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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919 추천 수 0 2019.06.23 22:00:00
설교듣기 : https://youtu.be/QSitPyDEXxQ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누가복음 8:26-39 

축귀 능력자 예수

8:26-39, 성령강림후 둘째 주일, 2019623

 

26.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정신 이상 된 사람

오늘 설교 본문 눅 8:26-39에 나오는 이야기는 한편으로 흥미진진하고, 다른 한편으로 황당하기도 합니다. 흥미진진하다는 말에는 보충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공동묘지에서 살던 한 귀신 들린 사람이, 사실은 정신 이상 된 사람인데, 예수를 만나 제정신을 찾았습니다. 그 와중에 돼지농장에서 방목되던 수백, 수천 마리의 돼지 떼가 호숫물에 뛰어들어 죽는 장면도 나옵니다. 영화로 만들었으면 천만 관객을 끌어모았을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과 귀신 들린 사람의 대화가 나옵니다. 당신 이름이 무엇이오? 귀신들린 사람은 나는 군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말 성경 각주에 따르면 군대는 로마 군대의 여단 규모를 가리키는 헬라어 레기온입니다. 이 사람 안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이 그렇게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귀신은 무저갱, 즉 지옥으로 쫓아내지 말고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간청하여 허락받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나,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황당하게 들릴 겁니다.

당시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누가복음만이 아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이 사건이 나오는 걸 보면 이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은 돼지 떼가 몰살당하는 장면을 통쾌하게 여겼을 겁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짐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거라사는 유대인들이 낮추어보는 이방인 지역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이야기를 완벽하게 재구성해낼 수는 없습니다. 2천 년 전 전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사건을 사실대로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용의 첨삭이 일어났습니다. 그걸 고려하면서 이것을 기록한 사람이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본문은 정신 이상 된 이 사람을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고대인들은 주술적인 세계관을 붙들고 살았기에 그런 묘사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지적 수준이 유치해서 그렇게 묘사한 건 아닙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악한 현상을 귀신의 작용으로 본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우주와 인간과 역사와 생명에 관해서 모르는 게 많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본문은 이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8:27). 29절의 괄호에 묶인 내용은 좀 더 과격합니다.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끓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그를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은 사람들은 마을의 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광인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요. 이 광인은 마을 사람에게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신약학자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이 왜 정신병에 걸렸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렸을 때 로마 군대의 만행을 경험했습니다. 로마 군대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제압했습니다. 그 기억은 이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에게서도 트라우마가 많이 발생해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미군들은 나라에서 의료상의 도움을 받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방치되었습니다. 그는 로마군이 저지른 살상행위에 관한 기억으로 정상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씻지도 않고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로마군에게 죽은 사람들의 공동묘지를 자주 찾아가서 머물다가 급기야 거기에 터를 잡게 되었습니다. 며칠 굶어 허기가 지면 마을로 내려가 구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찬밥 한 덩어리라도 주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냉정하게 쫓아냈겠지요. 허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남의 집 부엌에 몰래 들어가 밥을 훔쳐먹지 않았겠습니까. 철없는 아이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겠지요. 마을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불편하게 여겼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이 사람의 정신병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마을에서 이웃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거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극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축귀 현상에 관해

