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기타 조회 수 10552 추천 수 179 2004.12.20 17:57:08
성경본문 : 요한복음 18:33-38 
2004.12.19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33-38

빌라도의 질문
예수님이 살아계시던 당시에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소문이 분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사람의 아들)를 누구라고 하는가?”하고 직접 물으실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외형적인 부분만 생각한다면 예수님보다 훨씬 강력한 대중적인 인기를 세례 요한마저 감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시켜 “당신은 누구신가? 우리가 기다리는 바로 그분인가?”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질문에 기독교의 운명과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그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미 어떤 대답이 담겨 있을 겁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 말입니다. 이 대답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단지 교리문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훨씬 많은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기 위해서 늘 새롭게 생각하는 태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이런 신앙의 심화 과정이 곧 요즘 한국교회가 자주 말하는 영성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 당신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 로마 고위 정치인이었던 빌라도는 재판 자리에서 피고인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당신은 누구냐 하는 질문과 다를 게 없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른 채, 풍문으로 들었든지 아니면 예수를 고발한 사람들에게서 직접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하자 빌라도는 37절에 반복해서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용어에 이 재판의 핵심이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두 번에 걸친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네 말이냐? 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들려 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34절) 하고 반문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37절).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개역성서는 약간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개역성서만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빌라도의 질문을 긍정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공동번역이 원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참고적으로 루터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Du sagst es, ich bin ein König.” 루터의 번역은 간접 화법입니다. “내가 왕이라고 당신이 말하고 있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인가 하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한 번역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모호하게 대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흡사 재판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재판 원리에 따라서 예수님이 자칫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화 당할 일을 피하기 위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듯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질문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또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직접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로 말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새길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 하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에둘러서, 소극적으로 대답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나라
예수님은 영적인 눈높이가 달랐던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설명해보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36절). 예수님은 오직 정치적인 왕만 생각하고 있던 빌라도에게 자신의 왕권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두 번에 걸쳐서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이긴 한데 그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이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이 세상과 이원론적으로 구분된다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무의미합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강조하다가 결국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일종의 초월주의, 또는 순수심령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런 신앙은 하늘과 땅을 철저하게 나눔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물론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만 이 말씀은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 신학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에서 ‘나라’는 어느 한 공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물론 성서를 문자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이 나라를 공간적인 의미로 받아드리겠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 그의 행위로 이해합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말씀드린다면 이 세상에 결코 속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는 인간 중심의 권력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이런 권력으로 집중됩니다. 제가 여기서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적나라하게 권력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 문화, 교육도 역시 권력화 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종교마저도 역시 권력화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 공동체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랑칙령에 의해서 공인을 받은 이후로 점차 로마의 권력에 길들어지지 않았을까요?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좀더 솔직하게 들여다본다면 권력적인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대교회 지향주의는 곧 이런 권력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통치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의 오심이 말구유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죽음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통치가 이 세상의 통치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반증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통치 방법과 얼마나 철저하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늘 낮은 자리에 앉으라든지,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급기야 ‘원수사랑’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산상수훈도 역시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과 다른 통치 방식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재림과 심판
예수님 나라의 통치가 이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아기 예수의 말구유나 십자가, 그리고 예수님 공생애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과 가르침에서만 확인되는 게 아니다. 훨씬 궁극적인 ‘차이’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구유와 십자가와 공생애 사건은 이 세상의 권력 지향적 통치를 ‘거부’하지만 부활은 이 세상의 권력 지향적 통치를 ‘무력화’합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즉 이 세상의 권력에 대한 거부와 그것의 무력화가 곧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결코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두 가지는 그 성격이 좀 다릅니다. 이 세상의 권력을 거부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셨듯이 세상의 강한 힘 앞에서 허물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권력이 어찌 해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앞의 사건은 우리가 최선을 기울여 이루어가야 할 삶의 태도이지만 뒤의 사건은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역사 안에서 그 권력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살아가면서,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개입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는 대강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2천년 전 예수 사건에,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개입했던 바로 그 하나님이 다시 우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새기는 절기입니다. 이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재림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건 하나님의 전혀 다른 생명의 통치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은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전혀 다른 통치가 무엇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통치는 은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통치가 실행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비밀이며, 종말의 비밀입니다.
유대교 신학자인 마틴 부버가 기독교 신학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예수 이후의 이 세상이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하게 이 세상은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아무런 변화도 없다. 여전히 무죄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폭력과 증오가 지배하고, 삶의 무의미가 우리를 감싸고 있다. 메시아가 왔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라는 말인가? 부버의 논리는 정당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확실하게 하나님의 나라고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메시아를, 그런 ‘유대인의 왕’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에 대해서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거나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대답으로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계와 역사를 통치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있으며, 결국 종말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생명의 세계를 완성시키십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이 기다리는 종말론적 생명의 세계는 일종의 신비 사건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재림만이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도 역시 신비이고, 우리의 현재 생명도 신비라는 점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될 궁극적 생명이 은폐되어 있다는 말은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은폐의 방식으로 생명을 완성시키러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오셨으며, 다시 오신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형적 삶의 조건을, 그런 복지를 향상시키는 분 정도로 생각한다면 ‘유대인의 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그런 능력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오실 때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수소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마2:2). 이제 마지막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이십니까?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왕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까? 참된 ‘유대인의 왕’인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십니다. 이런 대강절의 신앙 안에 있는 여러분, 그 간절한 기다림의 끈을 놓치지 말고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오.

