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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계명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092 추천 수 93 2007.07.22 14:47:57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0722.mp3 
성경본문 : 신명기 30:8-14 
mms://wm-001.cafe24.com/dbia/070722.mp3하나님과 계명
2007.07.22. 신 30:8-14

야훼의 말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신명기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압 광야에서 행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이 설교를 끝내고 모세는 죽었습니다.(34장) 신명기서는 모세의 유언과 같습니다. 그가 거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의 법인 계명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화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는 권선징악이라는 경구처럼 너무나 뻔한 소리로 들립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여러분도 역시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뜻이구나 하고 지나갔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고대인들에게 준 종교적 교훈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오늘도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끌어가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입니다. 밥을 꼭꼭 씹으면 깊은 맛이 우러나오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8절에서 신명기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 것이며, 그의 모든 명령을 실천하게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야훼의 말씀이라니, 이게 무슨 뜻인가요? 야훼 하나님은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말을 하려면 입이 있어야 하고, 성대도 있어야 하고, 더 근본적으로 숨을 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그런 발성 기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분들은 없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처럼 말을 할 줄 모르는데, 오늘 본문은 야훼의 말씀이라고 언급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 ‘말’이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말만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합니다. 꿀벌들도 자기들끼리 말을 합니다. 개미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상어와 돌고래도 특별한 전파를 통해서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해서 그렇지 어쩌면 나무들끼리도, 풀과 바위도 서로 말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의 차원을 더 넓혀서 생각하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조금씩 이해가 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처럼 소리를 내서 말씀하지 않고 이 세계 전체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걸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 전체를 통해서 사람에게 말을 겁니다. 그걸 알아듣는 사람들이 바로 영성가이며 신학자들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알아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신명기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야훼의 말씀, 그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왜 자신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복을 준다고 약속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계명을 잘 지키면 실제로 복을 받습니까? 9a절 말씀에 나온 복의 내용을 보십시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 너희 몸의 소생들, 가축의 새끼들, 밭의 소출을 넘치게 해주실 것이다.” 사업도 잘되고,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고, 자식들도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신자가 아니라면 계명을 지켰다고 해서 누구나 이런 복을 받는다고 믿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오히려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에 열심히 다녀도 사업도 망하고, 고생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바로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당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놓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계명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의 현실이 있습니다. 이런 딜레마 앞에서 신자들은 서로 다른 극단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한쪽의 사람들은 무조건 복을 받는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는 기도가 우리에게 많지요?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믿음이 없거나 말씀을 바르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다비아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어떤 분이 교회 부흥회를 참석했다고 합니다. 부흥 목사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양한마리(30만원)을 바치고 서원기도를 드리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실 세속적인 복에 신앙의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겠지요.
다른 한쪽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완전히 무시하고 세상의 법칙대로만 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충고일 뿐이지 실제로 세상살이와 직결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살이를 이원론적으로 나눈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의 지혜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유명무실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두 종류의 신자들 모두 바람직한 신앙 태도를 가진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계명에 대한 맹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불신도 아닙니다. 이렇게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이유는 계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데서 벌어집니다.

