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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일치의 신비

주현절 조회 수 15730 추천 수 0 2010.01.25 16: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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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2:12-27 
 

교회 일치의 신비

(고전 12:12-27)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즉 구원자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구원은 절대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오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교회 역사를 배우며 거기에 동참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거룩한 사건에 함께 연루되어 갑니다.


교회 분쟁

이렇듯 거룩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교인들 사이에 왜 분쟁이 있을까요? 크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분쟁이 있고, 작게는 개신교 안에서 교파에 따라 분쟁이 일어납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우고 갈라지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심지어는 같은 지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분쟁이 일어납니다. 실제로는 멀리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분쟁보다는 같은 개신교 안에서의 분쟁이, 그리고 지교회 안에서의 분쟁이 더 심각합니다. 큰 싸움까지는 안 간다고 하더라도 서로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 경우는 많습니다. 박 집사는 성격이 왜 저래, 저 사람을 보면 불편해, 김 집사는 왜 저렇게 잘난 척 하는 거야, 등등, 거룩한 공동체에서 있지 말아야 할 싸움들은,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갈등들은 많습니다.

이런 분쟁은 초기 기독교에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사도들이나 사도 급에 해당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대기독교와 헬라기독교와의 분리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가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 교회와의 신앙적인 갈등으로 결국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도 분파가 생겼습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었습니다.(고전 1:12)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파가 나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분파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이런 분파적 현상은 단순히 세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하는 차원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훨씬 다양한 문제들이 고린도교회를 분파적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습니다. 우상 앞에 놓았던 음식을 먹는 자유가 있는 사람과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서로 비난했습니다.(8장) 때로는 성만찬에서도 이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고전 11:18) 당시에는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애찬식도 성찬식에 포함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 후에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기서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가져온 것을 자기들끼리만 나눠먹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신유, 방언, 예언, 축귀 등을 가리키는 열광적 은사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은사가 더 우월하다고 보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이렇게 갈가리 찢어진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평화를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그런 분파와 분쟁과 파당을 고린도교회에서 목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몸

바울은 교회 일치가 교회의 정체성이며, 본질이라는 사실을 본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몸으로 비유합니다. 1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그림을 그리듯이 교회를 설명합니다. 교회의 구조와 기능은 몸의 원리와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1) 몸은 여러 지체로 구분됩니다. 손, 발, 눈, 가슴, 그리고 몸 안에 심장, 신장, 위, 큰창자, 작은창자 등, 여러 장기가 있습니다. 모든 지체는 한 몸을 이룹니다. 발이 자기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몸에 붙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귀가 눈이 아니라고 해서 몸에 붙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서로 다르지만 모두 몸에 붙어 있습니다. 그런 지체들이 합해서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지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각각의 지체가 나뉘지 않고 모두 하나의 지체라고 한다면 그건 몸이 아닙니다. 모두 손이거나 모두 발이거나 하면 제대로 된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교회에 적용합니다. 교회 신자들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달라야만 합니다. 각각 할 일도 다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배우는 사람도 있고, 청소하는 사람도 있고, 남을 돌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배척할 수 없습니다.

