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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누가복음 3:7-17 |
성령 세례와 심판
(눅 3:7-17)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는 특이합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친척 지간이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도 곧 출가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요한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중복되기도 합니다. 죽음마저도 비슷합니다. 요한은 헤롯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했으며, 예수님은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양쪽 모두 30대 초반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세례 요한의 역할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40:3절 이하를 인용해서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사람입니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지는 것입니다. 빈부의 차이가 줄어들고,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차이가 없어집니다.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은 이런 세상을 이미 앞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 제시했습니다. 그 찬가는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부른 노래입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는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를 끌어내리고 비천한 자를 높이십니다. 굶주린 자를 배불리고, 부자를 빈손으로 보낸다고도 했습니다.(눅 1:46-56)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바로 이 메시지를 설교해야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
세례 요한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회개의 세례’입니다.(눅 3:3) 말과 생각에만 머물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겁니다.(눅 3:8)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설교입니다. 요한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기득권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으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안주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한 설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즉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지금 그것을 부정합니다. 이를 요즘 우리의 입장으로 바꿔 말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설교와 비슷합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의 긴급성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몰려드는 이스라엘 민중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먼 곳까지 찾아온 사람들인데, 다독거리면서 위로해 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심한 어조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민중들의 마음이 어떤지 전혀 개의치 않고 노골적으로 할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심판을 피할 생각으로 세례를 받고 싶어 하지만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도끼를 휘둘러 나무뿌리를 잘라내서, 불에 던지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도 없고 여유도 없으니 공연히 요령을 피우지 말라는 겁니다.
종교적 기득권의 해체와 심판의 긴급성 앞에서 민중들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 3:10) 요한은 눅 3:11-14절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1) 부자들을 향해서, 여유 있는 옷과 먹을 것을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합니다. 2) 세무 관리들을 향해서, 정당한 세금을 징수하라고 합니다. 3) 군인들을 향해서, 공권력으로 남의 재산을 강탈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소유를 독점하지 말라. 둘째, 양심을 속이지 말라. 셋째,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
사실 요한의 이런 설교는 특별한 건 아닙니다.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교가 잊혀졌다는 겁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런 주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안일에 도취해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개혁과 혁명의 시절이 아닌 때에는 모두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사람의 본성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자기만을 위한 생존법칙이 극단에 달하면, 일종의 정글의 법칙인데,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위기를 미리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입니다. 지진이 날 때 먼저 알아차리는 동물들이 있듯이 영적 촉수가 예민한 예언자들이 그런 위기에 아주 영민한 이들이었습니다. 요한이 바로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는 지난 날 예언자들이 외쳤던 정의와 평화를 다시 삶의 중심 주제로 끌어들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울림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설교에 동의하든지 않든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한의 설교가 그대로 실행된다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바로 그리스도인가, 하는 궁금증과 또한 그랬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야 할 그리스도인가?”
물세례, 불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직접 “아니오.”라고 대답하지는 않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부정했습니다. 그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능력이 더 큰 이가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올 능력이 큰 이의 신발 끈을 풀만한 깜냥도 되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7:18 절 이하)과 마태복음(11:2 절 이하)에 따르면 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도 직접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대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즉 치유와 축귀 등을 전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으신 이사야 61:1 절 이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눅 4:18,19) 즉 그리스도가 행할 구원의 현실들이 예수님에게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몇 성경 구절과 신학적인 근거에서 볼 때 당시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경쟁 관계였다는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요한이 직접 다퉜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문제로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 분분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다, 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하는 주장들이 서로 오갔습니다. 오죽했으면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의 역사를 담고 있는 사도행전에도 세례 요한을 추종하던 사람들이 남아 있었겠습니까.(행 19:1-6)
사람들이 예수님과 요한을 혼동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 나라를, 그의 통치를 똑같이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사태를 분명하게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요한은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의 설교가 아무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둘을 평면에 놓고 비교할 수 없는 이유는 존재론적 토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물의 세례로, 예수님의 세례를 성령의 세례로, 즉 불의 세례로 규정할 수 있었습니다.
물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무엇이 다를까요? 왜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는 걸까요? 이걸 설명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이건 겉으로 확 표시가 나는 게 아닙니다. 양쪽 모두 새로운 삶을 향한 전환이라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입니다. 길을 곧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길을 곧게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주님의 일이고 그를 통해서 일어나는 구원론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소유의 독점, 양심의 기만, 권력 남용을 막는 일은 바로 요한의 설교이기도 하고, 동시에 주님의 설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하나의 선을 그어놓고 요한의 일과 주님의 일을 경계 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요한과 비슷한 설교를 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세례와 불세례는 삶의 형식이 아니라 삶의 질에서 갈립니다. 이 차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요한의 제자로 사는 것이나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휴머니스트로 사는 것이나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그 차이를 봅시다.
