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밥, 10월10일

기타 조회 수 9411 추천 수 30 2004.10.10 20:37:10
성경본문 : 마태복음 14:13-21 
2004. 10.10.                              

마 14:13-21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인 소위 ‘오병이어’ 사건은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초기 기독교 안에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각의 복음서가 부분적으로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인 틀에서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단 마태복음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참수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피하셨습니다. 가까운 친척이면서 자기에게 세례를 베푼,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예수님의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내다볼 수 있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피한 예수님에게 여러 곳에 있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몰려들었는지 우리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현재 예수님이 당한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들었다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사또 집의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몰리지만 정작 사또가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우리 속담에도 있듯이 고향에서 푸대접받았으며(마 13:53-58), 하나님 나라의 동지인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적한 곳으로 피하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예수님에게서 전혀 새로운 생명의 힘을 느끼고 찾아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청중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찾아왔을 것입니다. 특히 환자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이들 군중들이 저녁밥을 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군중들을 마을로 보내서 각각 저녁밥을 해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께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은 다음 동물과 똑같이 밥을 먹어야만 합니다. 끼니때가 되면 우리의 몸이 그 신호를 보냅니다. 그런 신호에 익숙하게 살아온 우리는 몸의 신호를 느끼기도 전에 시간에 의해서 무엇을 먹어야 한다는 느낍니다. 제자들이 해가 뉘엿뉘엿 지는 그 시간에 군중들의 저녁밥을 걱정하고 그 해결책을 예수님에게 제시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미 제자들끼리 충분히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이 장소에서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 이 사람들을 먹일 것인지, 아니면 요즘 우리가 하는 식으로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자장면을 배달시킬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을 모두 해산시킬 것인지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보았겠지요. 다른 복음서에는 군중을 먹이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 대략 200 데나리온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 돈으로도 물론 부족하다는 뜻이었습니다. 200 데나리온을 지금의 돈으로 환전한다면 대략 1천만 원쯤 됩니다. 많은 의논을 거친 다음에 나온 결론은 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제안을 듣고 던지신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였습니다.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이미 제자들이 여러 관점에서 저녁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머리를 짜낸 후에 내린 결론을 예수님이 뒤엎었습니다. 제자들의 머리로 궁리해낸 최선의 해결책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순간에 제자들은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저녁밥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이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군중들을 마을로 보내는 계획도 수포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딜레마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능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그 당위 사이에 놓여 있는 딜레마가 바로 그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 문제를 설교자의 딜레마로 바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는 불가능성과 그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 놓여 있다.” 우리가 이런 무능력과 당위 사이에서 벗어날 길은 죽기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문제에 놓여 있는 궁극적인 이유를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사명이 늘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혹시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을 원망하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들이 원망은 하지 않았겠지만 아예 가능하지 않은 요구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환자를 기적적으로 고치실 수 있는 예수님이라고 하더라도 남자 어른만 해도 줄잡아 5천 명 이상의 군중을 무슨 수로 먹일 수 있다는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기가 막힌다는 뜻으로, 또는 새로운 기적적인 사건을 희망하면서 자기들이 처한 형편을 이렇게 간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17절).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포함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군중들을 마을로 보내자는 게 그렇게 허튼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이걸로 누구의 입에 풀칠을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지금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이 멀어서 저녁밥을 사올 수도 없습니다. 사온다고 하더라도 1천만 원 이상의 돈이 들어야 합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먹어야 할 사람은 많은 데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 없는 상황은 우리의 삶에서 자주 벌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우리 집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다섯 명의 식구들이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밥은 겨우 한 그릇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밥을 솥에 넣고 물을 가득 채운 후 끓였습니다. 그러면 멀건 죽은 모든 가족들이 나누어 먹을 정도의 양으로 불어납니다. 이런 죽은 먹는다기보다는 마신다는 표현이 낫습니다. 마신 다음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또다시 배고프게 마련입니다.
요즘도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이 말이 아니라고 아우성입니다.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장사도 시원치 않습니다. 다만 수출만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아무리 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옛날에 비해서는 엄청나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특히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없다고 정부에 대한 원망이 많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도 괜찮다면 아직도 일할 곳을 많습니다. 다만 그런 일을 하기 싫다는 게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일지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요즘 내수가 나쁘다든지 일자리가 없다는 이런 호소들은 대개 절대적인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어려움이라는 것은 제가 어렸을 때 경험한 것과 같은 생존의 위기를 말하지만 상대적인 어려움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품위와 연결됩니다. 살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거의 모든 가정이 승용차를 굴리고 있고, 모든 청소년들이 핸드폰을 소유하고 있고, 돈 때문에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물론 지난날보다 좀더 잘 살아야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으며, 이런 정신으로는 아무리 경제형편이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본 것은 많은 숫자의 사람들과 자기들의 형편없는 소유였습니다. 늘 이렇게 어떤 것과 비교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국 사람처럼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한 이 지구는 평화로운 별이 될 수 없습니다. 좀더 엄격하게 말한다면 잘 사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 지구가 훼손된다는 점에서 잘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나 사회나 국가는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기독교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미국의 자본주의를 거의 메시아처럼 생각하고 따라갑니다.

