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

종말의 현재, 11월27일

기타 조회 수 9944 추천 수 69 2005.11.27 23:17:46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9 

http://wms.kehc.org/d/dabia/11월27일.MP32005. 11.27.      
고전 1:1-9
종말의 현재

대림절에 대해
교회에는 사회에서 사용하는 태양력과는 좀 다른 ‘교회력’(church calendar)이 있습니다. 성탄절이나 부활절도 교회력에 포함됩니다. 로마 가톨릭은 우리보다 훨씬 다양한 교회력을 지킵니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 승천일도 있고, 여러 성인 축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도 앞으로 이런 쪽으로 준비가 되면 세계 교회와 구별되는 우리만의 절기를 지키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지 세계 교회가 지키는 교회력의 첫 절기는 대림절입니다. 이 대림절은 성탄절 4주 전부터 계산해서 4주간을 지키는 절기인데, 올해는 오늘 11월27일이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그의 임재와 그의 재림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특히 그의 재림의 중요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신앙은 초기 기독교부터 아주 분명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독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걸 그대로 믿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개중에는 실제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또는 이런 재림 신앙을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이외에 대다수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 대림절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 세계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위선적이거나 무책임해서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 자체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만으로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컨대 꼴찌가 첫째가 되며,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경쟁원리가 철저하게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심층으로 들어가야만 첫째와 꼴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마저 경쟁과 자기만족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변죽만 울리거나, 아니면 그것 자체를 아예 부정하게 됩니다.
‘대림절’ 신앙도 역시 그렇습니다. 신앙이 좋다고 자부하는 기독교인들도 이 가르침을 매우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지금은 어디에 계신 건가요? 사도신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데, 그 곳이 어딘가요? 신약성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생각하던 하늘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계몽주의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 중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뭔가 잘못된 것일까요? 이런 것에 대해서 성서가 자세하게 설명해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성서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곧 성서 기자들이 정직하다는 근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건을 마술처럼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합리적으로 꾸며서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사건을 경험한 그들은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그것을 단순하게 묘사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관과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진술은 분명히 영적인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영적인 현실이 무엇인지 살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바울은 고린토 교회에 보내는 장문의 편지 글머리에서 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선교여행에서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고린토는 그 당시에 매우 잘나가는 도시였습니다. 모든 게 풍요로운 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 공동체 교우들의 삶도 꽤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5절).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었다는 바울의 이 진술은 기본적으로는 신앙적인 것을 말하겠지만 그 이외에도 삶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재정적인 문제도 포함되지 않았을까요? 특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언변과 지식에서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고린토 교우들은 교양인, 지식인, 중산층이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바울은 문화적인 점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지만 또한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금욕주의자도 아니고 쾌락주의자도 아니었으며, 탈속주의자도 아니고 세속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토 교우들의 넉넉한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린토 후서 9장에서 바울이 고린토 교우들에게 구제금을 요청하고 있다는 걸 보면 바울이 재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서 살든지 하나님의 뜻에, 즉 영적인 시각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시각이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십시오. 7절 말씀입니다.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전혀 부족할 게 없는 현재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나타나심은 대립적인 사태입니다. 예수의 재림은 이 세상에서 쌓아놓은 인간들의 모든 업적이 근본적으로 해체되는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취해보려는 모든 좋은 삶의 조건들이 말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의 재림은 이런 방식과 전혀 다른, 그것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발생하는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이 두 사건 사이에는 긴장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구슬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슬을 딴 아이들도 있고, 잃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 순간에 그들의 전체 삶은 오직 구슬에 달려 있습니다. 저녁시간이 되자 어머니께서 그만 놀고 들어오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던 구슬놀이를 접어야만 합니다. 집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구슬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은 놀이터와 전혀 다른 삶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무런 부족한 게 없이 잘 살고 있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는 게 곧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의 재림이라는 게 막연하게 생각되기는 하지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개인의 죽음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접어야 할 때가 온다는 말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재림, 그가 다시 나타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확신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확신이 없다는 건 그렇게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확신은 대개 현재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과거에 실증적으로 발생했던 사건들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은 순전히 미래의 사건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사건, 그리고 과거에서 한 번도 똑같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깊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성적인 사람으로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으로서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을 이런 딜레마에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만 성서와 신학이 제시하고 있는 길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길을 제시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분명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동성애자들에게도 그렇지 않은 우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마음이 닫히면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
앞에서 구슬치기 하는 아이들을 예로 들었는데, 그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그 놀이터에 생각이 좀 깊은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이는 그렇게 놀면서도 그 놀이가 모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예측할 것입니다. 물론 그 아이는 그런 놀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어제도, 그제도 반복해서 경험했으니까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아무리 그런 일들이 과거에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예수의 재림으로 일어나게 될 그 세계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삶을 직관함으로써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삶은 무상합니다. 그 어느 것도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런 무상한 방식이 아니라 영원한 방식의 삶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약간 다른 각도로 본다면, 그냥 현재에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를 포한한 이 세상은 어디를 향해서 지금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요? 만약 하나님이 창조자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완성되는 그 시간을 마련해두지 않았을까요?
이런 내 말은 별로 결정적인 설득력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논리는 같은 정도의 반론을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가 재림할 때에 대해서, 그리고 심판의 날에 대해서 언급한 후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여기서 재림과 심판은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그 사건은 곧 무상한 이 세상의 생명이 참된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생명의 완성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일치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결정적으로 미래의 사건인 종말, 재림, 심판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종말의 현재’라고 이름 붙이겠습니다. 생명의 완성인 종말은 단지 우리에게 멀리 떨어진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참된 생명과 하나가 되었다면 우리는 결국 최후에 완성될 생명의 세계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이게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나요?
