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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기타 조회 수 12389 추천 수 82 2006.02.19 19:07:52
성경본문 : 이사야 43:16-21 
http://wms.kehc.org/d/dabia/06.02.19.MP32006. 2.19.        
새로움의 원천(사 43:16-21)

말씀의 권위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어려웠던 시기에 활동한 한 예언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소위 제 2이사야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하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제가 다른 기회에 몇 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큰 윤곽은 이렇습니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하에 나라를 빼앗기는 운명만은 모면했습니다. 그렇게 130 여년을 버티던 남유다는 앗시리아의 뒤를 이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결국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나라를 잃었습니다. 유다의 귀족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바벨론의 총독에 의해서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근동을 지배하던 바벨론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대신 페르시아가 바벨론과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고, 급기야 근동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새롭게 편성되는 국제질서를 몸으로 경험하면서 아직 포로 생활이 끝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전하기 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 전체와 연관되는데, 그 하나님은 곧 출애굽을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야훼는 “바다에 큰 길을 내시고, 거센 물길을 뚫고 한길을 내신 이”(16절)입니다. 이스라엘을 뒤따라오던 이집트의 군대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거꾸러뜨리시고, 꺼진 심지처럼 사그라뜨리셨습니다.(17a).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시려고 이집트의 “군대와 용사를 출동시켰다”고(17b)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신앙은 기본적으로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홍해가 진짜 갈라질 수 있느냐, 혹은 그건 역사적 사실이다, 하고 논란을 벌입니다만, 그런 건 참으로 무의미한 일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보다는 이스라엘이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벗어났다는 사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출애굽 사건에서 훨씬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내용보다는 성서 기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집트 군대를 “꺼진 심지처럼 사그라뜨리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 야훼 하나님이 이제 7백년이 흐른 다음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지나간 일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사야는 지금 야훼 하나님이 일으키실 새로운 일을 예언합니다. 기원전 13세기에 일어났던 출애굽이 옛 엑서더스라고 한다면 이제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나야 할 포로 귀환은 새 엑서더스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새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하게 보면 논리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앞에서 야훼 하나님이 출애굽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상기시켰으면서도, 18절에서는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 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 물론 19절에서 야훼의 새 일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로 앞에서 구체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강조했다가 바로 이어서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신앙은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걸 전제한다면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이사야의 충고는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사야의 이런 충고는 논리적 모순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무조건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억한다는 것과 집착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사야는 왜 그렇게 중요한 출애굽 사건에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걸까요? 이 대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 집착할 경우에는 그것이 좋은 것이었든지 나쁜 것이었든지 결국은 현재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지적하고 있는 출애굽 사건을 생각해보십시오. 대단한 사건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건 자체가 절대적인 것으로, 그래서 그들에게 반복되어야 할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복고주의라고 이름붙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때가 좋았는데, 그때로 돌아가면 좋겠는데, 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나쁜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울증이 대개는 과거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서 시작할 겁니다. 그렇다면 즐거운 과거는 어떨까요? 즐거운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역시 자기 망상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습니다. 간혹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우리가 결국은 에덴동산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아무리 아름다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즉 기독교 역사관은 순환이나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종말을 향해서 앞으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아무리 좋았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새로운 일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는 이사야의 설교는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만을 염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신앙과 삶의 파괴는 결과이지 원인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정작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곧 과거의 엑서더스에 사로잡히면 결국 새로운 엑서더스를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19a절을 읽어봅시다.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사야는 말하려는 것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이라는 엑서더스가 아니라 오늘의 엑서더스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새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상투적으로 읽지 마세요. 대충 좋은 것이려니 하고 읽지 마세요. 성서  텍스트에서 종교적인 위로를 받으려는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성서 텍스트의 실체로 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2천5백 년 전 이사야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씀을 선포하고 있을까요? 도대체 하나님의 새 일은 무엇인가요? 이런 궁금증은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일단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출애굽 사건과 앞으로 일어나게 될 포로귀환 사건을, 즉 출(出)바벨론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는 바다가 갈라져서 새로운 길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사막과 광야에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 사막과 광야에 물줄기가 생긴다고 합니다. 20절 말씀을 봅시다. “사막에 물을 대어 주고, 광야에 물줄기를 끌어 들이리니, 뽑아 세운 내 백성이 양껏 마시고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들이 나를 공경하리라.” 물론 출애굽 당시에 바다가 갈라지는 일은 아주 큰 사건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구원 행위입니다. 그러나 사막과 광야에 길이 나고 물줄기가 흐르게 된다는 것도 대단한 사건입니다. 어떻게 보면 홍해가 갈라지는 건 그저 그렇게 한번 벌어진 사건으로 끝나버리겠지만 광야의 길과 물줄기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을 지켜주는 원천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이사야의 이런 설교를 듣고 동의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5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난다는 사실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감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두렵기도 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인정하기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아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서 이야기를 냉정하게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한 열망이 아주 강했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서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일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이집트로 돌아가야겠다는 도발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출애굽 당시 20살 이상이었던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두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게 했겠습니까? 바벨론 포로 생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익숙했습니다. 자신들의 조국인 가나안 보다 바벨론이 훨씬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고국은 사막과 광야이지만 바벨론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중심으로 일찌감치 고대 문명을 구가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막과 광야인 가나안에 길이 나고 물이 흐른다는 말을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은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속성이 있습니다.
19a절 말씀은 바로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흡사 바람만보고도 비가 올지 아닐지를 아는 어떤 인디언 추장이 그런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비가 올 조짐을 볼 수 없느냐?”하고 묻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새 일의 원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약간 불안합니다. 과연 우리는 새 일을 보고 있을까요? 이런 말씀은 점쟁이처럼 미래에 일으키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예측하라는 것일까요? 그게 가능한가요? 사실 저도 무엇이 야훼 하나님의 새 일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남북의 통일이 곧 그런 일일까요? 이렇게 역사가 변하는 그런 조짐이, 그런 싹이 우리 눈에 들어온다는 말일까요? 옛날에 비해서 훨씬 잘살게 된 우리의 경제형편이 곧 그런 걸까요? 아니면 가부장제가 점차 완화되고 남녀평등의 실현이 바로 그것일까요? 노동으로부터 해방인가요? 여러분의 개인적인 생활형편이 좀 나아지는 건가요? 우리 자녀들이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건가요? 도대체 하나님이 일으키신다는 새로운 일이라는 건 무엇일까요? 이런 구체적인 삶이 우리에게 더 없이 중요한 건 사실입니다. 외로운 사람들이 친구를 얻고, 오래 앓던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고, 실업에 시달리던 사람이 땀 흘릴 수 있는 일자리를 얻는 일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은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도 하찮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이런 것들은 결코 새 일은 아닙니다. 10년 전의 신문을 펼쳐 보세요. 그 뉴스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뉴스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소로우도 <월든>에서 그렇게 말하더군요. 옳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삶의 조건들을 바꿔나가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새 일이 아니라 옛 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사야가 말하는 하나님의 새 일은 무엇일까요? 지금 이사야가 바벨론 포로 귀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결국 그런 정치적인 해방일 수밖에 없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성서읽기와 해석이 자칫 근본을 놓치고 곁길로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이사야가 비록 정치적인 사건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사건 자체가 핵심은 아닙니다. 그것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곧 새 일의 원천이라는 사실이 이 텍스트의 중심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새 일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존재하시고, 그렇게 행동하시고, 그렇게 세상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건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향한 영적 민감성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게 준비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야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 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 앞에서 놀라움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의 태양도 전혀 새로운 구원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막에 길이 나고 물이 흐르고, 승냥이와 타조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환상을 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궁극적으로 예수의 부활에서 생명의 새로움을 인식하고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이사야가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듯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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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윤호중