떼어 나눔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것을 손에 들고 기도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도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의 숫자는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과연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단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지만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그것의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수만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는 이 보도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예수님에게는 지금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장애인의 장애가 고쳐진다거나 심지어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한결같이 초자연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다른 현상은 접어두고 오늘 이 오병이어만을 잠시 검토해봅시다. 과연 빵과 물고기가 마술사의 마술처럼 많아진 것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에 대한 몇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가 먹을 것을 챙겨왔지만 눈치를 살피고 있다가 어린아이가 먼저 자기의 것을 내놓은 것을 보고 모두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럴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어떤 사람의 살신성인 하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마련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실제로는 빵을 먹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으로 허기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채운다면 우리는 육체적인 허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위의 가능성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지 실체적 진실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 오랜 시간 전승된 사건을 오늘 사실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왜 이 사건을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전승시켜왔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건의 객관적 사실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초대교회의 신앙과 그 신학을 따라가는 게 성서를 읽는 가장 바람직한 길입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될 정도로 중요했던 이 오병이어가 초대교회에는 어떤 신앙적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일까요?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눈에 들어옵니까? 무엇이 연상됩니까? 그 행위는 곧 ‘성만찬’ 예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감사기도를 드린 후 나누어 먹고 마시는 초대교회의 성만찬 의식과 지금 광야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도 의식은 아주 흡사합니다. 바로 여기에 오병이어 사건을 소중하게 간직한 초대교회의 신학적 의도가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의 양이 늘어난 것에 관심을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들의 성만찬 자리에 임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광야에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던 군중을 배부르게 먹이신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중요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초대교회와 똑같이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의 ‘밥’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밥인 이유는 또 하나의 설교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리는 밥이라는 사실만은 놓칠 수 없습니다. 이 밥은 종말에서 시작될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차원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오늘 이야기처럼 실제적으로 이 역사에서 궁핍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투쟁하고 실천해야 할 사명은 예수님을 생명의 밥으로 믿는 모든 기독교인들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profile

profile

기절초

October 11, 2004
*.208.101.249

생명의 밥으로 여기 임재하시는 예수님,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나...
조지 폭스는 일관되게 이러한 사실의 토대위에 있었던 것 같읍니다.
동행하는 나의 삶의 모습은?
설교자의 딜레마가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능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그 당위 사이에 놓여 있는 딜레마라고 했을 때
작은 예수로 살아가고자하는 모든 이들의 경우이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임재하시는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저...
profile

[레벨:6]유희탁

October 11, 2004
*.230.164.46

애처로움...
나눔...
예수님의 사랑정신에 우리의 뿌리를 내리고..
또 한 날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야겠죠...
좋은 말씀 아멘으로 화답하고 돌아갑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1434
453 주현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 24:12-18) [14] 2014-03-03 11651
452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659
451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665
45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696
449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705
448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715
447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719
446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726
445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728
444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741
443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749
442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754
441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756
440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780
439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2011-06-20 11782
438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805
437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812
436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11837
435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850
434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861
433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863
432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865
431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873
430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873
429 사순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롬 4:1-5, 13-17) [5] 2014-03-16 11917
428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1953
427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954
426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1961
425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961
424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992
423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2010
422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2036
421 성령강림절 귀신 이야기 (눅 8:26-39) [43] 2016-06-19 12052
420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2054
419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2062
418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79
417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082
416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2083
415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162
414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174
413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220
412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230
411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242
410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10] 2016-05-15 12246
409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2247
408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281
407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281
406 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11] 2007-06-03 12284
40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2301
404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309
403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316
402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363
401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367
400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374
399 사순절 다윗과 여호와의 영 (삼상 16:1-13) [5] 2014-03-30 12394
398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442
397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444
396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469
395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94
394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502
393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510
392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511
391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513
390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520
389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533
388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549
387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557
386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68
385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594
384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594
383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594
382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616
381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621
380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634
379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642
378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682
377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698
376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705
375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707
374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709
37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723
372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732
371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736
370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737
369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739
368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766
367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767
366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772
365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807
364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832
363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841
362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848
361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858
360 성령강림절 닫힘과 열림 [21] 2009-09-21 12871
359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918
358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921
357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926
356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926
355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929
354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947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