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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대림절 조회 수 17481 추천 수 0 2012.12.24 09:51:36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223.mp3 
성경본문 : 미가 5:2-6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대림절 제4주, 2012년 12월23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폐하게 하며 니므롯 땅 어귀를 황폐하게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미 5:2-6)

 

 

 

선지자 미가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민중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와 하나냐 선지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참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를 거부했고, 거짓 선지자인 하나냐를 옹호했습니다. 누가 참된 선지자인지, 누가 사이비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그런 일은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미가 선지자도 당시에 침묵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미 2:6) 그 이유는 미가가 자신들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주로 사회 정의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미 2:1-5절에 그 내용이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2절) 2:8-10절에서는 빚진 자들의 노예화를 비판합니다. 사회 지도자들에게 대한 비판은 더 날카롭습니다. 지도자들은 ‘정의를 아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합니다.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먹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당시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가에 의하면 선지자들은 돈을 위하여 점을 쳤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거론하면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까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미 3:11) 미가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불문가지입니다.

 

미가가 욕먹을 각오로 유대 민중들과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에게 쓴 소리를 하면서 사회 정의를 역설한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만이 아니라 조국 유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8세기 초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위기는 북이스라엘 쪽에 먼저 왔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당시 제국이었던 아시리아와 맞서 싸웠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2년 동안이나 아시리아에 의해서 포위되었다가, 결국 기원전 721년에 함락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유대는 친(親)아시리아 정책을 통해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유대 왕 히스기야는 기원전 720년 시리아-팔레스틴 동맹군이 아시리아와 싸울 때도 아시리아의 눈치를 보느라 동맹군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멸망만은 피해보자고 판단한 것입니다. 상황이 조금 변하면서 히스기야는 이집트와의 동맹을 통해서 아시리아에 대항하기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기원전 713년에 반(反)아시리아 투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전쟁에 지고 많은 땅을 빼앗겼습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조공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기원전 705년 아시리아의 정권 교체기에 히스기야는 앞장서서 다른 나라와 연합해서 다시 아시리아와 맞붙었습니다. 4년쯤의 전투 끝에 히스기야는 패배했습니다. 당시의 이야기를 담은 비문에 따르면 아시리아 왕 산헤립은 유대의 46개 도읍을 다른 왕들에게 하사했다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더 많은 조공을 산헤립 왕에게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유대 사람들의 삶은 밑바닥으로 점점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주화파와 주전파가 크게 대립했습니다. 왕은 그 중간에서 우왕좌왕했습니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미래가 불확실하게 되면서 공동체의 모든 가치와 질서들이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도 흔들렸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도 아시리아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회 정의는 무시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모두 각자 능력대로 살아갈 궁리만 했습니다. 세상이 왜 이 따위야, 하는 냉소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요즘 말로 ‘멘붕’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가 선지자는 타는 목마름으로 사회 정의를 외쳤습니다. 침묵하라는 핀잔을 무시하고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미가는 자신의 소명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 3:8)

 

베들레헴 에브라다

그런데 정의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미가의 말을 당시에 받아들인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정의는 일단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하고, 연대를 생각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정의를 생각하지 생존이 급급할 때는 원초적 욕망에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 야생에서 사는 포식자들을 보십시오. 배부르면 싸우지 않지만 배가 고프면 먹이를 놓고 형제들끼리도 죽기 살기로 싸웁니다. 사람은 도덕심이나 종교심으로 어느 정도 자기 절제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야생의 생존 본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금 유대 사람들은 생존 자체가 시급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반복해서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았고, 전투에서 번번이 졌습니다. 아시리아에 보낼 조공을 세금으로 거두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를 실천하라니, 과연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미가도 그런 사정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라를 살리려면 그런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정의를 세우는 것이 나라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난파선에서는 질서를 지켜야 그래도 생존자가 많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정의가 말처럼 쉬울까요?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요? 미가는 자기의 말씀 선포로 유대가 정의로워진다고 확신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가는 개인이나 사회가 마음을 바꿔서 쉽게 정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세상이 나가야 할 이상을 말하기는 하되 거기에 목숨을 걸지 않았습니다. 미가는 더 근본적인 것을 말합니다. 정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정의는 구원자 메시아의 일입니다. 그 사실을 알 때 사람은 정의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미 5:2절을 보십시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바로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미가는 4절에서 메시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메시아에 대한 이 묘사는 당시 근동의 패권을 행사하던 아시리아에 관한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참된 능력은 아시리아 제국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미가의 메시아사상이자, 메시아적 희망입니다.

 

미가의 메시아사상에서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메시아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미가는 메시아가 나실 장소를 베들레헴이라고 짚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처럼 큰 성읍이 아닙니다. 농촌이고 변방입니다. 그런 곳에서 메시아가 오실 거라고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에브라다는 부족 이름입니다. 에브라다 부족은 숫자가 겨우 1천명에 불과한 작은 부족입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하지 못한 농촌과 작은 부족에게서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은 메시아 사건은 사람의 계획과 예상을 넘어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메시아는 고통을 감당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미가는 ‘여인의 해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구체적인 역사입니다. 지금 유대는 아시리아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미가는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들의 비참한 역사적 현실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6b절을 보십시오. “앗수르(아시리아)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

 

저는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들의 예언이 성취되었을까요? 미가의 메시아사상은, 그의 메시아 희망은 그들의 역사에서 실현되었을까요? 유대의 장군 중에서도 아시리아를 격퇴시킬 수 있다는 신념에 찬 사람이 있었겠지요. 그가 바로 미가가 예언한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사람들이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미가의 메시아적 희망과 달리 유대는 아시리아의 적수가 못됐습니다. 땅도 더 잃고 조공도 더 바쳐야 했고, 지난날 어느 한 때 중국에 젊은 여자들을 보내야만 했던 우리처럼 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성취되지 못했다고 해서 미가의 예언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미가가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전해 들었던 이야기, 자신의 역사 경험, 자신의 영성에 근거해서 말씀을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역할은 충분했습니다. 그런 이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메시아 사건은 결정적인 때를 맞게 됩니다. 모든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점, 한 순간의 역할만 할 뿐이지만 그 점들과 순간들이 모여 거대한 구원 역사를 구현해갑니다.

