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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집

기타 조회 수 9416 추천 수 21 2004.07.02 15:47:24
성경본문 : 마태복음 12:33-37 
언어의 집
마 12:33-37

소위 '나무와 열매' 비유는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이미 산상설교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마 7:15-20
참조). 산상설교에서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좋은 나무가 좋은 열
매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전자는 인식론적 관점이라면 후자는 존재론적 관점입니다. 병행
구인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에서는 이 양자가 더불어 강조되고 있습니다(눅 6:43-45). 비록 강조점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나무와 열매의 비유에서 인식론과 존재론을 따로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에
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조금 구별될 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바의 핵심은 인간이 내면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
34,3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결
국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오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놓
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두었다가 악한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이 독사의 족속들아!"라는 약간 모독적인 호칭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 단락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마귀 들린 사람'이라고 헐뜯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
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잘 들어라.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
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
다."(마 12:31,32).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시면서 나
무와 열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그런 죄는 예수를 가리키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모독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중하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는 쉽지 않
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덕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교회의 가르침
을 거부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해석이야말로 아전인수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곧 성령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한다고 해서 성령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바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역시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미 같
은 구절에서 예수님 스스로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활동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단절시킨
것이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정확하
게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은 배움을 통해서 그것을 분간할 수 있게 되고, 의지가 약해서 죄를 범한 사람은 의지
를 강하게 함으로써 그런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런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마음이 닫혀 버린 경우에는
도저히 돌아설 가능성이 없습니다. 돌아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곧 용서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
나님이 인색하기 때문에 용서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돌아서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답지 않게 '독사의 족속들아!'라는 욕으로 부른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
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식, 사
회 및 종교적 위치, 도덕성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는 것들을 거의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그
런 것들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성령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게 그들의 비극이었
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가소롭게 보였습
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사사건건 충돌했습니다. 이렇게 충돌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
의 마음이 진리를 향해서 돌아설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였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은 결코 회
개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용서받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요? 자기의 세계가 너무 확고하기 때문에 자기를 성찰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의 마음은 분명히 생명의 영이 들어올 수 없도록 폐쇄되어 있습니다. 요즘
강남의 부동산 문제로 인해서 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정부에서 부동산 투기 억
제책을 내 놓아도 백약이 무효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태에 이른 것은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 신념이 우리에게 너무나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쉽게 돈을 벌고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니까 이런 대열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모두 나서고 있다보니 집값이 천
정부지로 올라갑니다. 저는 이런 투기 열풍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매도하려는 게 아닙니다. 주변의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대개의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따라가게 마련이니까 그들을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습
니다. 다만 이런 강남의 부동산 투기 현상은 생명의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완전히 폐쇄시키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합니다. 아마 현대인들이 이런 방식으로만 살아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이 아닌 것에 마
음을 몽땅 빼앗기면서도 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으로 인해서 마음을 돌이킬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
다.

마음과 말의 상관관계
용서받을 기회마저 상실할 정도로 마음이 부패하고 단절된다는 가르침은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
왔습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두었다가 악한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겠느냐?" 마음을 돌이킬 가
능성이 없게 된 이유는 바로 평소에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평소에 음
악의 본질을 생각하면서 음악공부를 한 사람은 결국 음악을 창조적으로 만들어가지만 음악을 자기 개인적인
성취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면서 공부한 사람은 결국 음악을 상품으로 만듭니다. 평소에 늘 피해의식에 빠져있
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거나 말을 할 때도 그런 식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무조건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려는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은 그런 말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은 마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경우에 남의 마음을 아프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
이 한번의 실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복되는 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러나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남
의 마음을 아프게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평소에 그런 것을 마음에 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음은 '언어의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덱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만
존재가 담기는 집인 언어는 또 다시 마음이라는 집에 살고 있습니다. 언어의 집인 마음에 무엇을 쌓아두었는
가에 따라서 말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말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변화되지 않
는 한 말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양을 쌓는 데서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닫아둔 사람들은 그 마음
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게 비극입니다.  
저는 티브이 프로그램 중에서 시사 토론을 즐겨 시청하는 편입니다. 영성이나 자연 다큐멘터리나 품격 있
는 예술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시사 토론을 선택하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티브이 프로그램이 거의 주부나
청소년 대상으로 짜여지기 때문에 제가 볼만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시사 토론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온 패널들의 토론 자세나 내용을 듣다보면 짜증스러워질 때가 많아서 채널을 다시 다른 데
로 돌리기도 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자기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패널로 나오게 되면 그 토론은 아무런 결과도 없이 끝납니다. 시청자
들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정보도 얻지 못하고, 사회와 역사의 깊이를 공부하지도 못하고, 흡사 동네 꼬마들의
말싸움을 구경했다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합니다. 이런 토론을 보면서 저는 다시 한번 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평소에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에 따라서 모든 사물과 사태를 바라본
다고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오늘의 청소년들이 평소에 무엇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게 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미래는 그렇게 밝지 않습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자연,
생명, 평화, 예술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히려 핸드폰이나 인터넷이나 연예인들만이 그들의 마음에 깊
숙이 새겨져 있습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중고등 학생들을 경쟁위주의 입시에 몰아넣고 있는 이 교육 체
제에서 자란 우리의 청소년들은 성인이 되어도 결국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고 말을 하고 행동하게 될 것입니
다. 오늘 예수님 말씀처럼 평소에 마음에 쌓아둔 것을 어른이 되어서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어야 나중에 선한 것을 내놓게 되고,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면 어쩔 수 없이 악한 것을, 악한
말과 행동을 내놓게 됩니다.

