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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현실

사순절 조회 수 13870 추천 수 82 2008.03.02 17: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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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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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3.2. 눅 4:16-21

고향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고향인 나사렛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유명한 일화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이 일화를 전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누가복음이 가장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안식일을 맞아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두루마리 한권을 받아들고 한 곳을 직접 읽으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사야 61:1,2(58:6)절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예수님이 교회에서 설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었는데, 회당장은 그곳에 모인 사람 중에 랍비가 있으면 그에게 그런 일을 부탁했습니다. 예수님도 랍비라는 칭호를 받으셨으니까 말씀을 전할 수 있었겠지요.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칭찬하고 설교에 탄복했다고 합니다.(눅 4:22) 그 장면이 상상이 갑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오랜 만에 돌아온 청년이 감동적인 설교를 했으니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예수님이 이렇게 환영만 받았다면 이 이야기는 특별한 의미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는 차원에서만 보았습니다. 요셉이 누굽니까? 자신들과 똑같은 이웃 사람입니다. 아주 평범한 목수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요셉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예수님도 특별한 인물이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친구가 랍비처럼 설교를 했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들의 기분이 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나쁠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에 얽힌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사와 이방인 나아만 장군 이야기입니다. 오랜 가뭄에 시달리던 사렙다 땅의 과부는 엘리사를 통해서 굶주림을 면했습니다. 이방인 나아만도 엘리사를 통해서 천형인 나병을 치료받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구약의 인물 중에서 초자연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들입니다. 그들에 관해서 유대인들은 아무런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당시 정통 유대인들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시당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절벽에서 떠밀어내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알만 합니다.
유대의 정통주의자들에게 무시당할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서 본문에 이미 나왔습니다. 오늘 말씀 눅 4:18,19절을 읽겠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십시오. 가난한 이,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놓인 자리는 바로 예수님이 자신을 반대한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언급하신 사렙다 과부 및 이방인 나아만의 자리와 똑같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삶에서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런 사명을 이어받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사회적 약자를 교회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돕든 않든 상관없이 교회는 꾸준히 이런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입장을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한 신학운동이 지난 20세기 후반부에 강력하게 일어났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민중신학입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당파성(Parteichlichkeit)을 그 신학적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편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3세계의 민주화와 노동 해방을 위해서 전심전력으로 투쟁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하나님 나라 운동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사회 구조를 개혁해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당파성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일부의 사람들만 편애하실 리가 있나요? 그냥 쉽게 이야기해서, 여기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가난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들을 수도 없다면, 그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도 어긋나는 일이겠지요. 어떤 사람이 눈이 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해방과 자유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각성
오늘 본문이 유독 가난한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에 주님의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열거된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한 사람,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의 특성은 무엇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영적 각성입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파수꾼을 보십시오. 그는 새벽이 동터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다는 예수님의 비유도 역시 이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이런 간절한 기다림과 직결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부자와 건강한 사람과 똑똑한 사람들의 특성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는 것에만 신경을 쓸 뿐입니다. 앞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으로 변화하기를 바라지만, 뒤의 사람들은 이미 자기에게 주어진 것, 소유한 것을 유지하기만을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또한 무엇으로 간절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현대인들의 특성은 이런 간절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돌아갑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치열하게 돌아가는지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고 말입니다. 눈에 쌍심지를 키고 살아가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치원 교육부터 대학교육, 삶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잘 보십시오. 그것이 참된 변화를 향한 열망인지, 아니면 자신이 성취한 것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욕망인지를 말입니다. 후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강렬해도 참된 간절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향한 강력한 요구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선포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건강한 자가 아니라 눈먼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다는 오늘 본문은 바로 위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무엇을 강렬하게 열망하는 사람의 영적인 눈에만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건 그렇게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천사가 우리에게 와서 “당신은 이제 눈을 뜨게 될 것이오.” 말했다고 합시다. 우리처럼 눈이 멀쩡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결코 구원의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하게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그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귀찮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 사실을 지켜내기 위해서 배수진을 치고 유대-기독교와 투쟁했습니다. 율법적인 업적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에게 인정받는다는 바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인격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눈에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마지막 심판에서 목사를 판단하는 기준이 목회의 성과가 아니라 단순히 믿음뿐이라고 한다면, 누가 그걸 더 좋아하겠습니까? 큰 목회로 인해서 자랑거리가 많은 목사인지, 아니면 그런 게 전혀 없는 목사인지,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사람, 눈먼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된다는 것은 자기의 소유와 업적이 전혀 없어서 다른 곳으로부터의 도움만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사람만 하나님의 구원에 마음을 연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뜬구름 잡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저는 요즘 다비아 서울오프 모임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서울에 갑니다. 서울역 앞에는 노숙자들이 있습니다. 대낮에도 술 취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간혹 그분들을 보면서 참으로 자유를 만끽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죽었다 깨도 그런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이 자유라고 한다면 저보다는 그분들이 구원에 더 가까이 다가간 분들이겠지요. 제가 노숙자가 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니까 접고, 가능한 경우를 생각해보지요. 제가 말기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고 합시다. 아마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어하겠지요. 그러나 차츰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만약 내가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건강한 사람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구원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더 확실하게 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지금 너무 건강하고, 소유한 게 상대적으로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구원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는지요.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모두 노숙자로 살거나 불치병 환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분들에게 일어나는 어떤 정신적인 현상이 바로 기독교 영성과 비슷하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업적과 소유에서 자유로워질 때 그것을 뛰어넘어 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고, 결국 그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구원의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업적과 소유를 잘 포기하지 못한다는 엄정한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부둥켜안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우리의 이런 근본적인 한계를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주목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 이 성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이 자리”는 바로 예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이사야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현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작은 성취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원의 현실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합니다. 어제 밤에 제 딸들에게 오늘 설교를 요약해서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질문하더군요. 이사야가 말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느냐고 말입니다. 눈먼 자가 지금 당장 눈을 뜨게 되었나요? 예수님이 지금 설교하신 나사렛 회당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일어났다고 말했다면 어딘가 잘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향한 간절함이 시작되었다면 이사야의 예언이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습니다.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들어도, 하나님의 구원이 아직은 완전하게 일어난 건 아니지 않느냐, 하고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건 아닙니다. 뜰 수도 있지만 그게 늘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건 아닙니다. 살아가는 환경조건이 모두 급격하게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언젠가는 일어나게 됩니다. 아니, 그런 것보다 더 큰 일들이 일어납니다. 눈먼 자가 보게 되는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종말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생명을 향한 간절함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영적인 통찰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이사야가 예언한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시시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며, 얼마나 큰 은총인지 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에게는 이미 현재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사건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에게까지 전승해준 2천 년 전의 누가 공동체와 더불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에게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맡기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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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March 02, 2008
*.7.141.122

