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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성령강림절 조회 수 16427 추천 수 0 2013.06.09 23: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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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열왕기상 17:8-24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성령강림절후 제3주, 6월9일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제가 교회 학생회 활동을 할 때는 성경 퀴즈 대회를 종종 개최했습니다. 구약을 본문으로 할 때 꼭 나오는 질문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두 사람의 이름을 대는 거였습니다. 한 사람은 에녹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거는 아닙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구약성경에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건 전설적인 요소가 가미된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유명한 일화를 유달리 많이 남겼습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먼저 올 선지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엘리야는 변화 산 이야기에도 모세와 함께 등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두 사람 모두 초자연적인 기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또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올곧게 세우기 위해서 유별날 정도로 강력하게 투쟁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비슷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와 싸웠다면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싸웠습니다. 그 엘리야 이야기가 왕상 17장부터 왕하 2장까지 흥미진진하게 진행됩니다.

 

세 편의 엘리야 전승

오늘 설교 본문이 실린 왕상 17장에는 세편의 일화가 나옵니다. 첫째는 왕상 17:1-7절입니다. 아합 왕과의 대결이 시작되는 첫 장면입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 엘리야는 하합 왕에게 앞으로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위협합니다. 그리고 도망갑니다. 왕에게 위협을 가했으니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상금이 붙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딱하게도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시냇물을 마시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먹을거리를 먹으면서 생명을 부지했습니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 왔고 ...”(왕상 17:6)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왕상 17:8-16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서 엘리야는 시돈 지역의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가자 한 과부가 마른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부탁했습니다. 물 좀 주시오. 이어서 다시 부탁합니다. 빵 조각을 주시오. 이 여자에게는 엘리야에게 나눠줄 빵이 없었습니다. 한 두 사람이 한 끼 먹을 가루만 남았습니다. 이 여자는 마지막으로 빵을 구워 아들과 먹고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오라고 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가뭄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습니다. 여자는 엘리야의 말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자 이후로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항아리의 기름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냐, 혹은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할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별스럽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일어날만한 일들입니다. 당시 아들을 둔 과부의 운명은 기구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아들 없이 남편이 죽었을 때 남편의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이 대신 남편이 되어주는 형사취수혼 제도는 여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은 남편의 재산을 가문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과부들의 삶은 가문이 책임을 졌습니다.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형사취수혼 제도가 성립되지 않아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보호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여자들은 주변의 구호에 의지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절박한 형편에서도 이 여자가 엘리야를 섬긴 겁니다. 이 소문을 듣고 주변 사람들이 이 과부 모자의 끼니를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었겠지요. 거기에는 엘리야의 명성도 한몫 했습니다.