세례 요한이 행한 물세례는 외부적인 강요에 그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법질서를 바르게 세워나가는 작업입니다. 개인의 양심에 불을 지피는 일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사람들에게 불을 토하듯이 설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양심이 찔렸겠지요.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결단을 했겠지요. 이런 정도의 변화만 온다 하더라도 썩 괜찮은 세상이 될 겁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뭔가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 같지만 다시 불의한 세상으로 돌아갈 겁니다. 양심이 살아 있는 지도자를 만나면 조금 정신을 차리다가 구태의연한 지도자를 만나면 다시 양심을 포기합니다. 양심이 살아날 때만 잠시 반짝이다가 다시 그렇고 그런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세상살이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심층적인 차원에서 오는 생명의 요구라는 사실에 그 특성이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바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도 역시 생명의 세계와 연결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그런 세계가 우리에게 실현되었다고 하더라도 참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는 물의 세례, 회개의 세례가 가장 잘 갖추어진 공동체는 가족입니다. 가족 사이에는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부당한 세금을 걷는 일이나 공권력으로 강탈하는 일도 없습니다. 가족 공동체에서 참된 생명을 경험하시나요? 거기서 참된 만족이 가능한가요? 상대적으로 만족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으로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수도승들이 출가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참된 생명, 즉 영생은 사람의 능력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어집니다. 그것은 창조자에게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준비하고 있다가 주어질 때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은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성령 세례는 곧 불세례라고도 합니다. 물은 씻는 능력이지만 불은 변화의 능력입니다. 불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물세례는 삶의 형식이 바뀌는 거지만 불세례는 삶의 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으로 삶의 자리가 질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물세례를 도덕적 변화라고 한다면 불세례는 존재론적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변화를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현대신학자 폴 틸리히의 용어를 빌리면 ‘new being’, 즉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전에 자기가 자랑하고 의존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빌 3:8) 했습니다. 절대적인 것 앞에서는 모든 게 상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으니, 바울의 표현은 아주 정확한 겁니다.
심판, 생명의 완성
물세례는 실증적인데 반해서 불세례에 대한 저의 설명은 관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들리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불세례를 통해서 얻게 될 그 참된 생명이 아직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참된 생명과 그렇지 않을 것을 확연하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구별한다고 해도 생명 아닌 것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구별은, 그리고 거짓 생명의 완전한 제거는 마지막 심판에서 일어납니다. 그 마지막 심판의 주인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하실 일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
혹시 쭉정이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으신가요? 공연한 걱정입니다. 만약 우리가 쭉정이라면 불에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구원입니다. 쭉정이가 곳간에 가면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안의 쭉정이를 불에 태우는 게 구원이 아닌가요? 쭉정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기쁨의 메시지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기다림이 끝납니다. 심판은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구원이고 은총입니다. 생명의 완성인 부활이 현실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 때가 와야 우리는 생명의 알곡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을 약속으로 받는 것이 성령세례이며, 불세례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살겠다는 분명한 이해와 결단이 선다면 여러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마지막 심판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잠정적인 생명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불안합니다. 불평등합니다.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전히 외롭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여기서 그 주님의 길을, 그 생명의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준비는 세례 요한의 물세례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소유를 독점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양심의 소리에 민감하게 살아가십시오. 공권력을, 사회적 지위를 남용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참된 생명이 완성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십시오.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대림절 셋째 주일, 2009.12.13.)
참믿음 님,
좋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저도 그걸 모두 부정하는 게 아니랍니다.
그것 이면의 세계까지 보자는 말씀이지요.
기독교 교리는 참믿음 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요롭답니다.
생각해보세요.
창조와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잘못 믿었다는 사실로,
또는 여러 사정으로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로
일정한 사람들을 영원한 고통 가운데 몰아넣으신다는 주장이
논리적일까요?
지옥, 음부 등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않은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신학적 메타포(은유)에요.
창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그 창조의 완성을
설레임으로 기다려 봅시다.
목사님의 설교 말미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준비해야하는 것은
세례요한의 물세례라고 하신 것에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않았습니다.
생명의 완성을 약속으로 받는 것이 성령세례라고 하셨는데
그 약속을 사모하고 받은 자로서 물세례를 준비한다는 것이
생명에 대한 점진적인 의미에서 후퇴하는 모양새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이해하기로는
'물세례는 생명을 바라보도록 하는 세례이고, 인간이 베풀 수 있는 세례이다.
불세례는 생명을 얻는 세례이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세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생명을 향하게 하는
요한의 물세례의 삶을 살아야한다..' 입니다.
