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대림절 조회 수 9246 추천 수 0 2018.12.10 09:28:24
설교듣기 : https://youtu.be/FbrsdTtRba8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누가복음 3:1-6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3:1-6, 대림절 셋째 주일, 2018129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세례 요한과 예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주변에 여러 인물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있었고, 적대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위치는 독특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인물입니다. 이게 초기 기독교에서는 약간 어색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죄가 없었으니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자칫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우월한 인물로 비칠 염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인간 실존으로 살았기에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될 뿐만 아니라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가 우월한 위치에서 그런 일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오늘 설교 본문인 눅 3:1-6절에 나옵니다.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전통대로만 본다면 요한도 제사장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종교 업무를 맡은 고위직입니다. 요한은 그런 길을 포기하고 재야 선지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요단강 서편 광야에 거주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의 세례 운동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으로 나와서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앞 다퉈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의 카리스마가 워낙 뛰어나기도 했지만 시대적으로 그런 대중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는 점점 더 강력해지고 유대 민족의 정통성은 희미해져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눅 3:7절 이하에 요한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독설을 날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땔감이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의 설교와 세례 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더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세례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옥에 갇히지 않았거나, 나중에 석방되었다면 요한과 예수와의 관계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발전했을 겁니다. 요한은 헤롯을 비판하다가 투옥되었고 결국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죽기 전에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이신가?’(7:19)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요한을 인정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제거한 헤롯은 예수가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는 소문을 듣고 놀라워하면서 예수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누가복음만 아니라 네 복음서 모두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받은 소명과 같았습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인용한 오늘 본문 눅 3:4절을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사 40:3절과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이사야 당시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성전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가옥들이 불탔습니다. 패전한 나라의 백성들은 모든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다쳤고, 종이 되었습니다. 국보급 보물들은 강탈당했습니다. 귀족들과 지도급 인사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유대인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들의 하나님 신앙도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던 그 시절에 이사야는 모두가 깜짝 놀랄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누가복음 기자는 이 말씀이 세례 요한을 통해서 다시 선포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광야의 외침

왜 하필 광야에서 외쳐야합니까? 광야에서만 올곧은 소리를 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광야가 아닌 마을에서 삽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문명의 꽃을 피우는 도시로 몰립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 먹고 살려면 대도시로, 특히 서울로 와야 합니다. 서울에는 모든 힘들이 모여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와 학문과 의료 등등이 다 서울 중심입니다. 여기서 살아야 실제로 편리하고 경쟁력이 높아집니다.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은 서울의 집값이 올라가는 걸 좋아할 겁니다. 기득권을 많이 누리는 사람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기에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합니다.

세례 요한은 척박하기 짝이 없는 요단 빈들에서 지냈습니다. 3:4절에 따르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당시 최고 문명을 자랑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않고 절기에 따라서 제사만 잘 드리면 안정된 삶이 보장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평생을 보냈다고 해서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척박한 광야로 나와서 불편하게 지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길을 내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여기서 광야는 지리적인 광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걸 여러분은 이미 느끼셨을 겁니다. 광야는 실존적으로 고독한 자리입니다. 친구도 없고 유흥거리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과 단절된 장소가 광야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고독한 자리를 두려워합니다. 소외당할까 불안해합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거나 그런 자리를 기웃거립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더 외로워하는 것 같습니다. 자식이 찾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이 양로원에 많다고 합니다. 인간이 약하니 어쩔 수 없긴 하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고독한 자리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불빛 찬란하고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은 도시 문명사회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친구들이나 자식들과 아무리 재미있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광야로 내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게 분명하다면 절대고독인 죽음 역시 선한 일입니다. 거기서만 우리는 다른 것에 간섭받지 않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인생은 그 죽음을 미리 당겨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 퍼레이드를 벌일 때 목청 좋은 어떤 사람을 뒤따르게 하여 반복해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지금 전쟁에 승리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큰 환호를 받지만 곧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요단 빈들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요한도 역시 광야에서 죽음을 미리 당겨 경험하지 않았겠습니까? 요한은 밤마다 요단 빈들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을 겁니다. 유성도 보았겠지요. 광야에서 듣는 바람소리는 도시에서 듣는 거와 다릅니다. , 안개, 벌레, , 그리고 야생동물들을 보면서 그는 죽음을 생각했을 겁니다.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사람들은 늘 죽음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힘을 받아들입니다. 인생을 인생답게 하는 것에 몰입합니다. 삶을 파괴하는 것들에 저항합니다. 주님의 길이 무엇인지를 뚫어보고 그것을 좌고우면 없이 선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여호와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 길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길에 대한 거룩한 상상력에 사로잡혔고, 세례 요한이 뒤를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거룩한 영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사야도 아니고 세례 요한도 아니니 주님의 길에 대한 열정과 희망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외침의 내용

고독한 자리이자 죽음에 직면하는 자리인 광야에서 외쳐야 할 메시지의 내용을 오늘 설교 본문 눅 3:5,6절이 전합니다. 이 내용도 누가복음 기자는 이사야의 선포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내용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별로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이 심오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진리는 오히려 단순하고 담백하고 명백합니다. 보십시오. 골짜기는 메워지고 굽은 길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고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시대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예수 시대에는 로마 제국에 의해서 삶이 왜곡되었습니다. 골짜기는 더 깊어지고, 산은 더 높아졌습니다. 이런 왜곡된 질서가 바로 잡히게 될 것이라는 거룩한 꿈이 바로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인 이사야와 요한에 의해서 선포된 것입니다. 이런 꿈은 오늘 우리에게 이어집니다.

