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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권위 (막 1:21~28), 2003.6.1

기타 조회 수 13673 추천 수 36 2004.07.02 15:12:36
성경본문 : 마가복음 1:21-28 

예수의 권위

1:21-28, 2023년 6월1일

 

권위의 충돌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의 초기 활동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마가복음의 앞부분에 놓였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회당 출입이 여전히 자유로웠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처음 등장한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많은 랍비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별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적대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겠지요.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목사들이나 선생들을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런 평범한 한 인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차츰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오해를 받게 되고, 급기야 죽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런 틈새가 벌어지게 된 몇 가지 사연이 있긴 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이나 성전을 상대화했으며, 또한 자칭 그리스도라고 했다 는 누명을 쓸 정도로 유대고 지도자들의 시각에서 아주 위태로운 경계선을 넘나들었습니다. 그렇듯 그들과의 노골적인 충돌에 이르게 된 그 단초가 이미 오늘 본문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22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곧 이어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정신을 차리게 되는 사건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28).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들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어떤 것을 경험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것을 "권위"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갖고 있던 권위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직면하게 하는 능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권위가 없는 유대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거나 또는 자기에게 손해를 끼칠 것 같은 낌새가 있으면 거부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얄팍합니다. 어쨌든지, 여기 본문에서 언급되는 예수님의 권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율법학자들의 왜곡된 권위

마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고 느낀 것은 율법학자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즉 그들이 어떤 권위에 근거해서 가르쳤는지 살펴보면 예수님의 권위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나옵니다. 율법학자들은 말 그대로 그 당시 최고의 학문적 권위를 갖고 있던 집단이었습니다. 요즘 우리의 기준에 따라면 본다면 최고의 명문대학교를 나오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리고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했습니다. 율법학자라고 해서 반드시 종교적인 문제에서만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는 종교와 국가가 일치된 체제였기 때문에 종교와 사회의 구분 없이 최고의 학문적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율법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율법학자들은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 공부에 전념했으며, 그 이후로 평생동안 율법을 연구하고 성서를 필사하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이들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가 제국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민족적 정신을 잃지 않고 유지되었습니다. 아마 이 세계의 여러 민족 중에서 구약성서를 비롯해서 외경과 위경 등, 수많은 거룩한 문서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 말고는 그 어떤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불교 경전이나 이슬람 경전, 고대 힌두교 경전도 적지 않습니다만, 한 민족 안에서 형성된 것만을 따진다면 유대인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 모든 경전이 바로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권위를 아무렇게나 폄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가르침에서 별로 권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존경받고 권위를 인정받을만한 전통이 그들에게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속으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어려운 데 있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전문적인 능력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그 본래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율법 공부를 하는 것인데, 이제 자기의 전문적인 공부를 발판으로 삼아서 민중을 선동하거나 어리석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개인들이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사회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체제를 따라가게 되는 것처럼 율법학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왜곡된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데 불구하고 어느 사이에 율법 자체를 목적으로,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칩니다만 실제로는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들의 전통을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권위는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에 불과합니다. 당분간은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여도 결국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에, 그들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권위상실의 시대

오늘 우리의 삶도 역시 권위 상실이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같은 전문가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그래서 권위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물론 그들이 전문가라는 점에서는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만 자신들의 전문성을 단지 자기를 성취하는 일을 위해서만 이용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들에게는 참된 권위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문가일 뿐이지 권위 담지자는 아닙니다. 대학교 교수들이나 변호사, 판사, 의사, 그 이외에 수많은 전문가들이 자기들의 전문성을 독점하고 강화시킴으로써 자기를 성취해나가는 일에만 마음을 두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잘못되 판단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전문가들을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서 권위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참으로 권위가 있을까요? 이런 문제를 생각 하기만 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정치적 권위와 아울러 인간의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종교적 권위가 명실상부하게 유지되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과 오히려 종교가 더욱더 자기를 목적으로 하는 권위주의에 빠져들었다는 현실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가르침은 형식적으로 성서에 그 토대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모든 사안에서 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15절 이하의 말씀에는 그 유명한 "성전청결" 사건이 보도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이외에 나머지 세 복음서에도 똑같이 보도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사건의 사실성은 명백한 것 같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가 이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판단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거나 환전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내어쫓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11:28). 성전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과 행위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아무도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는데, 이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예수님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기분이 나빴겠지요.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런 권위주의로부터 하루 빨리 해방되어야 합니다. 신자들과 이 사회를 향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전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들의 전통을 강화하는 일에 치중하는 이런 행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은 이런 형식적인 권위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타율적 신앙에 빠지든지, 아니면 이런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교회를 거부할 것입니다.