 

마태복음 기자

미가의 메시아사상은 마태복음 기자에 의해서 역사적 정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탄생 전승의 하나인 동방박사 이야기를 보도하면서(마 2:1-12) 미가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을 찾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헤롯왕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미 5:2절을 인용해서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 2:6)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 예수님이 바로 미가가 예언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구세주,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그가 우리를 ... 건져내리라.’는 미가의 진술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옳은 말입니다. 메시아는 건져내는 이, 즉 구원할 이입니다.

 

구원할 이라는 말은 우리가 어디에 빠져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메시아가 필요 없습니다. 미가가 볼 때 유대인들은 내우외환에 시달렸습니다. 안으로는 공동체의 모든 가치들이 파괴되었고, 밖으로는 아시리아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그 어디에도 구원의 불빛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거기서부터 메시아 희망은 시작됩니다. 절망이 없으면 희망도 없습니다. 어둠이 없으면 밝음도 없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절망에만 머물지만 선지자는 거기서 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희망을 봅니다. 선지자들은 어둠이 깊을수록 더 밝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모든 복음서 기자들은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아적 희망으로부터 영향을 받긴 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근본적인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위기와 절망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결된다고 해도 더 밑에 있는 절망과 어둠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복음서 기자들과 신약성서 기자들이 본 궁극적인 절망과 어둠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래서 그들이 참된 메시아가 예수라고 인식하고 믿게 된 것일까요?

 

죄와 죽음입니다. 죄와 죽음이 인간에게 가장 절대적인 절망이자 어둠입니다. 미가가 본 불의와 공동체 붕괴도 사실 따지고 보면 죄와 죽음이라는 더 깊은 절망과 어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죄와 죽음은 정의가 살아나고 국제 관계가 정상화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그것을 그림자처럼 안고 삽니다. 여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이가 참된 메시아입니다. 누가, 혹은 무엇이 메시아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대선 중에 젊은이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던 안철수 씨인가요? 이번에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 씨인가요? 그들이 우리를 어디로부터, 그리고 얼마나 구원해낼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에게 일어난 메시아적 징표들을 보십시오. 인류 역사에서 오직 그에게만 종말의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이 선취(先取)의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그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는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습니다. 부활 생명이신 그분이 이미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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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January 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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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의 예언은 스가랴 11:13의 예언과 함께 상당히 독특한 것 같습니다.


예전이라면 그냥 하나님 말씀이니 당연히 예언이 이루어졌다라고 넘겼을 일이지만

미가가 왜 베들레헴에 주목을 했는지 스가랴가 왜 토기장이에게 은 삼십을 던졌는지

복음서 기자들은 왜 이 예언을 인용했는지 

심지어는 정말 예수님이 베들레헴 출신인지 은 삼십에 팔렸는지 등등 

확인하기 어려운 궁금증만 넘쳐납니다.


그리고 무엇이 박해속에서 미가를 외치게 만들었을까요?

아마 미가는 다른 유대인들이 보던 절망과는 다른 절망을 보았을 것입니다.

아는만큼 보인 것인지 아니면 보고 싶은 것을 본 것인지 몰라도

미가의 예언이 하나님의 역사속에서 이루어져 간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정작 베들레헴은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구약정경화시 랍비들은 미가서를 정경에 포함시켰고 ...


메시아가 필요하다는 현실 인식과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하는 본질 인식.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초능력을 꿈꾸는 어린이가 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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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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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 님이 뭔가를 힐끗 본 거 같네요.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역사의 신비를!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러나 너무 강력해서 외면할 수 없는,

마치 지구 곳곳에 가득한 바람 현상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류와 세계를 압박해오는 어떤 힘을 말이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성경 곳곳에 숨어 있어요.

오늘도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런 시각을 배워야하고,

오늘 우리에게 독특하게 경험되는 그런 힘을

오늘의 언어로 해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사람의 심경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포크 님은 신학적인 사유 안으로 들어갔어요.

전업 설교자들도 그런 사유 능력이 별로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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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y 16, 2013
*.44.68.186

정말 큰문제는 죄와 죽음이라는 것을 작은 문제로 잊을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진리가 역사속에서 사실적을 일어났음을 지금도 얘기해 주어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또한 죄를  자꾸 진하게하는 사실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알고 이해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죽음과 죄로부터 구원해주실 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함께 배우고 싶습니다. 많은걸 의지하고 싶습니다.
목사님과 여러 형제자매님들의 글 속에서 제가 모자란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정말 거져 받아도 되는 건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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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7, 2013
*.94.91.80

겸손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걸 진인택 님에게서 늘 보게 되는군요.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으신 분 같습니다.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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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4961
900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971
899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4978
898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5034
897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5041
896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5060
895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5072
894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5094
893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096
892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5097
891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102
890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147
889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183
888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187
887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243
886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253
885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298
884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346
883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5369
882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77
881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379
880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383
87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5395
878 창조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5] 2021-10-10 5407
877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415
876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429
875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5431
874 창조절 생명과 지옥 (막 9:42~50) [4] 2021-09-26 5433
873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446
872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465
871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471
870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511
869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544
868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557
867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5562
866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5591
865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626
864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5664
863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666
862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79
861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5688
860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5691
859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5695
858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702
85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747
856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772
85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778
854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5798
853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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