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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676 추천 수 0 2020.07.12 20:39:19
설교보기 : https://youtu.be/2SV6VQh-tj0 
성경본문 : 창세기 25:19-34 

에서와 야곱 이야기

25:19-34,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 2020712

 

 

에서와 야곱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이야기 중에 에서와 야곱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둘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에서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이삭이고 어머니는 리브가입니다. 당시 이삭의 나이는 환갑이었습니다. 산모 리브가의 나이도 상당했을 겁니다. 늙어서 낳은 자식은 더 귀한 법입니다.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은 쌍둥이지만 완전히 달랐습니다. 외모도 달랐고 성격도 달랐습니다. 형은 외향적이고, 동생은 내면적입니다. 에서는 사냥하러 산과 들로 돌아다녔고, 야곱은 집에서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내려오는 이삭의 대는 당연히 형인 에서가 이어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이 이어받았습니다.

야곱의 운명은 극적이었습니다. 야곱만이 아니라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의 운명도 대서사라 부를 만큼 대단했지만, 그중에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그에게 기원한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네 명의 여자에게서 낳은 열두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형성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두 곳입니다. 하나는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판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이 20년에 걸친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야곱이 20년 전 고향을 떠나게 된 이유는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펄펄 뛰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불같이 화를 낼 만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늙어 죽기 전에 장자에게 내려야 할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늙은 이삭이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게 한 사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창 27장에 나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일가를 이룬 뒤에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형이 자기를 용서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에서는 4백 명의 젊은이를 데리고 야곱을 맞으러 왔습니다. 야곱은 초긴장 상태에 떨어졌습니다. 만약 에서가 옛날에 당한 일에 앙심을 품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듯이, 야곱을 죽였다면 야곱의 운명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도 달라졌을 겁니다. 다행스럽게 에서는 동생을 형제애로 품어주었습니다. 야곱이 장자에게 내릴 축복권을 가로챈 사건이 벌어진 계기의 단초는 일종의 에피소드처럼 묘사된 팥죽 사건입니다. 팥죽 사건이 나비효과를 일으켜서 야곱의 운명과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바꾼 것입니다. 그게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팥죽 이야기

늙은 부모와 두 아들, 이렇게 네 명이 단란하게 살던 어느 날입니다. 동생 야곱은 평소처럼 어머니 리브가를 도와서 특식을 준비했습니다. 그 특식은 붉은색의 팥죽이었습니다. 냄새도 구수했겠지요. 마침 형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왔습니다. 그가 얼마나 피곤하고 배고팠을지 상상이 갑니다. 집에 들어서자 팥죽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습니다. 동생 야곱에게 팥죽을 빨리 달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들은 한 가족입니다. 한 사람은 집안일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바깥일을 했습니다. 주로 밖에서 활동하던 에서에게 야곱은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동생은 오빠가 일하다가 들어오면 오빠가 말하기 전에 먹고 마실 거리를 준비해놓아야 합니다. 에서가 사냥한 고기는 특히 아버지 이삭이 좋아했습니다. 어머니와 야곱도 고기를 먹었을 겁니다. 그들이 부리는 일꾼들도 고기를 좋아했겠지요. 에서는 집안일을 하던 야곱보다 더 열심히 가족을 위해서 일한 겁니다. 그날도 얼마나 야생동물을 사냥하느라고 식사 때를 놓쳤습니다. 이제 집에 들어왔으니 빨리 허기를 채워야 합니다. 야곱은 엉뚱한 말을 합니다. “형님, 팥죽을 드릴 테니 저에게 장자의 명분을 파십시오.”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말을 야곱이 했습니다. 에서가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 인마, 장난치지 말고 빨리 팥죽이나 가져와. 배고파 죽겠다.” 이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오늘 본문 32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말을 얼핏 들으면 야곱과 에서의 대화는 개그처럼 들립니다. 야곱의 요청도 장난처럼 들리고 에서의 대답도 그렇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팥죽 한 그릇으로 사거나 팔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에서와 야곱 중에서 누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르게 질문해야겠군요. 에서와 야곱 중에서 누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봐도 야곱의 잘못이 큽니다. 형의 배고픈 상태를 이용해서 장자의 명분을 손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인간성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정확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에서는 팥죽에 얽힌 에피소드를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죽을 때가 다가오자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에서가 축복 의식에 필요한 짐승을 잡으려고 사냥을 나간 틈을 이용해서 야곱이 축복을 가로챈 겁니다. 만화처럼 들리는 그 이야기가 창 27장에 매우 세부적으로 그려졌습니다. 거기서 핵심은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권을 얻어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잘못입니까? 야곱의 인간성이 정말 얄팍해 보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20년 후에 돌아올 때 형을 생각하면서 벌벌 떨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야곱 스스로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에서는 동생의 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대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왜 인간성 좋고, 형제애도 극진하고, 생활력도 강한 에서를 편들지 않고 술수에 능해 보이는, 별로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은 야곱을 편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합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의 대답에 무조건 동의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생각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과 다른, 훨씬 근원적인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33절과 34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이 에서의 치명적인 잘못이라는 게 창세기 기자의 가르침입니다. 에서의 인간성이 나쁜 게 아닙니다. 그는 불효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에서의 다른 단점을 짚지 않습니다. 다만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의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은 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만 짚습니다(26:34,35). 이방인 여자와의 결혼이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서 이집트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요셉 역시 이방인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더구나 에서의 결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완성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기에 더더욱 문제는 아닙니다. 에서를 향한 성경의 비판은 그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장자의 명분

