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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왕조의 존재근거

기타 조회 수 19535 추천 수 115 2006.08.06 23:27:18
성경본문 : 사무엘하 7:1-17 
http://wms.kehc.org/d/dabia/06.08.06.MP32006. 8.6. 삼하 7:1-17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예루살렘 다윗 궁에서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40 여명의 왕들 중에서 다윗을 능가하는 왕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에서도 다윗의 권위는 온 세계를 뒤덮고도 남을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 목사들과 신자들도 모두 다윗을 신앙의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다윗은 어떤 사람인가요?
다윗이라는 인물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일개 시골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의 위대한 장군 골리앗을 눕힌 이 사건으로 다윗은 일약 사울의 부마가 된 뒤, 결국 이스라엘의 대권을 잡았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사건은 다윗이 자기의 부하 장군인 우리야의 부인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 부인의 이름이 밧세바인데, 그녀를 통해서 얻은 솔로몬이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다윗을 이어 왕이 됩니다. 일종의 왕자의 난이라 할 수 있는 왕권투쟁에서 솔로몬이 최후의 승자가 될 있었던 데에는 어머니인 밧세바와 나단 선지자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예루살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언자 나단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을 평정한 다윗왕은 나단에게 이렇게 조언을 구합니다.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렇게 송백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 둔 채 그대로 있소.”(삼하 7:2b) 나단은 “야훼께서 함께 계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나단은 그날 밤에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내용이 5-16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다윗이 나단에 조언을 구하던 그 시기가 언제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 말씀이 그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야훼께서 사면의 원수를 다 물리쳐 주셨으므로 다윗왕은 궁에서 마음 놓고 살게 되었다.” 다윗은 오랫동안 사울과 싸웠습니다. 사무엘상에 자세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도 모두 죽었고, 사울의 중요한 부하들도 다윗에게 포섭되었습니다. 이제 다윗에게는 정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셈입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원주민인 여부스 사람들을 몰아내고 그 성 이름을 다윗성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제 다윗은 명실상부하게 팔레스틴을 평정한, 제대로 된 왕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터를 잡은 다윗은 유다 바알라에 있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 와중에서 사람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나서 당분간 이 일이 유보되기는 했지만, 결국 법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날 얼마나 기뻤던지 다윗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 때문에 아내인 미갈에게 핀잔을 받기는 했지만 법궤를 모시려는 그의 마음만은 인정받을 만 했습니다.
법궤를 모시는 것으로 다윗이 풀어야 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왕권을 완전히 확립했으며,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 영토분쟁에서 승리했고, 이제 종교적인 차원으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역사에 다윗이 없었다면 근동의 수많은 제국들에 의해서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윗 왕조의 성립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그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를 극복해나갈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할 것입니다.
법궤를 가져오긴 했지만 다윗은 뭔가 마음이 꺼림칙했습니다. 2절 말씀에서 실토하듯이 법궤가 휘장 안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단에게 조언을 구하는 중입니다. 다윗의 이런 태도를 좋게 보면 야훼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본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 묶어두기 위한 정략적 발언인지 모릅니다.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예루살렘은 원래 여부스 족이 살던 곳이었으며, 정복한 후에도 역시 여러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하나로 묶을 구심점이 필요했겠지요.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다윗은 아주 복잡한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 같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노회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보도된 다윗의 행동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만이 아니라 다윗 이야기를 직접 기록한 구약성서 기자들의 마음도 아주 복잡했을 겁니다. 다윗의 말과 행동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고민이 오늘 본문에서도 발견됩니다.