목사님...감사 합니다.
설교시간에 맨날 비유만 듣다가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눈물이 막 막 나옵니다.
그래서 막막 눈물을 흘리면서 듣습니다/
지금 막막 배가 고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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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백수광부

March 02, 2008
*.255.30.46

목사님, 감사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에게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맡기고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지만 간절하게 가슴에 와닿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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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삶에서..

March 02, 2008
*.106.177.89

목사님 설교를 들을 땐 정말 절로 아멘소리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그게 제게 작은 문제를 안겨다 줍니다.
기존의 설교를 전하시는 분들의 설교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제게 기쁨이면서 괴로움입니다.ㅠㅠ
주님의 자비를 구해야겠지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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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김창용

March 03, 2008
*.251.70.193

진리의 말씀 감사 드립니다.
profile

[레벨:13]하늘바람

March 03, 2008
*.129.222.134

"우리처럼 눈이 멀쩡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결코 구원의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하게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그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귀찮습니다."
작년 서울오프 모임에서 목사님께서 "성경에 주님께서 종말의 때에 다시 온다고 하셨는데, 세상 살기가 좀 괜찮고 넉넉한 사람들은 과연 주님이 오시는 것을 간절히 기다릴까 아니면 좀 천천히 오셔도 되고, 안 오셔도 된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뼈있는 농담을 하셨던게 생각납니다.
설교 말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라는 말씀을 가슴에 깊이 담고 정목사님과 다비아 식구들과 순례의 길을 계속 가겠습니다.

1,2월 서울오프시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 했는데 이번 3월에는 꼭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해 하지도 않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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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ldg

March 03, 2008
*.255.54.254

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저에게는 절실하거든요
귀한 말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8]김재남

March 03, 2008
*.185.234.25

귀한 말씀 오늘도 감사합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 그들에게도 자유와 해방은 필요한것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치 않은 자,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 구원이 귀찮은 자...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해방과 자유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무얼 말할 수 있을까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며, 해서는 안될 일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소망, 구원을 경험케해주시는 눈이 뜨여지기를...

1년정도 다비아를 통해 많은 분들의 글을 읽고있습니다.
신학강좌를 통해 추천해주신 해석학 책들과도 친숙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별로 달가워하시는 것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얼마전 한기연서적 세일기간을 통해서 얻게 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책들도 읽어보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보이고 있는 교회가 눈에 들어오면 올수록,
어째 설교시간이 아닌 '삶의 자리' 속에서 듣게 되는 그 분의 음성 가운데 눈물을 훔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원의 현실입니다'라는 글귀가 말을 걸어오네요.
계시에 대해서, 언어가 말을 걸어오는 것에 대해서, 음악이 들려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언제쯤 밖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학생들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나눌 수 없을까요?
기다림인가요, 혹은 그 의도와 목적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그 '하나님 나라'가 말을 걸때까지 기다려야하는건가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이 말씀이 '우리'속에서 울려퍼지기를 기다립니다.

