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기타 조회 수 12169 추천 수 163 2004.06.30 23:36:20
성경본문 : 누가복음 2:25-35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눅2:25-35



예수님의 부모들은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서 예수의 정결의식을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갔습니다. 이미 호적 신고를 위해서 (베들레헴까지) 한번 다녀왔던 길이긴 하지만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상당히 긴 여정입니다. 이 여행이 단지 정결의식으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면 누가는 이렇게 글로 남겨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우연한 만남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과 예수의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전승에 소중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시므온입니다. 성서 본문은 이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대인 치고 선민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자기 나라를 구원할 메시야가 오시리라고 기대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들은 대개가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윗 혈통의 왕이 태어나서 뛰어난 전술과 전략으로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서 이스라엘이 세계의 으뜸 국가가 되게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땅의 침묵자"라고 일컬어지는 소수의 사람들은 폭력과 권세와 군대 같은 무력에는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고 단지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위로와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라고 표현된 시므온이 바로 이런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정치 일정에 따라서, 경제 일정에 따라서, 아니면 가족과 연관된 대소사에 따라서, 그것을 기다림의 목표로 살아갔지만 시므온은 그것과는 다른 것을 기다렸습니다. 성서는 늘 이것을 말합니다. 오직 이것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역시 이런 의미입니다. 교회를 종말론적인 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제일세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할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재림신앙은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하듯이 기독교 신앙의 타계적 성격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어떤 이념보다 훨씬 강력한 변혁과 혁명의 소질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해방받고 자유롭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말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만들어가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방식의 삶에 만족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수 없으며,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일종의 지상천국을 꿈꾸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이 세상을 절대화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자연과학을 보십시오. 생명의 비밀에 상당히 접근해 있는 생명공학은 자신들의 기술이 인간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마 세월이 흐르면 인간의 수명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120년까지는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과학이 더 발달하면 969년을 살았던 무두셀라처럼 천살 가까이 살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좀더 극단적으로 상상해보면 우리의 장기를 계속 갈아치우는 방식으로 인간이 죽지 않는 날이 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생명공학에 투자를 많이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게 인간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행위를 통해서 인간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허풍을 부립니다. 생산성도 높이고 빈부의 격차도 줄이고 지역감정도 없애고 남북문제도 해결하고, 노인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정치의 절대화는 히틀러의 제삼제국 이데올로기처럼 결국은 인간 삶을 왜곡시킵니다. 요즘 근본주의적 "에콜로지스트"들의 꿈도 이와 비슷합니다. 오늘의 생산과 소비 중심의 정치, 경제를 생태 중심으로 바꾸어 지구를 지속가능한 환경이 되게 해야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근본적으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태운동이 또 하나의 절대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림으로써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개입될 여지를 말살시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난 한 학기 동안 영남신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에게 "신학개론"을 가르치면서 잠시 복지 지상주의의 문제점을 제기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전 복지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태(지상낙원)가 상대적으로 행복한 삶을 보장할지는 몰라도 절대적인 삶을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말입니다. 지금 스웨덴, 노르웨이 같이 우리에 비해서 월등하게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 가운데서 인생을 즐기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기쁨과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볼 때 가난한 파키스탄이나 인도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불행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선진국의 미래가 제삼세계의 미래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가는 과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으로 절대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문화활동이 헛수고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늘 상대적인 가치만 갖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궁극적인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이 풍요로워지는 길도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의 그런 노력을 절대화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만 우리의 노력은 우리가 이 땅에 살동안 편리하게, 약간 재미있게 살아가는 방편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런 한도 안에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반면에 궁극적인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기때문에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증언합니다.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오늘의 우리도 부활의 예수가 다시 재림할 때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인간이 세워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가다립니다. 인간이 만든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아마 어떤 분은 "당신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좀더 구체적인 것을 말해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좀더 생각해보십시오. 확실한 것은 늘 손에 잡혀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즉 우리의 경험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허무한 것들을 손 안에 들고 이것만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것은 아직 여기에 없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폐"의 방식으로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므온을 보십시오. 그는 영에 이끌리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정결의식을 치루고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29-32, 공동번역). 어떤 젊은 부부의 품에 안겨 있는 젖먹이 남자 아이를 보고 구원을 보았다는 노래가 도대체 말이 되나요? 아직 이 아이는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고, 더구나 부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시므온은 이 아이에게서 만민에게 임하는 구원을 볼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젖먹이 예수에게 은폐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미래가 이미 은폐의 방식으로 젖먹이의 현재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시므온은 보았습니다. 중세기 때의 서양 그림에는 이런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그리면서 이미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 겹쳐서 나타납니다.  

이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일상적인 것에만 치우쳐서 그것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는 절대적인 힘을 놓쳐버리면 안 됩니다. 예컨대 모든 물질의 기초로 간주되는 원자가 빈 공간이라는 사실은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되듯이 우리에게 영적인 전자 현미경이 필요합니다. 그런 차원은 우리에게 너무 어려우니까 나는 그냥 쉽게 생각하고 살련다, 하는 사람들을 제가 억지로 뜯어말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의 세계인 부활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이런 형식의 삶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준비한 참된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역시 신앙은 신비입니다. 지금 손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미래의 생명을 기다리고 희망한다는 한다는 점에서 신비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시므온에게 성령이 함께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가 성령의 지시를 받는다는 말은 일상적인 것을 뛰어넘는 힘에 의존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다음 주일부터 우리 기독교에서는 대강절 절기가 시작됩니다. 대강절은 교회력으로 한 해의 시작입니다. 이 말은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는 대목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고 그가 온전히 통치할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에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삶의 현실을 정직하게 들여야보면 그런 재미라는 것이 너무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재미는 그저 재미일 뿐이지 궁극적인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긴장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잊지 마십시오. 궁극적인 생명과 즐거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1299
653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410
652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422
651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424
650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429
649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434
648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436
64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442
646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447
645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451
644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454
643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66
642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74
641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498
640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99
639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502
638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532
63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553
636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578
635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591
634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93
633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601
632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609
631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612
630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9644
629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656
628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80
6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9682
626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84
625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89
62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90
623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708
622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729
621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734
620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741
619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746
618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761
61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63
616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770
615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771
614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773
613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91
612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797
611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805
610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805
609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832
608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833
607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8] 2014-06-15 9856
606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904
605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920
604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934
603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944
60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945
601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949
600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952
599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953
598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975
597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979
596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95
595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10004
594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10005
593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10007
592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10010
591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10042
590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10054
589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10058
588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10073
587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10075
586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10081
58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10087
584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10099
583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99
582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10102
581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119
580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10121
579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10123
578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123
577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10128
576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10130
575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168
574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70
573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204
572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205
571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206
570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236
56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242
56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271
567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305
566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309
565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311
56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312
563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349
562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351
561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365
560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399
559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437
558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467
557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473
556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491
555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491
554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50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