성경의 이런 판단은 거꾸로 야곱이야말로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야곱의 인간 됨됨이를 보는 게 아닙니다. 그의 인간성은 에서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은 점이 없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얻은 뒤에 아버지마저 속인 인간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인간적 술수를 써서 외삼촌의 재산을 대부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 중에서 열한 번째인 요셉과 막내인 베냐민을 편애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야곱의 편애로 형제들 사이에 비극이 벌어집니다. 형들이 요셉을 거상에게 팔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야생동물에게 희생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이 야곱의 인생살이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못 볼 꼴 많이 보면서 한평생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구한 운명이 야곱 개인의 인생에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야곱 서사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야곱은 노년에 이집트로 가서 파라오 앞에 섰습니다. 파라오가 당신 나이가 어떻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마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야곱의 인생은 험악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에서와 달리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근거하여 야곱을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믿음의 가계에 올려놓았습니다. 지금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우리는 기도합니다. 성경의 이런 평가는 정당할까요?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아브라함부터 내려온 하나님 신앙전통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자신들을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 산다는 사실을 압축해서 말하면 장자의 명분입니다. 야곱이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으로 얻어냈다는 이야기는 형제간의 소꿉장난처럼 보이나 그 내면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어지는 선민사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선민사상에 근거하여 그들은 다른 민족을 배척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 사는 남녀노소를 전멸시켰습니다. 그들의 배타적인 선민사상으로 인해서 그들은 다른 민족에게서 미움을 받았습니다. 히틀러에 의한 아우슈비츠 대학살 사건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저는 유대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서 특별한 선하다거나 특별히 악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한 그들의 박해를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지난날 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서 받은 박해를 당연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선민사상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압니다.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서 그들이 지난 역사에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일으켰지만 그들의 선민사상이 위대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예수가 그들의 역사에서 출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인류 역사에서 그 어느 민족도 하지 못한 큰 역할을 한 겁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런 구원의 긴 역사 과정에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얻어낸 야곱 이야기가 삽화처럼 자리합니다.

 

소명의식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일종의 소명의식이라 할 수 있는 그 부르심을 야곱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에서처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소명의식,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소명의식,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바로 야곱처럼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소명의식을 오늘의 현실에서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서는 장자의 명분보다 팥죽이라는 실리가 더 높이 평가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분보다는 경제적 실리가 우리의 삶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에서의 투덜거림이 현대인의 가장 절실한 기도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신앙은 말 그대로 허울만 그럴듯한 명분에 떨어지고 실제로는 실리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이며, 예수의 제자라는 소명의식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영적인 공명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어릴 때 할머니에게 들었던 옛날이야기처럼 아련한 감흥만 불러일으키지 실제 삶의 능력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둘째, 소명의식과 관련해서 여러분과 저는 다음의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명의식, 또는 선민사상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에 걸맞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현실적인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이 왜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육 간에 모범적으로 살지 못하는지 답답합니다.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얻었으나 여전히 이기적이었고, 실수도 잦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인류 역사에서 오점을 많이 남겼듯이 말입니다. 우리도 야곱과 마찬가지입니다. 늙어 일생을 마칠 때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외칠지 모릅니다.