우리는 늘 골짜기와 높은 산과 굽은 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높은 산은 점점 높아지고 골짜기는 점점 깊어집니다. 더불어서 함께 살아야한다는 생각보다는 각자도생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늘 경험하는 바입니다. 요즘 어투로 갑을관계가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좋아지지가 않습니다. 포용복지 정책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재 정부 들어서 오히려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제도를 고쳐도 사람들의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됩니다. 제주도에서 영리병원이 허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의 시대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태입니다. 그쪽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설립 이유는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긴 합니다.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외국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자는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이윤을 사회에 돌릴 수도 있긴 할 겁니다. 그러나 영리병원이라는 표현 자체가 형용모순입니다. 병원은 영리를 목표로 할 수 없는 기관입니다. 학교나 교회가 영리를 목표로 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대한민국의 모든 병원과 학교와 교회가 실제로는 영리를 목표로 하기에 제주도의 영리병원만 비판하기도 어렵습니다. 한두 개인이 이런 시대정신에 거슬러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림절을 맞는 기독교인들은 골짜기 메워지고 높은 산이 낮아지며 굽은 길이 곧아지는 세상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혀야하지 않겠습니까.

골짜기와 높은 산 이야기는 개인의 영적인 차원에도 해당됩니다. 사회문제는 늘 개인문제이기도 하고, 개인 문제는 사회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골짜기와 높은 산이 자리합니다. 자기에 대한 걱정도 많고 욕망도 많습니다. 자기에 대한 연민도 많고 세상을 향한 불평도 많습니다. 사회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영혼에도 참된 평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모두 인정할 겁니다. 이게 언제 가능할까요? 실제로 가능할까요? 헛된 꿈은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간절한 심정으로 그 날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을 낮출 수는 없습니다. 약간의 모양은 바꿀 수 있으나 근본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일상에서 그걸 경험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일입니다. 6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그 방법 역시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십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이사야를 거쳐서 세례 요한에게 이어졌고, 오늘 우리도 같은 신앙으로 삽니다.

놀랍게도, 다행스럽게도,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미일어났습니다. 신약성경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전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이나 아직 믿음이 성숙해지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깊은 골짜기와 높은 산이 많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손에 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극복되어야만 기독교 신앙이 성립됩니다. 가톨릭 신학자 오토 헤어만 페쉬는 하나인 믿음(분도출판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 기독교인들의 실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아무 것도 새로워진 것은 없다. 새로운 것은 오직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믿는 신앙에 기초를 둔 우리의 신뢰심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현존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은폐된 사건이다. 이렇게 은폐된 가운데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 은폐된 것이 현존하는 동시에 미래에 공공연히 자명하게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304). 그렇습니다. 은폐된 것이 자명하게 나타날 순간을 가리켜 우리는 예수의 강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강림을 향한 열망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열망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능력을 얻게 합니다. 그 능력은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자신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완성하셨다는 사실과 그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기에 세상살이에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는 버텨내기 어려운 일이 많다는 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새롭게 힘을 냅시다. 그리고 서로 힘을 보탭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시는 구원을 희망하고, 그 구원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3006
454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744
453 주현절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 (마 4:12-23) [4] 2014-01-26 11749
452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760
451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780
450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781
449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791
448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796
44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801
446 사순절 영원한 생수는 예수다! (요 4:5-26) [10] 2014-03-23 11817
445 주현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 24:12-18) [14] 2014-03-03 11818
444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826
443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829
442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831
441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843
440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859
439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881
438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2011-06-20 11882
437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910
436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11922
435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925
434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935
433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935
432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939
431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963
430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965
429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2024
428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2026
427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2035
426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2059
425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2060
424 사순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롬 4:1-5, 13-17) [5] 2014-03-16 12092
423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2111
422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2115
421 성령강림절 귀신 이야기 (눅 8:26-39) [43] 2016-06-19 12116
420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2139
419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2141
418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2148
417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156
416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164
415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241
414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250
413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302
412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312
411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315
410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10] 2016-05-15 12322
409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352
408 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11] 2007-06-03 12353
407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361
406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384
405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2398
404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402
403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419
402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438
401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445
400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2486
399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527
398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545
397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565
396 사순절 다윗과 여호와의 영 (삼상 16:1-13) [5] 2014-03-30 12570
395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576
39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590
393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590
392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591
391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608
390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618
389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621
3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626
387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627
386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656
385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661
384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667
383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674
382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692
381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699
380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705
379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739
378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757
377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767
376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772
375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804
374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804
373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806
37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813
371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824
370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829
369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841
368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847
367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872
366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881
365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893
364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906
363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914
362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920
361 성령강림절 닫힘과 열림 [21] 2009-09-21 12954
360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990
359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997
358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3010
357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3016
356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3017
355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303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