셋째는 왕상 17:17-24절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벌어진 계속된 이야기입니다. 과부의 아들이 큰 병에 걸렸습니다. 결국 숨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이런 일은 흔했습니다. 과부가 엘리야를 원망하듯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 17:18) 당시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엘리야로 인해서 이 여자는 자신의 죄가 밖으로 드러나는 걸 느꼈고, 이로 인해서 결국 아들이 졸지에 죽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고 떠나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거룩한 힘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실존이 죄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방으로 안고 올라갔습니다. 그 방은 소위 게스트 룸으로, 엘리야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거처했던 곳입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호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삶에 지쳐 있던 과부에게 그나마 삶의 근거였던 아들마저 죽었으니 그 집에 객으로 신세를 지고 있던 엘리야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이의 몸에 자기 몸을 세 번 밀착시킨 후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왕상 17:21) 이런 치유 방식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가나안 등의 고대 지역에서 흔했습니다.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의 생각이 복잡할 겁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생각부터 영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기도하면 죽은 사람도 당연히 살려낼 수 있다는 생각까지 각자 서로 다를 겁니다. 이런 일들도 그렇게 특이한 게 아닙니다. 우선 본문의 히브리어 원어를 정확하게 살펴보면 성서기자는 이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만 분명합니다. 거기에 사용된 ‘모트’라는 단어는 실제로 죽은 상태가 아니라 생기가 일시적으로 정지하거나, 또는 모든 생명 능력이 상실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이가 갑자기 독성이 강한 벌레에 물리거나, 또는 뭘 잘못 먹고 호흡 곤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좀 병약한 아이였기 때문에 쇼크를 받아 일시적으로 체온이 저하되어서 숨이 멈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아주 위독한 상황에서 엘리야의 조치로 인해서 아이가 다시 제대로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이런 비슷한 일은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신생아나 노인이 죽어서 이불을 덮어 놓고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기적적인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을 그렇게 자연적인 현상으로 깎아내리면 도대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이유가 무엇이냐,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냐, 하고 좀 궁금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믿고 싶은 분들은 믿어도 됩니다. 그렇게 믿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기 어려운 분들은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믿지 않아도 크게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저는 후자에 속한 분들의 입장에서 설교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입장이 성경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데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기적 자체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 실체적 진실에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려는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을 찾으려면 이 세 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기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보시면 됩니다. 그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세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첫째, 아합 왕에게 대들다가 광야로 피신해 있던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서 먹여 살리십니다. 둘째,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던 중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마지막으로 남은 한 끼니 분량의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세상을 끝내려고 했던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루와 기름이 계속 공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부의 생존을 지키신 겁니다. 셋째, 과부의 아들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엘리야의 기도 후에 살아났습니다. 이 세 이야기가 모두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본문의 실체적 진실에 도달한 겁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까요? 다 아는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가 말처럼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내용과 형식이 성서가 말하는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살리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여러분의 중심 생각을 살펴보십시오. 권력, 경제력, 사회적 지위, 취미활동 등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많이 채워나갈수록 삶의 능력이 늘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부족하면 삶의 능력을 잃는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생결단으로 그런 것들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이게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을 얻으려고 믿음생활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와 달리 인생과 신앙을 좀더 진지하게 성찰하는 사람들은 욕심 내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기대서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라는 사실은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기독교인들도 엘리야의 이런 이야기를 단지 흥미 위주, 아니면 자신도 엘리야와 같은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에 치우칩니다.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이 단순히 종교적인 수사에 떨어집니다. 이 문제를 좀더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이 사건의 역사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알과 하나님

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엘리야의 등장이 아합 왕과 연관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북왕국의 태조인 여로보암 이후 오므리라는 중요한 왕이 북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몇 대에 걸쳐서 왕을 배출했습니다. 괜찮은 왕조를 이루었습니다. 오므리 왕조의 둘째 왕이 그 유명한 아합입니다. 아합은 성경에서 여로보암 못지않게 잘못된 왕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렇게 나쁜 왕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신앙적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에 의해서 아주 부정적인 왕으로 평가됩니다. 잘못된 결혼으로 신세를 망친 왕입니다. 그의 아내는 두로의 여왕 이세벨이었습니다. 그녀에 의해서 북왕조에는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다투었습니다. 양쪽의 싸움이 극에 달한 사건이 갈멜 산에서 벌어진 번제와 살해사건입니다(왕상 18장).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백 명과 엘리야 한 사람이 ‘맞짱’을 뜨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그 승리 후에 엘리야는 이세벨에 의해서 더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아예 죽을 작정까지 합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상인 바알의 능력과 대립해 있습니다. 이 말에 실감이 가시는지요? 사람들이 그냥 우상숭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상은 아주 매력인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인생을 살맛나게 해줄 것 같습니다. 심리적으로 만족감을 줍니다. 그런 대상이 남편이나 아내, 또는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학문이나 지식이나 예술, 또는 국가일 수도 있습니다. 더 노골적으로는 재물입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거기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런 대상이 무가치하다거나 그런 대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피조물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대상들이 축소되면 될수록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될 겁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세련된 기독교인 이 되기 위해서 제자 훈련을 받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도, 그리고 신앙 자체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교회를 뛰어넘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살리시는 능력을 눈여겨보라고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여전히 애매모호한가요? 그렇다면 더 이상은 제가 말할 게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오감에 직접 닿도록 제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살리는 능력은 다른 사람의 설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직접 스스로 경험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역사하신 그분이 여러분을 예상하지 못한 차원과 방식으로 살리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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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9, 2013
*.94.91.80