본문의 미친 사람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서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귀신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정신병이 나았다거나 귀신이 나갔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많은 환자를 고치셨기에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다른 이야기에 나오지 않는 반전이 있습니다. 돼지농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돼지 떼가 호숫물에 빠져 죽는 걸 보고 놀라서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현장으로 몰려왔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구경거리였겠습니까. 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광인이었던 그 사람이 완전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변한 광경입니다. 옷도 단정하게 입었고, 행동도 보통 사람과 비슷했습니다. 눈빛도 물론 달라졌겠지요. 이 소문이 거라사 근방에 퍼졌습니다. 모두 놀라워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을 하고, 자기들 마을에 당분간이라도 머물면서 귀한 가르침을 달라고 예수에게 부탁했었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기서 떠나주기를 바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다는 사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실이 더 중요하기도 하고, 이 설명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축귀 능력자들의 활동은 흔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퇴마라는 단어가 일반적입니다. 무당들의 주요 업무가 귀신을 쫓아내는 겁니다. 무당 말고도 직업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심령술사들이 요즘도 있습니다. 원한에 차서 죽은 아무개의 혼령이 들어와서 이유도 없이 아프거나 사고가 자주 일어나게 되었으니 혼령을 위로하여 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축귀나 퇴마 의식을 거행하려면 만만치 않은 돈을 내야 합니다. 마음 약한 사람들은 그런 말에 쉽게 빠져듭니다. 보통 사람들도 굿이나 퇴마 의식을 직접 보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된 예수님의 행위는 심령술사들의 행위와 비슷해 보입니다. 귀신과 대화하고 제압하는 과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런 심령술사와 비슷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돈벌이하는 마술사가 아니고 남의 심리적인 약점을 이용하는 전문적인 축귀 심령술사도 아닙니다. 심령술사들은 인간 심리의 무의식을 다루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총체적 인격을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의 핵심은 더러운 귀신이 돼지 떼에게 옮겨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축귀 능력입니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이 없듯이 정신적으로도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건강하거나 약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요즘 조울증을 앓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조현병도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아주 두드러진 경우를 제외하면 약을 처방받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 역시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정신병으로 이름을 붙이지 않지만 삶을 파괴하는 사회현상도 많습니다. 이게 사실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집단적 혐오 현상은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장애인 시설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실력행사를 불사하는 일들은 또 어떻습니까? 과도한 물질숭배는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차별을 받는다는 어느 대표적인 정치인의 주장은 제정신일까요, 아닐까요? 수학능력 고사 점수에 따라서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대한민국의 사회현상은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150개 이상의 교파로 갈라진 기독교의 분열 현상은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을 더러운 귀신이라고 한다면 21세기 우리는 대부분 귀신 들린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사회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우리는 생명 지향적으로만 살지 못하고, 종종 알게 모르게 생명 파괴적으로 삽니다. 그것이 자신의 세계관으로 자리를 잡으면 악한 영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습관적으로 지나치게 자신을 염려하는 건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습관적으로 잘난 척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런 태도는 의학적으로는 질병이 아닐지 모르나 실제로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정신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과 이웃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자식 사랑이 오히려 자식의 삶을 위축시키기도 하고, 지나친 교회 사랑이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저 자신도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로 귀신 들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평생 키리에 엘레이손!’(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이라는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하나님의 큰일, 예수의 큰일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 사건으로 인해서 뭔가 불편해진 겁니다. 미쳤다가 정신 차린 사람이 계속 광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그들에게는 편했습니다. 광인이 있어야 자신들이 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떠나라는 마을 사람들과 입씨름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마음의 문이 닫히거나 세계관이 전혀 다른 사람들과는 길게 이야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은 타고 왔던 배에 다시 오르셨습니다. 광인이었다가 정신을 차린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말렸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을 따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를 돌아가라 하면서 주신 말씀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귀신과 예수의 대화나 돼지 떼 이야기는 기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39절만 기억하면 됩니다. 이 구절이 성경 기자가 정작 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갈릴리호숫가에 묶여 있는 배 안으로 장면이 바뀝니다. 광인이었다가 정신을 차린 한 사람이 예수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옆에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이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큰일을, 즉 위대한 일을 행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만이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경험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당연하거나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한 가지 예로 오늘 본문은 마을 사람들에게 귀신 들린 자로 취급받고 배척당했던 사람이 제정신을 차린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자신의 아픈 상처로 고통당하지 않고 정신 차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 중에서 이 사람만 제정신을 차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의 제자로 살고 싶어 했지만, 교양이 있다고 자부하던 마을 사람들은 마땅히 환대했어야 할 예수를 거부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서 생명을, 즉 제정신을 차리고 살아있다.’라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어디서 경험합니까? 그런 경험이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님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이 사람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전하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이 어떻게 위대한 일을 했는지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본문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정확하게 여기서 짚었습니다. 예수님의 큰일은 바로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굳이 예수님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잘산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힘은 현실적으로 돈과 오락입니다. 돈과 오락이 현대인들에게 구원의 실체입니다. 그걸 부정하기도 힘듭니다. 그것으로 삶의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돈과 오락이 생명의 실체라는 것은 일종의 뉴에이지 현상입니다. 당신의 내면에 잠재한 신적인 능력을 발현하라는 것이 뉴에이지의 토대입니다. 오늘날 연예 오락과 상품 선전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Love your self!)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파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기에 예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메시지를 회의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믿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신앙 자체로 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나 자신들이나 별로 다를 게 없으니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는 없겠지요. 그들을 우리가 억지로 설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하고 있는지,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경험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연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 없이 교회에 기쁨으로 다닐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경험하기는 했으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분들과 아직 그런 경험이 충분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예수 사건이 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인지를 제가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은 곧 저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나는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입니다. 조각으로나마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전체 퍼즐과 연결되어야만 내 존재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퍼즐 조각이 자기만 생각하면서 모양과 색깔을 바꾸면 결국 전체 퍼즐 그림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퍼즐 조각으로서 죽기 전까지 전체 그림에 포함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뿐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말과 행동과 운명으로 나타내셨으며,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듯이 진정한 의미에서 축귀 능력자이신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최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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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June 24, 2019
*.160.198.36