2) 약한 지체가 더 소중합니다. 22-24절이 이를 설명합니다. 팔과 다리는 강하고 눈은 약합니다. 그러나 눈이 더 중요합니다. 팔이 하나 없는 게 눈이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보이는 지체보다는 보이지 않는 지체가 더 중요합니다. 심장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몸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약한 지체, 아름답지 못한 지체를 귀하게 보호해야만 몸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약한 신자들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교회를 섬기는 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원리를 정리하면 몸의 지체 사이에 분쟁이 없고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25절) 이런 원리에 따라서 교회 구성원들이 관계를 맺는다면 근본적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겠지요. 거꾸로 교회가 분열하고 신자들의 마음이 찢긴다면 교회의 근본 원리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겠지요. 이것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돌려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원리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어 있지 않다는 식으로 서로 분리하려고만 하거나, 약한 지체를 서로 돌보고 싶다기보다는 그들 앞에서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요?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말썽을 피우는 사람과도 무조건 화합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파렴치한 일을 행한 사람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적절하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그런 일들은 필요합니다. 더구나 신앙적인 진리를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치열하게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진리 투쟁에서는 바울도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그런 진리의 차원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소모적인 경쟁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욕망으로 인한 분쟁을 말합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신유,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등의 은사를 놓고 무엇이 더 큰지 싸웠습니다. 불필요한 경쟁이고 분쟁이었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싸웁니다. 좋은 일을 앞에 놓고도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바울은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여러 지체가 서로 돌봐야 하듯이 교회에 속한 이들도 그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면 실제로 교회가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일치를 이룬 적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도 분열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파 사이에도 그렇고, 신자 개인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신자들의 수준이 낮거나 인격이 불량하거나 신앙이 부족한 탓일까요? 아닙니다. 꽤 괜찮은 사람들이 모여도 분쟁은 없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 분열의 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 걸쳐 있다는 사실이 그 이유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지금 우리가 공동체로 모이는 이 현실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의 토대가 되는 영적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 이미 승리한 교회, 그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치 삼위가 일체를 이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아직 투쟁 중에서 있는 교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의 그런 상처는 종말이 되어야 완전히 치료될 것입니다. 종말에는 보이는 교회가 아예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분열의 상처를 안고 있는 교회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승리의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보이는 교회의 상처를 치료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마치 우리 몸의 백혈구와 같습니다. 몸에 균이 아무리 많아도 백혈구가 충분하면 몸의 건강을 완전히 잃지 않습니다. 백혈구가 암세포도 방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면역력이 왕성하게 작동하는지 아닌지 달려 있습니다. 면역력을 높이는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한, 이미 영광에 들어간, 종말에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낼 보이지 않는 교회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광의 교회를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여러 지체로 된 하나의 몸이 교회라는 말을 하면서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했습니다. 27절에서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갖고 살았는데, 그의 몸이 어떻게 지금 교회가 된다는 말인가요?

우선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물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 예수님은 부활 이전과 이후로 구분됩니다. 부활 이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방식의 몸으로 살았지만, 부활 이후에는 전혀 다른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부활의 몸은 궁극적인 생명의 몸입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근원입니다. 골로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골로새서는 여기서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주를 몸으로 하는 머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주론적 생명의 근거라는 것이 신약성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런 신약성서의 설명이 너무 막막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으면 충분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신앙은 중요합니다. 각자가 부활의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 부활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생명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그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주의 근본이 되셨습니다. 우주는 그의 몸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우주 전체를 생각해보십시오. 태양과 별과 달도 모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물, 공기, 흙, 산, 강, 꽃, 산양, 고래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아침 안개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세계와 자연이 그리스도 자체라는 말이 아닙니다.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이집트의 신앙을 흉내 내자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몸’이 그 대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엡 4:15) 또한 그리스도는 세상의 머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차원에서 교회와 세상은 똑같습니다. 세상은 확대된 교회이고, 교회는 축소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는 양쪽 모두의 몸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각각의 지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듯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세상에 각각의 지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이 계신가요? 우리가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 경쟁, 욕망으로만 삶을 확인하는 세상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시각으로 세상과 교회를 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그게 보이는 사람이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일락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사람이 있고, 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몸’이라는 사실은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와 존재 신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비를 아는 사람들은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교회 일치의 원리를 몸으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서로 분쟁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돌보는 삶이 그것입니다. 이런 능력이 우리 교회에서 넘쳐나 세상으로 밀려들기를 바랍니다.(주현절 후 둘째 주일, 1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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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anuary 26, 2010
*.136.37.76

오자 발견. 밑에서 14번째 줄. 대답입니다 인데 대답니다 로 씌여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잘 보존해야할텐데...

자해는 몸의 지체 중 하나가 다른 지체를 해하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결국 몸이 고통을 받고

몸이 고통을 받으면 해를 가한 지체도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기에

공동체내에서 누군가를 자신의 욕망으로 인하여 해하면

결국 자신도 해를 입게 될 수 밖에 없는 자해가 됨을 알아야겠네요.

 

저도 자해를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보렵니다.