February 20, 2006
*.224.115.87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건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향한 영적 민감성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게 준비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야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 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 앞에서 놀라움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의 태양도 전혀 새로운 구원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막에 길이 나고 물이 흐르고, 승냥이와 타조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환상을 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궁극적으로 예수의 부활에서 생명의 새로움을 인식하고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정목사님 말씀을 들을 때에는 항 상 하나님께서 새일을 하시며, 새길을 여시는 것을 경험 합니다.
목사님 의 설교를 들으면서 한국교회에 소망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미국 La s Vegas 에서
profile

[레벨:8]김인범

February 21, 2006
*.146.246.6

어떤 사건으로가 아니라 인격적 하나님, 그분 자체를 만나는 것으로, 그 분을 아는 것으로, 곧 그것이 새일 되는 것임을 깨우치시는 말씀에 아멘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매일 하나님의 새일 앞에 서고, 그러기에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능치 못한 일이 없음을 고백할 것이며, 더 나아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신앙 선배들의 신앙고백을 우리 것으로 되뇌이게 되는 군요.

비록 오늘 우리들 앞에 보이며 놓여진 환경과 상황이 우리 눈에 좋아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이, 새일의 주인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이기에 우리는 그 영광과 승리를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승리자 들임을 함께 확인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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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503
181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487
180 창조절 생명과 지옥 (막 9:42~50) [4] 2021-09-26 5477
17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477
178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5467
177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448
176 창조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5] 2021-10-10 5445
175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432
174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5428
1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424
172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403
171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5400
170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387
169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343
168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283
167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279
166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238
165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221
164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204
163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141
162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5140
161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140
16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5135
159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5134
158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5100
157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5073
156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5064
155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5059
154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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