목동 다윗
나단은 다윗의 말을 듣고 구체적인 대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야훼께서 함께 계시니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단의 이 말은 다윗을 높이는 것처럼 들리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너, 잘났으니까 마음대로 해봐!”라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생각이 마음에 들 때만이 아니라 들지 않을 때도 짧게 대답하는 법입니다. 나단의 말이 다윗에게 반드시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나단이 한 마디 툭 던져놓고 돌아간 날 밤에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곧 다윗의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야훼의 생각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나 야훼의 말이라고 하고 이렇게 일러라.” 나단이 들었다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야훼 하나님은 송백으로 지은 집을 원하지 않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나단에 준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동안, 내 백성 이스라엘을 맡겨 보살피게 한 어느 영웅에게 어찌하여 나의 집을 송백으로 지어주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다음에 미디안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는 회막이었습니다. 천과 나무로 만든 이동식 제사 장소였습니다. 그 회막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법궤가 모셔졌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하는 큰 궤짝입니다. 그 안에 십계명이 새겨진 돌,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윗의 정치력이 확고한 기반에 올라선 상태에서도 법궤가 여전히 휘장, 즉 회막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게 다윗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지만, 야훼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송백으로 지은 성전이 곧 하나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조 전통과 예언자 전통 사이에 불거지는 갈등을 봅니다. 왕들은 야훼 하나님을 어떤 공간 안에, 자기를 위해서 안전하게 가두고 싶어 했지만 예언자들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야훼는 왕처럼 송백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모든 세상을 그의 거처로 삼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위해서 송백의 성전을 짓겠다는 바울의 발상은 기특하기는 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2) 나단은 지금 큰소리치고 있는 다윗이 원래 목동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예언자 나단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지금 다윗은 레임덕에 걸린 왕이 아닙니다. 한창 끗발이 높은 왕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나단은 “당신, 원래 목동 출신 아니냐?” 하고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의 약점이나 열등감을 지적하면 기분 좋을 리 없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위해서 멋진 성전을 건축하고 싶다는 다윗 앞에서 그냥 건너뛰어도 될 만한 말을 나단은 굳이 내뱉습니다. 밧세바 사건(11장)에서 다윗을 크게 책망하는 나단(12장)의 성질은 원래 천성적이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지금 나단은 다윗에게 시비를 거는 게 아닙니다. 야훼 하나님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없습니다. 아무리 만인지상의, 무소불위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야훼 하나님 앞에서 일개 목동에 불과합니다. 좋게 보면 순진한 목동이지만, 나쁘게 보면 건달에 불과합니다. 나단은 다윗을 향해서 그걸 깨달으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송백 성전 운운하면서 자기가 왕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생각하지 말고, 주제를 파악하라는 말이겠지요.
목동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야훼 하나님 덕분입니다. 8절에서 나단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나는 양떼를 따라 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 내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다윗을 영도자로 삼기 위해서 야훼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들을 쳐 없애셨고, 그의 이름을 떨치게 했으며, 악한들에게 억압당하는 일이 없게 하셨습니다. “나 야훼가 한 왕조를 일으켜 너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11b) 이제 다윗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자신이 야훼 하나님을 위해서 송백 성전을 만들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그리고 그런 생각에 숨어 있는 얄팍한 계산이 모두 들통 난 셈입니다.
그러나 나단은 다윗에게 수모를 주려는 건 아닙니다. 그의 예언은 결국 다윗 왕조의 번영에 놓여 있습니다. 예언의 마지막 문장을 보십시오.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 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16절) 다윗 왕조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는 그의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믿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단의 예언대로 다윗 왕조는 이스라엘 안에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사후에 남북으로 분열되었지만, 그래도 다윗의 권위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 반면에 일반 역사에서 다윗 왕조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했고, 로마에 의해서 초토화 했습니다. 세속 역사에서 다윗 왕조가 왜 이렇게 심하게 흔들렸을까요?

하나님의 징계
우리는 정치 공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성서 신앙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다윗 왕조의 위기는 그의 후손들이 행한 죄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반석 위에 세우신다고 예언한 나단은 하나의 단서를 달았습니다. “만일 그가 죄를 지으면 나는 사람이 제 자식을 매와 채찍으로 징계하듯 치리라.”(14b)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등,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는 했지만 나라가 갈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 등극한 거의 모든 왕들이 무능력하고 부패했습니다. 하나님이 매와 채찍으로 징계하신 것입니다. 다윗 왕조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매와 징계는 지난 2천5백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매와 징계가 가혹하게 계속했다는 건 그들의 죄가 끊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죄를 지었나요? 우상숭배를 말하나요? 사회적 불의와 분열인가요? 어떤 이들이 말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인가요? 오늘 우리는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도 못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죄는 단지 파렴치한 행위만이 아니라 훨씬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본질적인 죄가 우리 삶에 나타날 때는 매우 구체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죄는 인간 삶을 파괴하고 증오심을 키우는 실체로 나타납니다. 야훼 하나님은 그런 죄를 매와 채찍으로 다스리십니다.
요즘 레바논을 공격한 이스라엘이 한 나라만 제외하고 온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레바논에 본부를 둔 헤즈블라 무장 단체가 포로로 잡아간 이스라엘 군인 두 명을 석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격에서 실제로 희생당하는 이들은 헤즈블라 군인들이 아니라 무고한 양민들입니다. 수천 년 동안 박해를 받아오던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공격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형편을 제가 모두 아는 게 아니지만, 이런 일들도 역시 하나님의 매와 채찍을 불러올 수 있는 죄가 아닐까요?
말씀을 정리합시다. 나단이 다윗에게 주는 예언의 내용은 아주 분명합니다. 다윗 왕조의 존재 근거는 다윗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사람은 성공하면 그게 자기의 능력인 줄 알지만 성서는 그걸 부인합니다.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그걸 이루시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하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왕조의 존재근거라는 나단의 예언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칩니다. 첫째, 다윗이 목동 출신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기반이 근본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둘째, 현재 우리 삶에 나타나는 죄가 존재근거까지 허물어버린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을 토대로 할 때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며, 지금 우리를 지배하는 죄를 극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얻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운명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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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로

August 07, 2006
*.126.215.212

요즘 이스라엘의 깡패짓거리를 보면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자신들이 나치독일과 일본-흔히 유대인박해하면 나치 독일을 생각하지만, 일본에서도 유대인들은 강제수용으로 박해받았습니다.-에서 당한 박해는 생각 못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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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466
1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457
172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5442
171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436
170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428
169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377
168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326
167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323
166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269
165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256
164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235
163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5188
162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180
161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5176
160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5173
159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163
158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5144
157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5131
156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5109
155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5089
154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5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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