이런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몰두하였던 장자의 명분은 우리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소중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소명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소명의식이 씨앗처럼 남아 있다면 그 어떤 거친 인생살이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역사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발아하고 싹을 틔워 결실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 희망없이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른 셋째 말씀인 마 13장에는 씨가 떨어진 네 가지 땅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씨가 길가에, 돌밭에, 가시떨기에,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씨는 하늘나라 말씀입니다. 길가는 악한 자에게 말씀을 빼앗긴 사람이고, 돌밭은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어려움을 만나면 곧 넘어지는 사람이고,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의 결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고,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결실을 내는 사람입니다. 소명의식을 안고 산다는 것은 좋은 땅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당장은 다른 땅과 비슷해 보이나 씨가 떨어지고 때가 되면 본질에서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설교자로서 경제적 실리가 압도하는 이 현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으로 뚫고 나가라고 여러분에게 설교하기가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그게 생명의 길이니 다른 말씀은 전할 수가 없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즉 예수의 제자라는 소명의식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 소명의식이 우리의 영혼에 씨앗으로 남아 있는 한 여러분과 저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신비로운 구원 역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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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July 13, 2020
*.118.81.134

야곱을 죽였다면 야곱의 운명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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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3, 2020
*.182.156.135

예, 고쳐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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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베뢰아

July 13, 2020
*.76.41.248

팥죽이 경제적 실리로 해석되는게 확 다가옵니다.
장자의 명분은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소명의식이구요.
그리고 그 의식은 제 영혼에 씨앗으로 이미 뿌려졌음을 믿고,
잘 품고 귀하게 여기는 삶이 곧 좋은 땅을 준비하는 삶임을 배웁니다.

창세기와 마태복음의 연결이 참 흥미롭습니다.


열매 걱정할 것도 없고, 험악한 세월의 삶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의 길을 좀 더 유쾌하게 한 주만큼 걸어 갈수 있겠습니다.

이번 주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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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3, 2020
*.182.156.135

ㅎㅎ 베뢰아 님의 대글로 제가 오히려 은혜를 받는군요. 

"열매 걱정할 것도 없고 ....걸어갈 수 있겠습니다." 

실리를 넘어서 명분의 능력이 우리 모두의 영혼 안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이 분명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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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909
288 부활절 부활은 심판이다 [12] 2011-05-29 13913
287 성령강림절 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20] 2011-08-07 13949
286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976
285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978
284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985
283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4016
282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4023
281 창조절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 18:9-14) [8] 2013-10-27 14026
280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행 16:9-15) [9] 2016-05-01 14029
279 부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14] 2010-04-11 14042
278 성령강림절 악을 대하는 태도 [20] 2011-07-18 14046
277 기타 수군대는 사람들 2004-06-30 14057
276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4095
275 성령강림절 죽음, 삶, 하나님 file [13] 2010-11-07 14102
274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4162
273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2013-06-02 14165
272 성령강림절 말의 주체, 말의 능력 [10] 2009-08-24 14172
271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187
270 성령강림절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8] 2007-05-27 14239
269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240
268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242
267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1-14) [12] 2013-12-25 14286
266 부활절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12] [3] 2010-05-09 14298
265 성령강림절 아들을 바쳐라! [17] 2011-06-26 14302
264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2013-05-26 14350
26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라 [10] 2010-06-21 14351
262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357
261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롬 15:4-13) [10] 2013-12-08 14376
260 부활절 새 창조와 새 생명 [4] 2010-04-05 14379
259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380
258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4383
257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408
256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413
255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417
254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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