살펴보니 이곳 저곳이 상처투성이네요^^

물론 지체 중 몸을 죽이는 지체는 가차없이 제거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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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6, 2010
*.120.170.243

눈사람 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약성서의 진술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세계를 알면 놀랍지만,

모르면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 하겠지요.

신약성서에서 '몸'은 핵심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기본적으로 '몸'을 말하는 거에요.

그는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거든요.

인간은 영과 몸의 신비한 결합체입니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에는

영육이원론적인 영지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신 분이시군요.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술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우주론적 구원 영성을 봅니다.

눈사람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영적인 성찰을 쉬지 말아야겠네요.

주현절 후 셋째 주일입니다.

주님이 몸으로 사신 공생애를 기억하는 절기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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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모통이돌

January 27, 2010
*.176.25.212

설교를 듣고 난 후,

한번씩, 가만히 계속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일까?

이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또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님이 이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체감이 너무도 협량하다보니,

아직까지도 목사님의 말씀이

목으로 꼴깍넘어가기보다기는 입에서만 맴맴도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설교에서 성서말씀을 가감없이,

온전히 우리에게 던져졌을때 일어나는 '능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설교 듣고 문앞에서 목사님과 악수하면서 휘발되어버리는

설교를 가장한 생활강좌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전달되었을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궁구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성서와 말씀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닌지요.

 

그런 의미에서 그 "몸"에 대해 다시금 생각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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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7, 2010
*.120.170.243

모퉁이돌 님,

생활강좌 설교라는 표현에서

모퉁이돌 님의 영적 경지를 맛볼 수 있었어요.

설교는 당장 은혜로 다가오기보다는

훗날 다시 생명의 힘으로 솟아나야만

살아있는 설교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스도의 몸'은 나도 생각을 더 해야 합니다.

두고두고 생각해야겠지요.

그리스도와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그 개념을

어찌 한 두 마디로,

순식간에 다 알 수 있겠어요.

그 물 안으로 들어가서 수영을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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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January 27, 2010
*.68.129.80

목사님!

"면역력을 높이는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길에 서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어찌하나요?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과연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걸까요?

오랜 토속종교에 젖어있는

선교지들의 변형된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그런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

과연 그들이 무지하거나 어리석기 때문일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신학의 갈래들도 수 없이 많은 걸 보면서 

과연 어느 길에 서 있는게 잘 하는 일인가 의심이 들 때도 있고요.

 

그리스도의 몸에 일치하는 그 삶으로의 정진을

다시 한번 깨우쳐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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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7, 2010
*.120.170.243

모래알 님,

구약의 거짓 예언자들을 따라간 사람들에게,

그 현상은 신약과 기독교 역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은 옳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예수를 믿기 힘든 처지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역시 선택의 여지는,

즉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고 봐야지요.

그들의 구원 문제는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기독교 진리에 깊이 들어와있다는 사실이

과소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는 지난 2천년동안 그런 능력으로 지탱했습니다.

간혹 뒤뚱거리기는 했지만

진리에 근거해서 생명의 능력을 획득했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런 길을 가고 있으며,

후손들에게 좋은 본을 남겨줘야겠지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체가 되는

모래알 님에게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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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이방인

January 27, 2010
*.118.129.226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차원에서 교회와 세상은 똑같습니다. 세상은 확대된 교회이고, 교회는 축소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는 양쪽 모두의 몸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각각의 지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듯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세상에 각각의 지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의 몸입니다."

 

목사님, 위 귀절에서 엄청난 사고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시각을 얻게 되는군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대해야 한다는 논리가 사실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프레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은 곧 하나님 나라가 되었지요. 목사님에서 위에서

말씀하시는 바로는, 세상과 교회의 일치이구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으나 아직 우리 가운데 성취되지 않은 상태이구요.

기존의 생각의 프레임 안에서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적대적인 관계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투쟁"을 해야한다는 논리적 귀결이 나오는 반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세상"에 대한 개념으로 보니, 세상은 곧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되는 것이네요.

확대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세상, 축소된 세상으로서의 교회,

이 두 곳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섬겨야 하겠구요..

"섬김"의 시각으로 보니 보다 나와 세상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쉬워지네요.

이것은 창세기의 "문화명령"과도 연결이 되겠구요.