선한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일단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고운 말을
사용하고, 그저 좋은 것들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좋은 마음을 평소에 품고 있으면
결국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에 일리가 있다
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두 가지 방향에서 노력을 합니다. 하나는 봉사활동입니다. 장애 시
설을 방문하거나 호스피스 일을 한다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봉사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봉사 활동이
티브이 화면에 잡히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들은 그들의 얼굴에서 평화와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생존경쟁
의 틈바구니에 살면서도 이렇게 봉사활동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의 정신
세계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심리치료입니다. 교회나 성당, 또는 절에 다니면서 정신을 맑게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단전호흡 같은 것도 역시 이런 정신치료의 일종입니다. 이런 일을 좀더 넓게 본다면 테
니스, 골프, 또는 등산 같은 취미활동도 역시 정신건강을 위한 수단입니다. 이렇게 평소에 몸과 마음을 좋은
것으로 다스려 나감으로써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것'이 무엇인지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
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이비'에 속습니다. 가짜 참기름을 진짜 참기름으로 알고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봉사활동을 다니고, 자기의 심리를 치료하고, 적당한 취미생활을 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에 선한 것
이 쌓이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너무 안이하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야말로 교양입니다. 교양은 상당히 세련되어 보이기 때문에 무언가 그럴듯한 것이 들어있는 것처럼 여겨집니
다. 그러나 교양은 교양에 불과합니다. 그 교양은 순식간에 인간의 자기 확신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바리
새인들에게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모든 지성과 종교성과 교양들은 인간의 욕망이나 교만과 결탁되는 순
간에 우리의 영혼을 경직시켜버립니다.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선한 것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절대화
되는 순간에 우상이 됩니다. 그런 우상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해방시켜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쌓아두어야 할 선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
다. 우리가 나름대로 어떤 것으로 개념 규정을 내릴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선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에게서는 완전한 선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약간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을 때 아무 말 하지 않고 무조건 도와주는 것이 선인지, 아니면 그 청을 거
절함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립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선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선은 이런 것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하다고 볼 수 없
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오는 선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선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부자와 바늘귀'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마 19:16-26).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다
음과 같습니다. "왜 너는 나에게 와서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이
젊은이는 자기가 열심히 추구한 봉사, 도덕, 종교의식을 선한 것으로 생각하고 어쩌면 자기가 예수님에게서
칭찬 받을 수 있다는 심사로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 자체를 무화(無化)시킵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인데 그 하나님을 인간이 좌지우지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선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라는 것은 곧 평소에 하나님을 마음에 새겨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
리의 마음에서 활동하게 되면 저절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말이 너무 형식적이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교회에서 귀가 닳도록 듣는 소리이기 때문에 물론 그렇게 들릴 수도 있습
니다. 그러나 평소에 하나님을 마음에 새겨두라는 이 가르침은 단순한 종교적 경건성을 일컫는 게 아닙니다.
어떤 고정된 하나님 상을 마음속 깊이 아주 확실하게 새겨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사이비 종파나 광
신도들이 하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확신을 강화시키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는지요. 인간의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고 생명의 영이 우리 안에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놓은 삶의 태도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우리의 경험이나 인식체계 안에 가두어둘 수 없
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생각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고정관념을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
야만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어야 할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고정관념에 묶여있었는가를 생각하면 이 사실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실제적으로 잘못한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비교적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자기의 고정관념을 허물지 못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율법과 전
통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의 영으로 작용하는 예수님의 복음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이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지 않았
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님을 향해서 '마귀 들렸다'고 망언하게 됨으로써 씻지 못할 죄를 지었
습니다.

말에 대한 책임
오늘 말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져야 할 때가 온다는 사실을
준엄하게 선포합니다. "잘 들어라.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
다. 네가 한 말에 따라서 너는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게도 되고 죄인으로 판결 받게도 될 것이다."(36,37절).
어떻게 보면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말에는 우리의 삶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
을 해석하면 그 사람의 삶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만약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말을 한다면 그것 자체가 자
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말로 잠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는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연히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말꼬리를 잡겠다
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또는 우리가 실수로 내뱉은 모든 말에 대한 책임추궁도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우
리의 생각, 말, 삶 전체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에 새겨두며 살아
왔다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그 심판의 날은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에 우리에
게는 구원의 때가 될 것입니다. <2003.11.2>

profile

[레벨:13]토토

May 21, 2007
*.158.162.101

전 예술에는 정말 문외한인것 같습니다
아마 요즘의 청소년들처럼 상품화된 문화에만 길들여져서 그런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예술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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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479
203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683
20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436
201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640
200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596
199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6018
198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8529
19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682
196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5092
195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497
194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517
193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940
19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5023
191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878
190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303
189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733
188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8178
18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811
186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441
185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8065
184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445
183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314
18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313
181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198
180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201
179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628
178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189
1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9033
176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1358
175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386
174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10467
173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611
17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6126
171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577
170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8009
169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788
168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480
16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876
166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438
165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614
164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6016
163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499
16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480
161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560
160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6038
159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442
158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6126
15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833
156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163
155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763
154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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