쭉정이와 알곡 비유에서는
제가 알곡도 아니지만 쭉정이만도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에
인간 개체 하나마다 곡식 한알로 보기보다는
한 개체 안에 쭉정이적인 것을 제거함으로
생명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로 인해
현실의 불평등, 자유롭지 못함, 고독...이런 것들이
인간에게 아니, 생명 얻는 약속을 받은 자에게도 있는 것이라는
진심어린 토로가 있다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또한, 심판과 종말이 고통과 암흙으로 뒤덮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빛, 완전한 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라는 것이 감사합니다.
이 땅의 교회들에서는 인간의 삶에 기본적으로 드리워진 것들을
부인하고 백색 칠을 할 것이 아니며,
저렇게 환한 빛의 심판과 종말을
암흑같이 흑색으로 칠해도 안되어야할 것입니다.
감사드리며...
한국교회에 참된 세례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회정의와 투쟁을 외치는 진보적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가까운 물세례를
영혼구원을 외치는 보수적 그리스도교는 감성을 울리는 열광주의적 불세례만을 강조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회정의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열정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존재, 변화 라는 말들을 저는 아직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진보적 그리스도교에 속해있으면서, 사회의 어두운면과 불의를 발견하였고,
사회악과 싸우며 희망을 건설해 나가는 삶의 변화가 "새로운 존재", "변화"로 이해되었거든요..
글쎄요.. 목사님의 설교를 매주 듣고있습니다만
생명이니 종말 이니 하는 말들이 아직까지는 어렵네요..
어려서부터 굳어진 신앙적 고정관념을 하루아침에 풀기란 정말 힘든것 같습니다.
알곡과 쭉정이 비유를 기쁨의 메시지로? 어휴 정말 그렇게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러다 그게 아니면.....
하기야 상관없네요 쭉정이라고 그렇게 자책하면서도 뭐 별로 바뀐것도 없었고 어차피 불에 태워질거
기왕이면 기쁨으로 그 순간을 기다리는게 훨씬 낳겠는데요 오우! 이렇게 쿨한 결론이^^
앞으로 다비아에서 목사님에게서 발견하게될 신앙적 자유함은 과연 어디까지 일지... 더불어 자유함과
신앙적(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속에서 스스로 어떤 균형을 찾게 될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행여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아님 길을 찾지 못해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면서 아직은 어색하지만 전에 없던 자유함속에 주님 탄생하심을 기쁨으로 기다려봅니다.
어제 아내가 목사님의 댓글들을 보면서
평소에는 잘 안보는데 요즘 시간적 여유가 있었서 그런지 몰라도
예전 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사고의 폭도 넓고, 교회 자매들과의 주중 교제에도 열심히 참석하여
좋은 나눔을 하고 밤늦게(?) 돌아옵니다.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인데...
아내가 목사님의 댓글 응답들을 보며서
목사님 댓글 어록을 만들어 봐도 되겠다고 하네요.
삶과 영혼의 일치에서 우러러 나오는 말들이
어느 것 하나 그냥 스쳐 지난가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은 정말 추운 날씨네요.
추운 날씨가 우리 영혼을 맑게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늘 강건하시기를.....기도합니다.
목사님!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멋진 성탄 선물인걸요.
책 읽기가 밀려가네요.
요즘 김선주의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공감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분 성향 자체가 많이 편향적인듯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비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만
역시 배움이 모자라 한계를 느끼곤 합니다.
지난 주간에 홍성사의 '손양원'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아마 김선주는 그 책에 등장하는 손양원 목사의 '아홉 가지 감사' 마저도
얼마든지 비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다 읽어 가지만 마음이 영 무겁네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 가져보기도 무척 오랫만입니다.
새해 건강하세요.
즐거운 성탄 되시구요.
왜냐하면 가슴의 도전없이 머리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관념만 깊어져 갈 뿐이겠지요?
함께 엉켜 싸우며 무너지며 부숴지며 살면서
역대에 파괴된 우리들의 죄의 참상을 보면서
죽는 그날까지 휴전이 없는 실제상황의 생의 터전에서 죽어가는 사랑하는 전우들속에서
날마다 아군이 교란되어 적군으로 덮쳐오는 현실속에서
날마다 스스로 다시 살아나 해결할 수없는 자아라는 것속에서
발 디딜곳없는 고난의 좁은 길보다는 관념이라는 쉬운 함정속으로 숨겨지기 쉬운 우리들 엉터리 인생들입니다.
바로 옆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길을 잃어 상처투성이의 영혼들이 허다하게 쓰러져 있는 현실속에서,
오늘도 닭이 세번 우는 소리에 슬피 울었던 베드로의 울음속에 숨어 함께 목놓아 웁니다...
우리의 상하고 통회하는 이 마음을 받아주실 주님이 날마다 날마다 필요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는 이 삶의 내용과 도전으로 마지막날까지 나아가는 것이겠지요.