"문화명령", "하나님 나라 운동"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네요..

목사님의 말씀에 눈이 조금 띄이게 되는 듯 하네요.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제 컴퓨터에서는 이것의  설교보기는 작동되지 않으며, 설교듣기는 중간에서 끊어집니다. 다른 설교의 말씀에서도 설교듣기가 중간에서 끊어지는 사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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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7, 2010
*.120.170.243

이방인 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저보다 더 깊이 생각해서 받아들이셨네요.

(적대적인)투쟁이 아니라 (형제애적인)섬김으로의 방향 전환!

그것이 가능한 신학적 토대를 발견했군요.

여기서 섬김은 나이브한 차원이 아니라 역동적인 차원이겠지요.

우리의 현실 삶에서는

(진리를 세우기 위한)투쟁을 통한 섬김이 필요하니까 말입니다.

설교보기가 작동되지 않는 이유는

설교보기 파일을 담당하는 분이 좀 늦게 올리기 때문일 겁니다.

지난 주 설교보기도 안 보이면 컴에 문제가 있는 거구요.

설교듣기가 끊어지는 건 순전히 컴의 문제에요.

내 컴에서는 다 잘되는데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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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January 28, 2010
*.11.167.102

마침 주일예배 전 철학스터디에서 스피노자의 신 개념 이야기를 들었기에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물질 양상이 결국 신의 겉모습이라는 범신론을 펼쳤기에

개체들의 특수성을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는데, 바울의 '그리스도의 몸' 개념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그리스도의 몸' 개념이야말로 영육이원론의 온전한 극복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 한국사회에 잘못 통용되고 있는 인맥(人脈) 개념에 대한 해답도 되리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히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배타적이고 영원불변한 칭의에 기초하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맥도 존재론적 '그리스도의-몸됨'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구차하고 잔인하게 서로를 도구화시키는 사회풍조가 비로소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을 보면, 서로 만나서 웃고 울고 떠드는 감정놀음은 실컷 하지만

정작 서로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성찰해보면 '글쎄, 나랑 쟤랑 무슨 상관이지?'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감정이 오히려 서로간에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영원불변한 관계의 인식을 방해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만날 때마다 웃지도 울지도 않고 목석처럼 신학적으로만 대면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떻게 하면 될까요?

또 인간은 다 영적 존재라는데, 왜 육체를 사용해서 언어로만 소통할 수 있는 것인지 답답하기도 합니다.

공적 서버가 없어도 개인 컴퓨터끼리 마음껏 자료를 주고받을 수 있는 P2P(person to person) 자료공유방식처럼,

하나님의 칭의 사건이라는 생명의 네트워크를 따라, 인간의 감정도 언어도 한없이 무의미해지는,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로 접속하게 되기를, 그런 참된 인맥 경험을,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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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8, 2010
*.120.170.243

용남이,

모든 간접적인 소통의 한계를 넘어서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때가 오겠지.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보는 날이지 않겠나.

그 전까지는 언어, 문자, 개념을 통한

간접적인 소통이라도 잘 해야겠지. 

이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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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February 01, 2010
*.229.151.223

이사야 선지자의 64편의 탄원기도를 대하면서 저는 이 기도야 말로 "중보기도"의 본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기도는 중보기도 밖에 없다"는 말씀을 다시 기억해 봤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을 대하니

우리의 기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우주론적인가, 세삼 놀라게 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대하는 풀 한포기에도 모래 한 알갱이에도 온 우주의 신비가 숨어 있다는 것은

타 종교 신비가들 혹은 시인들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지만, 그 '우주'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이 비밀은

부활생명을 경험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천상의 복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만이 피조물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록 우리의 탄원기도, 중보기도는 더 절실해지겠다 싶구요.

온 우주와 통용하는 것, 그것은 바로 생명의 신비를 더 깊이 알아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내내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얼마나 역동적이게 하는지요.

이것이 생명지향적인 삶이 아닌 가 싶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두운데, '눈에 빛을 가진 자'의 삶이겠다 싶구요.

말씀을 들으면서, 온 우주가 나의 형제임을 고백하고 싶어졌습니다.

오, 주의 신비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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