계명과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계명은 일반적으로 십계명을 비롯해서 모세오경에 기록된 모든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걸 율법, 명령, 계명 등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그 계명을 지키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잘 되는 것이 곧 야훼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사실입니다. 9b절을 보십시오. “야훼께서는 마음을 돌이키시어 너희를 잘되게 해주시는 일이 마냥 기쁘실 것이다. 일찍이 기뻐하심으로써 너희 선조들을 잘되게 해주셨듯이 너희에게도 잘 해주실 것이다.” 이것이 계명의 본질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머니가 딸에게 밤 11시까지는 집에 들어와야 한다 하고 말씀했다고 합시다. 이 말을 한 어머니의 마음은 딸이 이 말을 잘 지키는가 아닌가를 살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딸이 잘되는 걸 기뻐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계명 자체에 매달려서 살아갑니다. 위에서 예로 든 딸이 밤 11시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딸은 11시 전에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와 놀다가도 11시를 지키기 위해서 혼자 집에 들어옵니다. 1분 전에 들어와서 한숨을 내쉬고, 1분 후에 들어와서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눈치를 봅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계명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하게 살아간다면 그는 계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잘되게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본질로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잘되게 해주시려고 한다지만 실제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문제는 제가 이 자리에서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사람들이 왜 고난을 받는가 하는 질문처럼 우리가 죽거나 이 세상이 끝난 후에나 알 수 있는 비밀,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다만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된다는 말이 당장 부자가 된다거나 불치병이 낫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당장은 복권이 당첨되어서 좋은 집도 사고, 사업체도 하나 꾸리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잘되는 길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물론 신명기는 위에서 인용했듯이 그런 복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기자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아직은 어린아이들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이 말은 곧 사람이 잘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잘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모르듯이 우리는 지금 그런 걸 잘 모릅니다. 겉으로는 출세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했던 일이 어느 순간에 나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잘된 일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게 숨 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사람은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의 참된 만족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성서가 주는 대답은 계명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은 계명과 하나님이 하나라고 말합니다. “물론 너희 하느님 야훼의 말씀을 들어 이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계명과 규정을 지키고 너희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와야 그렇게 해주실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딸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밤 11시에 들어와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어머니 자체는 아니지만 이 딸이 밖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는 그 말씀이 어머니와 동일한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밤 11시라는 말에는 딸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그대로(존재론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데 있는 법
계명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계명을 절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계명은 꾸준하게 변해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축업으로 살아갈 때의 계명과 농경생활을 할 때의 계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신약성서 시대의 계명과 오늘 21세기의 계명도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라는 말씀은 동일하지만 계명의 형식들은 달라집니다. 예컨대 구약시대에는 삼겹살을 먹지 말아야 했지만 지금 우리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먹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오늘의 교회에서는 여자들도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계명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계명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과 계명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모순적인 것처럼 들리지요? 그렇다면 하나님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이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설명해야겠군요. 계명은 그것이 제시된 그 시대에 한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시대가 되면 그 계명은 새롭게 해석되고, 그 시대에 적합한 형식으로 다시 제시되어야 합니다. 일단 그렇게 제시된 계명은 이제 그 시대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저는 지금 계명과 율법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마다 새롭게 제시된 계명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계명 없이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입장에 반대합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영적으로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되지 교회, 조직, 예배의식 같은 것들이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질은 형태 안에 담기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이런 형식들이 필요합니다. 계명 없이 하나님을 따른다는 말은 밥을 직접 먹어보지도 못한 채 밥맛을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거짓말입니다. 그건 아예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 계명과 형식이 본질을 바르게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은 늘 반성해야겠지요.
계명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신명기 기자는 그 당시의 속담을 빌려서 정확하게 변증합니다.(11-14절)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 싫어하듯이 계명을 지키기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하늘이나 바다 건너편에 있는 것으로 핑계를 댄다고 합니다. 신명기 기자에 따르면 이 계명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바다 건너편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곳에, 사람들의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지킬 수 있습니다.(14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법인 계명은 우리 옆에 있습니다. 이웃을 물건이나 원수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구약성서는 누누이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에 가야만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옆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고, 교회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호흡처럼 옆에 계시듯 하나님의 계명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눈을 감지 말고, 귀를 막지 않으면 그 계명이 보이고 들릴 겁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하나님에게 돌아온 사람이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그분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렇게 계명을 따르는 우리를 잘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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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하깃

July 22, 2007
*.0.179.183

적확하고 꼼꼼한 성경 강설을 듣는 재미 솔솔하고 나아가 감동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고 그의 사랑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있을 것이다.”(요 15:10, 쉬운성경)
주님의 음성도 들려옵니다.

주님의 계명의 안전하고 거룩한 울타리 안에서
춤추는 천국의 자유!
이 자유로운 바운더리를 형성해주는 계명을 사랑하고 지킴이
하나님 백성의 본분임을 다시 자각하게 됩니다.
이 계명에 귀먹지 않도록, 눈멀지 않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이끄심에 민감하게 되도록 기도해봅니다.
profile

[레벨:28]정성훈

July 22, 2007
*.55.147.1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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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삶에서..

August 04, 2007
*.106.177.171

첨 들어봤습니다..글과 다르게 목소리가 참 따뜻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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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조용한 산책

April 14, 2008
*.63.182.61

교수님! 저 이병진이 아니고 김은옥입니다. 제 비번을 몰라서....
교수님의 뜨거운 영성에 늘 감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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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성령강림절 집행 유예의 삶 (마 1324-30, 36-43) [14] 2014-07-20 7323
281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314
280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311
279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7263
278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247
27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242
276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241
275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230
27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228
273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7219
272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213
271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168
270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7166
269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7123
268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7102
267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7102
266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7083
265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7072
26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7055
263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7036
26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7035
261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7035
260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7022
259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7010
258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992
257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6942
256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925
255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903
254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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