목사님, 마을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통해 오늘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하신 말씀 고맙습니다. 역시 난  아무것도 아닌 자요, 성령의 도움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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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4, 2019
*.182.156.135

예, 오늘 우리의 사는 모습이 저 본문에 나오는 동네 사람들처럼 

구차스럽고 뻔뻔하고 몰염치하고 불쌍합니다.

이런 것만 생각하면 세상살이는 정말 재미  없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예수에게 더 가까이 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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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알아야

June 28, 2019
*.131.14.207

남편 숙제를 하느라 '초예측'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세계 석학 8인에게 인류의 미래를 묻는 인터뷰 글인데 장은 '호모사피엔스'라는 책을 이스라엘 교수의 글입니다. 그는 서두에 인간은 국가, 법인, 인권 같은 허구를 신봉하는 능력때문에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의 인류가 되었다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허구의 노예가 되어서는 된다고 그것들을 목적으로 살면 고통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 인류는 자신이 만든 허구에 의해 고통을 만들어 있다고 하네요. 어찌 보면, 목사님의 설교에 내용과 연결되는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신봉하는 허구는 재력, 교육, 이념 전쟁이 있고, 그것으로 인한 고통으로 자살을 하거나 불행한 삶을 사는 사는, 고통스러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고요그리고 귀신을 쫓아 예수님께 떠나가가라고 마을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그들과 차이가 없는 자신, 모순덩이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비가 진정 필요한 같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퍼즐의 조각, 나의 정체성을 조금씩 깨달아 간다면, 희망은 있는 같습니다. 저도 설교를 들으며, 예전처럼 축귀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다른 부분에서 성경의 메시지메 찾으려고 했던 자신을 보고 나의 생각과 관점이 조금씩 달라졌구나성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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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8, 2019
*.182.156.135

앗, 남편 숙제를 대신 해주시나요? ㅎㅎ

아니면 남편이 아내에게 숙제를 낸 건가요.

성경과 예수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영혼을

그 중심으로부터 흔들어놓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 시작하면 다른 이야기들은 정말 시시해질 겁니다.

알아야 님이 성경읽기의 눈높이가 달라졌다니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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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순복

June 28, 2019
*.26.146.204

'키리에 엘레이손! '이라는 고백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을 잊고사는 우리는 어쩌면 다 정신병환자들이겠지요. 그것을 깨닫는 자가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을 경험하고 늘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을 할 수있겠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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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8, 2019
*.182.156.135

누가 정신 나간 사람이고 제 정신 차린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삽니다.

겉모양은 세련미가 더해가지만 영혼은 더 경직되는 게 아닐는지요.

최소한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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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2059
419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2066
418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81
417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084
416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2087
415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164
414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178
413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224
412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236
411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10] 2016-05-15 12250
410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250
409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2252
408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284
407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286
406 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11] 2007-06-03 12287
40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2313
404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315
403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316
402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364
401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372
400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376
399 사순절 다윗과 여호와의 영 (삼상 16:1-13) [5] 2014-03-30 12402
398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447
397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454
396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471
395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98
394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506
393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513
392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516
391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518
390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522
389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536
388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552
387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562
386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70
385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597
384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597
383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598
382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617
381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622
380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639
379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645
378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684
377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708
376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708
375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712
374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716
37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728
372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739
371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740
370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742
369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742
368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769
367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771
366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776
365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813
364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833
363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841
362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848
361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872
360 성령강림절 닫힘과 열림 [21] 2009-09-21 12874
359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921
358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930
357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931
356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931
355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936
354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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