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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기타 조회 수 9508 추천 수 30 2004.08.22 23:59:13
성경본문 : 이사야 1:10-20 
2004. 8.22.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사 1:10-20

헛된 예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앗시리아에 의해서 매우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던 기원 전 8세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던 제1 이사야는 그 시대를 향해서 무섭도록 날카로운 심판의 신탁을 외칩니다. 이미 1:2-9에서 유다를 배반자로 규탄합니다. 그 중에 4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아! 탈선한 민족, 불의로 가득찬 백성, 사악한 종자, 부패한 자식들 야훼를 떠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기고 그를 배반하여 돌아섰구나.” 이런 설교를 들은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이사야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많은 반론을 전개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이사야는 오늘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유다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그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전합니다. “무엇 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었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11절). 우리가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온갖 제물을 차리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반드시 제물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제사의 종류에 따라서, 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제물이 바쳐졌습니다. 바쳐진 제물이 동물일 경우에는 피를 제단의 일정한 장소에 뿌리고 그 동물의 좋은 부위는 제사장에게 돌아가고 내장은 불에 태워지며 나머지 부분은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는 이 이외에도 여러 예식이 따라붙습니다만, 여기서 핵심은 제물 자체였습니다. 아마 이사야 시대에는 이렇게 제물을 드리는 제사 행위가 상당히 강조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종교 의식은 그 역사가 깊어질수록, 더구나 그 제사의 본질로부터 멀어질수록 겉모양만 화려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겉모양만 화려해지는 제사 행위는 제물의 물량적 크기가 늘어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모임의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13절 후반절에서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 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이사야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자주 모인다는 것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명분으로 모여서 화려한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지만 자신들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일련의 행위를 가리켜 ‘헛된 제물’, 또는 ‘헛된 짓’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13절). 이사야에 의하면 그 당시 유다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헛된 제사’였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헛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정성을 다 기울여 드린 예배가 결국 헛된 것이었다는 이사야의 주장은 우리를 두렵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은 인간의 행위 자체가, 특히 우리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부르는 행위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게 못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에는 우리의 종교적 행위는 그 본질에 부합되어야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게 헛된 제물이며 헛된 짓입니다.

왜 헛된 예배인가?
이사야는 유다 백성의 제사가 헛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15절). 많은 제물을 바치면서 기도했는데도 야훼 하나님이 쳐다보지 않으신다면 그 제물은 당연히 헛것이 되고 맙니다. 아마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제물을 준비하고 정성껏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자기들 나름대로의 만족감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많은 군중들, 여러 종교적 이벤트, 합창단, 거룩한 기도, 풍성한 제물을 통해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이사야의 눈에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 외면하시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사야가 좀 야박합니다. 웬만하면 인간의 그런 종교심을 눈감아 줄만도 하지만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단정적으로 선포합니다. 자기가 하나님도 아닌 주제에 이렇게 단언한다는 것은 좀 과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는 이렇게 과감합니다. 조지 폭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그런 사람들은 ‘예’와 ‘아니오’로만 대답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끊고 맺는 태도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유다 제사장과 백성들의 기도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들의 손이 ‘피투성이’(15후)라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거론합니다.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16,17절).
이사야의 주장은 그렇게 허황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구체적이고 논리적입니다. 이사야에 따르면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그 예배하는 자의 삶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좀 저급한 종교는 대개 종교 행위의 주술적인 면이 강조되기 때문에 사람의 삶이 별로 강조하지 않지만 오늘 이사야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인간의 윤리적 삶의 차원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이사야는 그 시대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을 보고 불을 토하듯 하나님 야훼의 심판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억눌린 자와 고아와 과부를 소외시키거나 더 나아가서 그들을 학대하면서 제사 행위만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는 그런 모순 말입니다. 이런 분석은 정확합니다. 자기의 삶이 공허하거나 무의미하거나 오히려 분노와 탐욕으로 가득할수록 겉모양에만 집중하듯이 참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부족할 때 예배의 겉모양에 치중할 것입니다. 이런 모순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이사야의 말씀이 우리 한국교회의 실상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그 많은 예배, 헌금, 봉사, 수고, 그리고 하늘을 삼길 듯한 기도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삶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까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서로 다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우리의 열정적인 예배와 내용이 없는 삶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감사, 기쁨, 자유, 평화보다는 가족 이기주의, 물질에 대한 욕망, 종교적 독선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 혹은 하나님의 용서
그런데 우리는 윤리적 삶을 강조하고 있는 이사야의 신탁을 좀더 신중하고 깊이 있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사야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윤리적 삶의 실천을 더 중요한 것으로 설교하는 것일까요? 예배와 윤리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거꾸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주장도 역시 정당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윤리적 삶 없이 그저 화려하게 예배드리는 태도를 비판한다고 해서 예배 없이 윤리적 기준만으로 살아가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가?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바로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리고 악에서 손을 떼라고 선포하던 이사야가 이제 여기서는 “너희 죄가 ...” 용서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윤리에 대한 성서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도덕 교사들이나 윤리 선생들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근거해서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지만 성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죄는 자기가 윤리적인 행동을 실천함으로써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용서받음으로써 씻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치고 있듯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되는 것이지 인간 관계에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아마 이런 주장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노력하면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여기서 무슨 하나님이 필요한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인간의 휴머니즘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런 차이는 그렇게 쉽게 좁혀질 수 없습니다. 휴머니즘은 나름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조건 백안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을 단지 그런 휴머니즘으로 대체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성서가 이렇게 인간의 자기 반성이나 휴머니즘보다 하나님의 용서를 신앙의 본질로 여기는 이유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잠시 뉘우치고 착하게 행동할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윤리적인 삶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도 자기 중심성을 벗어날 수 없고, 더 나아가서 어떤 상황에서는 매우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자신을 성찰하면서 다스려나가면 상당한 수준의 도덕성을 확보할 수 있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세계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곧 죄를 씻기는 바른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순종의 삶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단 하나의 사실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순종’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태도는 순종입니다.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게 되리라.”(19절).
앞에서 유다 백성들의 제사를 가리켜 헛된 것이라고 일갈하고 이제 마지막 부분에서 ‘순종’을 제시하고 있는 이사야의 이 설교에서 우리는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신앙의 핵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비록 율법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담고 있지만 신앙의 본질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겉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야훼를 향한 순종에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기보다 낫소.”(삼상 15:22). 우리는 예배를 잘 드리는 게 곧 신앙적으로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무엘과 이사야는 다른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배 자체가 의미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핵심입니다. 사무엘의 비난을 들은 사울의 행동이나 이사야의 경고를 들은 유다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는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런 제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이런 제사와 예배는 아무리 드려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니까 무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순종의 삶은 무엇인가요? 삶의 근거를 자기 아니라 하나님에게 놓는 것이 곧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희망 안에서 삶을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땅과 후손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 단지 화려한 제사 행위를 통해서 그런 약속을 스스로 성취해보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을 새롭게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절대적인 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예컨대 예배를 광적으로 드린다거나 취미 생활에 생명을 걸거나 어떤 사람을 소유함으로써 그런 불안을 극복해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사야에게서 다른 것을 배웠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게 되리라.”(19절). 이 말씀에 의지해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모든 삶의 토대를 둔다면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이외의 것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삶을 소진시키지 마십시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헛된 제물이며 헛된 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에게 참된 생명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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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477
169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425
168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395
167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371
166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319
165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296
164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290
163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5245
162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241
161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5240
160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5217
159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5216
158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215
157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5190
156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5188
155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5175
154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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