이번주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 설교이고,
설교보기는 대구샘터교회의 설교입니다.
모두들 주님 앞에서 새로운 한 주간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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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라크리매

June 10, 2013
*.7.57.65

하나님이라는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내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닮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이 만든 우상안에 하나님을 갇둬버리는 아이러니..인간의 운명이
일생 동안 이러한 처지와 싸워야 하는 운명이란 걸 받아들이기가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합니다 내 삶의 시작이 내 의지가 아니였음으로..요
인생의 중반을 지나서야 예수님의 동행을 바라게 되네요 목사님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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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0, 2013
*.94.91.80

라크리매 님,
'내 안에 있는 것'과 우상숭배의 아이러니로 인해서 
쬐금 억울하지요? ㅎㅎ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집중시키면서
이 아이러니의 현존을 헤쳐가봅시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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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삶의 과제

June 10, 2013
*.99.31.30

어젯밤에 설교말씀을 다시 들었습니다.
사실 주일 설교시간 중간에 졸다가 '교회와 신앙'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거든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는 자기만족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습니다 (--;).

다시 들은 설교 말씀에서
성경 본문을 읽음에도 자기 중심적인 해석의 경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성령과 예수님의 도움이 없다면 정말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 이상의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살려주시겠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차원과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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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0, 2013
*.94.91.80

과제 님,
설교 시간 중간에 졸다가...
꿀과 같은 순간이었겠네요.
성경읽기와 해석이
호기심 천국 수준에 머물면 곤란하겠지요.
불쌍히 여겨달라는 영적 태도와
세상을 향해 열린 태도를 유지한다면
비록 고급의 신학훈련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는 성경의 본질에 접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가봅시다.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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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14, 2014
*.220.104.49

목사님 전 설계를 매일 하는 사람입니다. 중심선을 선택해서 그 선으로 부터 거리를 두고 구멍을 뚫고 파내고 붙이기도 합니다. 그 중심선이 중심점위에서 위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가지 후속 상황들을 설계를 하다가 나중에 한참 지나서 그 중심선이 틀린가 하고 체크를 해봅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설계를 한 부분품을 가지고 와서 조립을 하게 되는데 그 때 안맞는 것입니다.

어디가 틀린지를 조사해보면 결국 어딘가 중심선이 잘못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과는 조금 떨어진 내용일지 몰라도 중심을 엉뚱한 곳에 잡으면 언젠가 큰 문제가 생기는걸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심을 썩어 없어질 스팩위에 잡는 다는것 다 바람에 날리는 개털과 같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내가 삶에서 나를 살리는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라는 것을 압니다.

밥을 입에 내손으로 넣어도 그 뒤에 탄수화물과 단백질 기타 영양소로 분해되는 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돌덩이하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가지고 분석하고 극지방 연구원....

살리시는 하나님이란 말이 전보다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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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4, 2014
*.94.91.64

좋은 예를 말씀하셨네요.

하나님을 중심선으로 삼는 게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지요.

이게 상투적인 게 아니라

우리 영혼이 담긴 말과 생각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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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759
619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760
618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76
617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776
616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783
615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790
614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798
613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805
612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820
611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822
610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822
609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845
608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850
607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8] 2014-06-15 9898
606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921
605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932
604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955
603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964
60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968
601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970
600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975
599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977
598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10002
597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10011
596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10023
595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10027
594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10029
593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10030
592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10034
591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10058
590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10077
589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10078
588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10091
587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10092
586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10104
58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10108
584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10111
583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117
582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10131
581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10141
58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142
579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10145
578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151
577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10160
576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10180
575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86
574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188
573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221
572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222
571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227
570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257
56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259
56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290
567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326
566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331
565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353
564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354
563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364
562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370
561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385
560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413
559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452
558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483
557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504
55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516
555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523
554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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