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기타 조회 수 9716 추천 수 35 2004.07.11 23:50:38
성경본문 : 열왕기하 2:7-14 
2004. 7.11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왕하 2:7-14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유난히 긴밀한 사람들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이스라엘에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 백성들과 왕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라는 명칭 때문에 점쟁이들처럼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는 사람쯤으로 생각하면 그들을 잘못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선포의 핵심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사회정의를 세워나가라는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사회정의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그 문제가 같이 돌아가는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때로는 신체적 위협이나 생존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왕과 귀족의 탐욕을 지적하면서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워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들과 똑같은 예언자이면서도 약간 성격을 달리 합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이들도 우상을 섬기는 왕들과 투쟁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예언자 전통에 있기는 하지만 사회 정의에 대한 직접적인 설교를 하는 것보다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을 수호하는 일에 더 큰 무게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와 엘리사에게는 기적 설화가 많이 따라다닙니다.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 우상의 능력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적 사건보다 더 효율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도 역시 그런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불말과 불수레
흡사 헬라의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처럼 엘리야도 구약의 역사에서는 가장 카리스마가 강한 예언자였습니다. 우상을 섬긴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황실 예언자 450 명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황소 두 마리를 제단에 올려놓고 자기가 섬기는 신의 능력으로 그 황소를 태우는 경쟁이었습니다. 왕상 18장을 읽어보신 분들은 엘리야의 승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전승된 엘리야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엘리야도 결국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카리스마가 따라다닙니다. 웬만하면 늙어서, 또는 병들어 죽을 때가 된 사람은 편안하게 누워서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게 정상인데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은 특별했습니다. 2장 앞부분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혼자 죽을 장소를 찾아서, 또는 제자에게 임무를 넘겨주기 위해 길을 떠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인 엘리사는 스승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반복해서 말합니다. "결코 안 됩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절대로 스승님과 헤어질 수는 없습니다." 스승의 죽음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죽으려고 하는 엘리야가 야속했는지, 또는 자기가 엘리야의 뒤를 이을 만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판단이 든 까닭인지 모르지만, 엘리사는 엘리야를 놓치지 않고 계속 따라 다니다가 요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겉옷을 벗어 말아 가지고 그것으로 요단강 물을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이 두 사람, 죽으려고 작심한 스승 엘리야와 그 운명을 막아보려는 제자 엘리사는 갈라진 강을 마른 땅처럼 밟고 건넜습니다. 강을 건너면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이제 나를 데려 가실 터인데, 내가 자네를 두고 떠나기 전에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는가? 말해 보게."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되자 엘리사는 더 이상 엘리야의 죽음을 거부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남기실 영검에서 두 몫을 물려주십시오." 영검은 영어로 spirit, 독일어로 Geist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영감'으로 번역된 반면에 공동번역에는 '영검'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대충 영적인 능력이라고 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엘리사가 두 몫을 달라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 엘리야의 카리스마를 익히 보아왔던 엘리사로서는 그런 카리스마에 관심이 많았을지도 모르고, 또는 스승의 일을 감당해야 할 자기의 처지의 절박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 갑자기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나서((11절), 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졸지에 벌어진 이 광경을 쳐다보면서 엘리사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지키던 병거여, 기병이여 .. "(12절). 이제 엘리야는 엘리사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구약의 인물 중에서 이 땅에서 정상적으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을 에녹과 엘리야로 생각합니다.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믿을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수천 년 전에 고대인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그 실상을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성서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안 되고, 어쩌면 그래야만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원한다면 그런 요소들을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는 실제로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일까요? 따라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이 세상에 와야 한다고 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이 옳은 것일까요?
