀하게 아름답습니까? 도대체 지금 광야에서 만든 금송아지와 솔로몬 성전과는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요?
사실 인간이 예술을 통해서 무엇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금송아지나 솔로몬 성전이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금송아지는 우상이고 솔로몬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 사건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겉으로 보면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양쪽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이 이룩한 멋진 예술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런데도 성서는 금송아지를 책망하고, 솔로몬 성전을 칭찬했습니다. 왜 이런 편파적인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문제는 우리가 이해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흡사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것처럼 우리의 생각 너머에 있는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금송아지 건은 역사적 배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2장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보도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남쪽 유대는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었지만,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장군이 나라를 따로 세웠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유대지역인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여로보암은 자기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순방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베델에,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습니다. 남북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왕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가장 크게 어긋난 왕으로 평가되는 사람이 곧 이 여로보암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광야의 금송아지와 여로보암의 금송아지가 매우 유사한 전승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금송아지라는 예술품 자체가 벌받을만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건 그저 사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 삶의 목적이 되면 그게 곧 우상숭배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성서는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명이 발현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금송아지에 도취하면 결국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기회는 달아나버립니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해보려다가 모든 삶을 소진시키고 맙니다. 성서는 그것을 ‘고집’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집을 부리는 사람에게서 생명의 영은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징벌이기도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금송아지 같은 고집이 없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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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196
269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7165
268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7158
267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7155
266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7145
265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7118
26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7089
263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7082
26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7079
261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7065
260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7064
259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7061
258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7013
257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7011
256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956
255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937
254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6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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