 

악령이 굴복하는 권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권위가 율법학자들의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능력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약간 특이한 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어떤 악령 들린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 " 예수님이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 현상을 보고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악령을 내어쫓는 사건이 복음서에 몇 번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일반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보도를 읽으면서 흡사 무당이 원한에 사무친 죽은 혼령을 불러내거나 위로하는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런 현상을 우주와 자연에 대한 그당시 사람들의 인식론적 한계를 전제하고 읽어야만 합니다. 그 당시에는 악령의 작용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모든 질병은 이런 악령의 작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의 치료도 당연히 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몫으로 돌려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과 같이 고대의 우주관에 근거해서 보도되고 있는 이야기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 근본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27)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이게 곧 권위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악령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능력입니다.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예수님은 이 일을 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런 점에서 거의 무능력했지만 예수님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악령은 무엇인가?

오늘도 역시 우리의 삶에는 이런 악령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악령의 본질이 인간으로 하여금 악한 힘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사실을 아주 분명합니다. 예컨대 한민족이 지난 50년 이상을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 거대한 힘은 바로 악령이 아닐까요? 재물이 인간 자체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로 작동하는 이 사회는 바로 악령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요? 이런 악령에 사로잡힌 개인과 사회를 치료할 집단이나 사람이 없다는 이 현실이 더욱 불안합니다. 나름대로 전문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있는 집단이 우리 사회에 있기는 합니다만 악령의 준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교 교수들에게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역시 없습니다. 전문적인 정치인들은 접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히려 지역감정이라는 악령을 이용해서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이런 사회적 현상으로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역시 같은 세력으로 작용합니다. 우리가 허무주의에 빠져서 좌절하거나 또는 욕망에 떨어져 버리는 일들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인생의 연륜이 쌓이면 쌓이는 것만큼 <존재의 용기>가 확대되어야 할텐데 별로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아니 훨씬 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악령이 우리 개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개인의 훼손된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들이 큰 효과가 없습니다. 여행을 다닌다거나 취미생활을 한다거나, 또는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린다거나, 대충 이런 일에 최선을 다 기울여도 삶의 역동성은 생산되지 않습니다. 종교가 이런 일에서 최선입니다만 이 종교생활도 대충 취미생활 정도에 머물기 때문에 결국은 그 자리에서 머물고 맙니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세력을 제어하려면 그 근본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악령도 굴복하는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신뢰하는 데서 이 일이 해결됩니다.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로!

그렇습니다. 교회는 악령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한다는 이 사실을 믿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실을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들어간 지역에서 이런 축귀현상이 명백한 현실로 인정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십자군 전쟁이나 삼십 년 전쟁처럼 더 참혹한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믿는 사람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역사의 현실에서 악령을 제거하지 못하고, 따라서 예수님의 권위를 보증하지 못한 일이 많지만 예수님에게서는 이런 일이 분명하게 일어났으며, 앞으로도 일어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지금 진리의 영으로 이런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사명은 참으로 막중합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참된 권위로 인정받기 위해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자기의 전통에 안주하거나 자기를 성취해나가는 일에 마음을 쏟지 말고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해야합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런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바람처럼 임의로 부는 성령이 결국은 악령을 내어쫓고 사람들은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 교회는 겸손한 자세로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교회의 전통이나 외적인 힘에 권위가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을 근본적으로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그 능력에 참된 권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200361, 대구샘터교회 창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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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9155
675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163
674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9167
673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9183
672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9190
671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9191
670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196
669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9200
668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268
667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284
666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293
665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293
664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312
663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384
662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400
661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406
660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414
659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439
658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446
657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446
656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453
655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456
654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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