이 깊은 구도자들의 자리에 저같은 평신도가 가꾸 끼어들어가게 됨은
정목사님 영성의 흡수력(?) 때문일까요?
목사님의 말씀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숨결속으로 저를 다듬어가는 수업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저같은 연마되지않은 평신도를 잘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럴겁니다. 아마도 그게 맞을 겁니다. 관념적인 신앙, 과연 그것의 가치는...
예수님도, 사도들도, 그리고 중세시대 자신이 소유한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모두 다 처분해서
불우한 이웃들에 돌리고 자신은 고행길 수도원의 수도사로 들어간 신앙의 선대들도,
모두들 처절한 실천의 삶을 살으신 분들이지요.
그런데, 나는 왜 그러한 삶을 살기를 결단할 수 없는 것인지.
아브라함의 자식 바침을 늘상 설교하고 들으면서도 왜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인지.
내가, 혹은 지금 이 시대 우리가, 과연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벌써 몇번째 말하지만 제 고향 친구는 시골에 홀어머니도 계신데 부부가 함께 아프리카로 선교 떠났습니다.
"이웃(내가 그 딱한 사정을 알 수 있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내 양을 돌보라" 그게
예수 믿는 표식이니라. 나더러 "주여! 주여!"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한다고 예수믿는 것은 아니다. 라는 신앙적
大명제 앞에서 그 친구는 바야흐로 확실히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오늘 내 앞에 큰바위얼굴이 되어 나타난 겁니다.
주여! 저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진상광님은 목사님이시군요?
반갑지만 부끄럽습니다. 저같은 바닥에서 헤매는 이에게 가슴을 열어주시다니...
이 사랑이 어찌 주님의 임재가 아니겠습니까.
아흔 아홉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아가는 주님을 향한 애통이 있다면
우리들이 어디에서 사역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심정으로 주님이 주시는 도전에 순종하느냐가 아닐까요...
삶의 바닥이 얼마나 복된 곳인지를 경험하고 누려보지 못한분과는 나눌 수조차 없음은 ..
주님과 우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겠지요..
우리의 본능이 요구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속에는 바로 우리가 말 못할 수치를 면케해주시는 것도 숨겨져 있는 것같았어요.
삶의 어떤 진상도 허상도 어떤고통도 희락도 고여 모여드는 곳.. 아래로 아래로..자신과 삶을 깍아내려가는 곳
사랑이 벅차오르는 그 깊은 곳에서는 이웃을 품어주는 길외에는 길이없기에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자신의 숨겨진 처참안 가인의 후예같은 시퍼런 상을 볼 수있기에, 십자가의 도전에서 자신과의 싸움만이 있으므로 나보다 이웃을 높이는 체질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파워풀한 섭리일까요?
저의 어설픈 신앙의 고백들은 주님께만 드릴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자꾸만 메달려 가네요. 부끄럽습니다.
sunshinetj 님! 부끄럽다니요?
만약, S.님이 부끄러우시다면 저는 아예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판입니다.
정 그렇다면, 좋습니다. 주님은 분명 떳떳한 자를 끌어 내리시고 부끄러운 자를 찾아 높이실 겁니다.
바로 그러한 느낌이, 나이 먹고 뒤늦게 철들게 된 근래의 제 신앙의 어떤 양태인 것 같습니다.
화려한 무더기 꽃보다는 작고 가냘프고 가련하게 핀 한 송이 꽃이 더 아름답고 진실된 것이라는, 마치
숨겨진 비밀과도 같은 그러한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을 향하여 목마르고 애타는 자에게 자꾸만 뭘 알게 만들어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우리의 가녀린 삶들을 편들고 계십니다!
쭉정이라면 불에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구원이라는 말씀은 정말 파격적입니다.
그런데 알곡-쭉정이 이원론을 아예 "모든 사람이 알곡과 쭉정이의 성격을 둘 다 갖고 있다"고 바꾸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불세례를 '질적 변화'를 넘어서 '소멸'의 의미로 보면 어떨까요?
성령세례를 통해 종말론적 생명이 들어온 후, 그 외의 현실적 요소들을 전부 해체시키는 소멸로서 말입니다.
세례 요한이 만약 당시의 설교를 오늘날 똑같이 행한다면 청교도적인 규범론자에 지나지 않겠죠?
물세례는 결국 불세례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게 만드는 역할이었겠네요.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설교 현장에서 숨이 벅차면서도, 왠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한 알의 모래에 우주론적인 깊이가 있듯이, 숨결로 엮어진 한마디의 언어에 성령론적인 깊이가 있다는 것.
목사님의 하이데거 해설을 읽으면서 요즘 느끼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