귀한 말씀,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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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4, 2008
*.150.14.168

대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설교를 비롯해서 교회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사실,
즉 구원의 현실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구원의 현실이 우리의 능력 밖에 있으며,
종말론적 차원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기도,
인식하기도,
경험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또는 까다롭기 때문에
자신이 생산해내는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여기서 인식이 까다롭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지식이 많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식은 우리의 사유를 열어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굳어지게도 만드는 경향이 있거든요.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껴도 좋습니다.
어떤 이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통 기독교 자체를 매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요.
만약 정통 기독교에 근본적인 하자가 있다면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더 큰 하자가 있습니다.
이런 말이 독단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을 찾기가 힘들군요.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천착한 구원의 현실들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걸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들이랍니다.
위의 몇분이 눈물이 난다고 하셨는데,
설교자인 저보다 훨씬 더 깊은 영성에 들어가신 분들이군요.
저도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 그 미래를 생각할 때
가장 큰 감격이 밀려듭니다.
그것의 극치가 눈물일지 모르겠군요.
모든 분들께 좋은 밤!
profile

[레벨:8]김재남

March 05, 2008
*.185.234.25

"구원의 현실,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경험하고, 나누어야 할 터인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다른차원'-종말론적인 성격을 이제야 조금씩 느껴가며,
그 까다로움에 부딪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또 다시 묻게 됩니다.
2천여년의 시간이 일구어 논 구원의 현실을 오늘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 나가야할지 말입니다.
인문학적 소양쌓기가 실마리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종말론적 성격을 또 한번 깨닫게 되는 것 이외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그래도 공부해야겠죠.

교회를 보며, 나의 교회를 보며... 잠시나마 '기업'을 떠올리게 된 것이 가슴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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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 성령강림절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다! file [5] 2010-09-20 14856
827 성령강림절 신앙과 위선 (눅 13:10-17) [6] 2013-08-25 14853
826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840
825 성령강림절 상을 받는다는 것 (마 10:40-42) [11] 2014-06-29 14836
824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832
823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815
822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99
821 부활절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벧전 5:6-11) [15] 2011-06-07 14798
820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47
819 창조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10] 2013-11-04 14729
818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723
817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717
816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18] 2009-07-06 14708
815 사순절 아브람의 거룩한 두려움 [8] 2010-03-01 14649
814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644
813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641
812 성령강림절 재물과 하나님 나라 [22] 2009-10-19 14619
811 대림절 영적 각성 [19] 2007-12-02 14614
810 사순절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6-11) [6] 2014-04-07 14569
809 성령강림절 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16] 2016-06-05 14565
808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563
807 창조절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10] 2013-10-21 14526
806 성령강림절 다리 저는 야곱 [10] 2011-07-31 14511
805 성령강림절 성령경험과 구원경험 [2] 2010-05-23 14498
804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480
803 기타 신앙의 외면과 내면 (빌 2:14~18) [1] 2004-06-30 14459
80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438
801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4430
800 기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2] 2004-06-30 14421
799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418
798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79
797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372
796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369
795 부활절 새 창조와 새 생명 [4] 2010-04-05 14344
794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343
79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라 [10] 2010-06-21 14325
792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317
791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2013-05-26 14277
790 부활절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12] [3] 2010-05-09 14272
789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롬 15:4-13) [10] 2013-12-08 14267
788 성령강림절 아들을 바쳐라! [17] 2011-06-26 14267
787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4239
786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216
785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1-14) [12] 2013-12-25 14193
784 성령강림절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8] 2007-05-27 14187
783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162
782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144
781 성령강림절 말의 주체, 말의 능력 [10] 2009-08-24 14139
780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2013-06-02 14089
779 성령강림절 죽음, 삶, 하나님 file [13] 2010-11-07 14082
778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4078
777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4069
776 성령강림절 악을 대하는 태도 [20] 2011-07-18 14018
775 부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14] 2010-04-11 14018
774 기타 수군대는 사람들 2004-06-30 14011
773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987
772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행 16:9-15) [9] 2016-05-01 13985
771 창조절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 18:9-14) [8] 2013-10-27 13968
770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966
769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953
768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920
767 성령강림절 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20] 2011-08-07 13915
766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898
765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72
»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70
763 부활절 부활은 심판이다 [12] 2011-05-29 13863
762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3831
761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829
760 성탄절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 (히 2:10-18) [14] 2013-12-29 13809
759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808
758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795
757 성령강림절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file [9] 2010-11-14 13783
756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73
755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752
754 대림절 임마누엘은 예수다 (사 7:10-16) [8] 2013-12-22 13743
753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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