profile

profile

[레벨:11]권현주

December 20, 2004
*.235.147.161

예수님이 이 현실에 개입하시는
은폐와 신비의 방식,
궁극적 지향인, 생명의 완성을 향한 도정...

예수님의 존재를 살아있는 감각으로 느끼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영적인 삶...

존재의 우울한 구름속을 걸어가면서
이 약속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기쁨이 다시 되게하는 것은...
profile

[레벨:100]정용섭

December 21, 2004
*.235.145.20

권 선생,
고구마 마을(?)은 잘 다녀오셨는지.
평생 가부장적 한국의 질서 안에서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고
전투적으로 살아오신 분이
이제 기독교의 영성으로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느라
생각이 많으신 것 같군요.
그 두 세계가 완전히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화를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겠지요.
기독교적인 영성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더 나아가 적극적인 '앙가주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낭만도 아니고 타협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또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할 수도 있기도 한
어떤 독특한 힘을 경험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재림으로 해명되고 있는 그런 기독교적 영성은
물론 독특하기도 하지만 보편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게 있다는 사실 조차도 별로 생각하지 않지요.
단지 교리문답에 머물러 있거나 비현실적인 것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런 영성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구도자적인 공부를 수행해나가기 힘들끼 때문에
대개는 주변에 머물고 맙니다.
아마 매주 설교를 하고 신학생들에게 신학을 강의하는 나 자신도
이렇게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다만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회가 오면 영의 정수에 참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 기대를 갖고
천천히 살아가는 것이죠.
이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0647
253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837
252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6812
25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6792
250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5] 2018-06-17 6778
249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4] 2018-03-18 6736
248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732
247 부활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 (요 10:22-30) [13] 2016-04-17 6719
246 창조절 하나님께 가까이! (히 10:19~25) [2] 2021-11-14 6706
245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6701
244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671
243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6659
242 대림절 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 5:2~5a) [1] 2021-12-19 6626
241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6616
240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609
239 성령강림절 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6] 2018-07-01 6599
238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6595
237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84
236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581
235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571
234 부활절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2] 2020-04-26 6567
233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552
232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6520
231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6519
230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472
229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455
228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441
227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414
22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6389
225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6381
224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4] 2018-10-15 6368
223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6335
222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6331
221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6325
220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288
219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6279
218 창조절 욥의 회개 (욥 42:1~6) [4] 2021-10-24 6228
217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6100
216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6083
215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6080
214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6067
213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6010
212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994
211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5989
210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980
209 주현절 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 4:14-21) [5] 2016-01-24 5971
208 대림절 빈 들에서 (눅 3:1~6) [2] 2021-12-05 5953
20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940
206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928
205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5920
204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5919
203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906
202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904
201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883
200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5822
199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820
198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806
19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789
196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5726
195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721
194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5718
193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5717
192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702
191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97
190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5693
189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675
188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5644
187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599
186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5581
185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578
184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553
183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516
182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502
181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482
180 창조절 생명과 지옥 (막 9:42~50) [4] 2021-09-26 5475
17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470
178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5463
177 창조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5] 2021-10-10 5445
176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443
175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430
174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5426
1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420
172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400
171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5398
170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385
169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340
168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280
167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275
166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238
165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219
164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197
163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140
162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5136
161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136
16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5132
159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5132
158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5096
157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5073
156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5063
155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5053
154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5011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