사람들은 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대기적으로만 구분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사물을 명백하게 구분하기만 합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순전히 자기 기준에 따라서 이 세상을 구분하며 살아가는데 익숙합니다. 이런 방식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종말이 이미 현재에 침입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희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연대기적 시간을 극복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 이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창조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 창조의 힘은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태초와 종말이 모두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현재 안에는 이미 종말이 들어와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방식으로 종말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이런 창조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행위라고 믿습니다.
이 창조와 종말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 중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와 의 일치가 곧 우리가 종말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 단계에서는 증명이 아니라 신뢰가 필요합니다. 예수의 가르침, 그의 행위,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그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그에게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말을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종말의 현재가 대림절 첫 주간을 맞는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profil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4247
154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545
153 기타 우상과 귀걸이 [1] 2004-07-02 16546
152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549
151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578
150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581
149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 [10] 2011-08-15 16639
148 주현절 세례 받은 하나님의 아들 (마 3:13-17) [4] 2014-01-13 16643
147 성령강림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7] 2013-06-09 16741
146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742
145 성령강림절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 [20] 2010-09-12 16757
144 부활절 생명과 죽음 (눅 24:1-12) [8] [1] 2013-03-31 16785
143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16808
142 성령강림절 제자의 삶과 하나님 나라 (눅 9:57-62) [6] 2013-06-30 16811
141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839
140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file [6] 2010-10-10 16858
139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7] 2009-06-08 16903
138 주현절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 17:1-9) [17] 2011-03-07 16904
137 부활절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 [27] [2] 2010-04-25 16932
136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7] 2011-01-23 16934
135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와 구속 2009-12-25 16974
134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7040
133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7098
132 성령강림절 신앙경험은 새롭게 '봄'이다 [18] 2009-11-09 17125
131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7172
130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7228
129 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10] 2013-04-28 17248
128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7251
127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7287
126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2011-10-09 17304
125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7308
124 성령강림절 안식일과 해방 [10] 2010-08-22 17311
123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7312
122 주현절 하나님이 생명이다 [10] 2011-02-15 17318
121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16] [2] 2010-07-11 17322
120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2011-10-30 17400
119 성령강림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9] [1] 2007-09-30 17433
11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과 등 [11] 2009-09-28 17460
117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2013-02-03 17490
116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7504
115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693
114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7693
113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818
112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912
111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969
110 기타 용서의 능력 [1] 2004-07-02 17995
109 부활절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2] 2014-05-11 18066
108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2012-12-24 18107
107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8108
106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8142
105 기타 세겜의 약속을 기억하라 [9] [1] 2010-01-01 18257
104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19] 2013-07-14 18420
103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2013-03-10 18466
102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8475
101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8490
100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8495
99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8568
98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8573
97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8590
96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꿈 이야기 [27] 2009-08-31 18612
95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625
94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8691
93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8702
9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8740
91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8769
90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901
8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909
88 대림절 인자가 오리라 file [8] 2010-11-28 18938
87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974
86 사순절 유혹 받으신 예수 (마 4:1-11) [10] 2014-03-09 19018
85 성령강림절 한 말씀만 하소서 [17] 2010-06-07 19155
84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9166
83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2011-01-09 19166
82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9194
81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2011-02-22 19220
80 주현절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17] 2010-01-18 19242
79 주현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31) [16] 2014-02-02 19309
78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9341
77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2011-05-22 19379
76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2011-03-21 19447
75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2010-09-26 19462
74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2010-10-04 19467
73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9476
72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9525
71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9536
70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9539
69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9660
68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9668
67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678
66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9688
65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783
64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838
63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842
62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file [8] 2010-12-20 19842
61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2010-08-09 19857
60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861
59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876
58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981
5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995
56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2011-04-24 20051
55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20237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