구약학자들의 설명을 짧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불말과 불수레 다음에 등장하는 회오리바람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말은 회오리바람이 자연 현상인 것처럼 불말과 불수레 역시 자연 현상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한 요단강 동쪽의 열풍을 동반한 회오리바람을 불말과 불수레로 표현한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합리적인 이러한 해석과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던 병거여, 기병이여..."라는 엘리사의 외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불말과 불수레는 엘리야에 대한 칭호인 '병거와 기병'의 회화적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또는 말은 고대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제의용 짐승이었다는 점에서 이 엘리야 전승의 토착화 과정에서 그 이전의 태양 제의전설과 혼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구약의 다른 전승과 연결시키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래 불은 하나님의 현현 장면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요소라는 점에서(출 3:2, 24:17, 사 30:27, 합 3:3-5, 신 33:2) 불말과 불수레를 통해서 엘리야의 카리스마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
엘리야가 사라지자 그 현실을 받아들인 엘리사는 자기의 겉옷을 찢어 버렸습니다. 화가 났는지, 불안한 마음의 표현인지, 아니면 그 당시 죽음 앞에서 행하던 관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엘리사는 대신 엘리야가 떨어뜨린 겉옷을 집어들고 왔던 길을 뒤돌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요단강에 이르자 스승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쳤지만 물이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떠난 다음에 제자 엘리사가 처음 시도한 기적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실패 앞에서 느꼈을 엘리사의 좌절감을 우리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승의 카리스마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차에 처음 시도한 이 일이 실패하고 말았으니 당연히 참담한 심정이 된 엘리사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스승의 카리스마가 자기에게 이어지지 않은 것일까? 나에게 그럴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것일까? 스승의 일들을 앞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나에게 문제란 말인가?
엘리사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렇게 외치면서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다시 내리쳤습니다. "엘리야의 하느님 야훼여, 어디 계십니까?"(14절). 그러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고, 엘리사는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놀라운 신적인 능력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제 엘리사도 명실상부한 예언자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현상의 물리적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어 엘리사에게 발생한 이런 놀라운 카리스마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가 핵심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엘리사는 요단강을 가르기 위해서 두 번 시도했습니다. 두 번의 시도에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같은 점은 엘리야의 겉옷이고, 다른 점은 두 번째 시도에서 엘리사가 이렇게 외쳤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의 하느님 야훼여, 어디 계십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런 놀라운 신적 카리스마가 일어날 수 있었던 힘은 엘리야의 겉옷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어떤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몇몇 영웅을 기리거나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야훼만을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사람을 지나치게 의지하거나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씁니다. 엘리야는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지만 엘리사가 그의 겉옷이라고 붙잡으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의지하고 싶어합니다. 오빠부대로 나서는 소녀들이 스타의 손수건이나 물건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영웅을 만들고 싶어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영웅을 만든 다음에 그 대상을 자기 삶의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흡사 엘리야의 카리스마에 집착해서 결국 그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를 수 있다고 생각했듯이 말입니다.
엘리야의 옷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가 바로 요단강을 갈라지게 할 수 있는 힘들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강이 갈라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그런 물리적 현상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생명의 깊은 세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모두 해명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는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가 일으키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웅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 야훼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영웅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우리에게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놀라운 생명과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려면 사람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오는 게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오십니다. 그 역사에 바르게 참여한 사람들이 바로 영웅들이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정확하게 배우고 그 전통을 이어가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 생명 사건은 이런 역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참여하면 오늘 본문에서 요단강이 갈라진 것 같은 생명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런 구원의 세계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profil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1961
453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694
452 사순절 영원한 생수는 예수다! (요 4:5-26) [10] 2014-03-23 11703
451 주현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 24:12-18) [14] 2014-03-03 11708
45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724
449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728
448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743
447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747
446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749
445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753
444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776
443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779
442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780
441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788
440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808
439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2011-06-20 11818
438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838
437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838
436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11870
435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871
434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887
433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888
432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894
431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902
43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907
429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1978
428 사순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롬 4:1-5, 13-17) [5] 2014-03-16 11978
427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984
426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1989
425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996
424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2013
423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2045
422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2055
421 성령강림절 귀신 이야기 (눅 8:26-39) [43] 2016-06-19 12075
420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2080
419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2090
418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105
417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105
416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2109
415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185
414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193
413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247
412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257
411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263
410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10] 2016-05-15 12271
409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2301
408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304
407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310
406 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11] 2007-06-03 12312
405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340
404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344
403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2374
402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382
401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394
400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398
399 사순절 다윗과 여호와의 영 (삼상 16:1-13) [5] 2014-03-30 12453
398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476
397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490
396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503
395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518
394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523
393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529
392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537
391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541
390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544
389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556
388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573
387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585
386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95
385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616
384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617
383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622
382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635
381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657
380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657
379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666
378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709
377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726
376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734
375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748
374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756
373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756
37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760
371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762
370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767
369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767
368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788
367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796
36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797
365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840
364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848
363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862
362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869
361 성령강림절 닫힘과 열림 [21] 2009-09-21 12895
360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922
359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938
358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951
357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965
356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968
355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969
354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976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