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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기타 조회 수 10466 추천 수 37 2005.07.17 23:49:24
성경본문 : 창세기 28:10-22 
2005. 7.17.        
창  28:10-22
야곱의 두려움

야곱의 꿈
요즘도 부모의 상속 문제로 인해서 형제들 사이에 소송이 걸린다거나 심한 경우에는 칼부림이 나듯이 쌍둥이 형제 에사오와 야곱 사이에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곱과 어머니 리브가는 아버지 이삭과 형 에사오를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마땅히 받아야할 장자의 권리를 빼앗긴 에사오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만 하면 동생을 죽여 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동생에게 속은 게 분해서 홧김에 그런 말을 떠벌리고 다닌 것 같은데, 이 말이 어머니 리브가에게 들어갔습니다. 자칫하면 카인이 아벨을 죽였듯이 다시 형제 살해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리브가는 야곱을 오빠가 살고 있는 하란으로 피신보내기로 했습니다. 그 핑계는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지 않고, 친정 식구 중의 한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순진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말을 곧이듣고 그 일을 허락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해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10,11절). 브엘세바는 가나안 지역 중에서도 남쪽 끝단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북쪽 방향으로 가나안을 통과해서 하란까지 도달하려면 최소한 두 주일은 걸리는 여행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아마 브엘세바에서 출발한 후 2,3일 정도 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도를 보면 벧엘은 브엘세바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인데, 예루살렘 근처입니다.
이 민담을 읽는 독자들은 현재 야곱의 심리 상태가 어땠으리라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야곱의 나이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쌍둥이 형 에사오가 이미 장가들었다는 걸 보면 최소한 10대 후반은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사냥을 좋아하던 형 에사오와는 달리 어머니 리브가의 치마폭에 싸여 집안일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였습니다. 아버지 이삭보다는 어미니 리브가가 훨씬 많은 주도권을 행사하던 집안에서 그 어머니의 편애를 받고 자란 야곱에게 혼자 떠나는 여행이 얼마나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을는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 억압 상태에 빠지면 꿈이 많은 법입니다. 거친 광야에서 하룻밤 지내는 야곱도 꿈을 꾸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은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상상하실 수 있겠지요? 고대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인간이 신과 소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잉카 문명의 유적지에도 이런 제단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높은 탑을 쌓아놓고 그곳에 이르는 층계가 설계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 층계를 통해서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자신들의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야곱의 꿈은 계속됩니다. 야훼께서 나타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13-15절).
야훼 하나님이 야곱에게 내린 축복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내린 축복과 같습니다. 처음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은 ‘약속’, 또는 ‘계약’의 의미였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 야훼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땅과 후손을 풍부하게 내려주겠다는 약속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이런 축복의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고대의 모든 민족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땅과 사람은 바로 한 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이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신과의 관계를 이런 방식으로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문
꿈에서 깬 야곱은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문이로구나.”(17절). 아침에 일찍 일어난 야곱은 베고 자던 돌을 일으켜 세워 석상을 삼고 기름을 붓고는, 원래 루즈라고 불리던 그곳을 ‘벧엘’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벧엘이라는 단어의 뜻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아모스 5:4,5과 예레미야 48:13에서는 벧엘이 신의 이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창세기가 기록될 때의 벧엘은 길갈이나 세겜과 마찬가지로 매우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성지로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창세기를 읽는 독자들은 벧엘이 자신들의 조상인 야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을 겁니다. 이는 곧 우리나라의 마니산이 단군 설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 민담을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벧엘을 성지로 생각했다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성지는 무언가 특별한 기운이 솟아나고 의미가 있는 장소로 각인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대인들은 하늘과 소통될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구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성지에 가면 자신도 무언가 거룩한 기운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들도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나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고 정기적으로 순례길을 떠납니다.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신자들은 오체투지의 방식으로 몇 달, 또는 몇 년에 걸친 라사 순례를 일생의 숙원으로 삼을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벧엘은 이렇게 매우 특별한 종교적 의미가 있는 장소였습니다.
야곱의 꿈이 무엇이기에 벧엘을 ‘하늘문’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요? 야곱의 꿈에는 땅에서 하늘에 닿은 층계와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이 등장했습니다. 성서 기자는 이 장면을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천사들의 모양이나 층계의 모양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실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단지 그림으로 아득하게 높은 곳까지 층계를 그려 넣을 수는 있겠지만 그 높은 곳을 하늘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우주물리학적 의미에서의 하늘과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습니다. 지구의 대기권을 넘기만 하면 그곳에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동서남북도 없습니다. 무한하게 넓은 공간만이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지금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늘은 이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야훼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또한 야훼가 야곱 옆에 나타나서 말씀하셨다는 보도도 역시 어떤 사실적인 모습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지진이나 화산 폭발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로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엘모의 불’ 현상을 하나님의 임재로 경험했습니다. 그 어떤 모습으로도 형상화할 수 없는 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아무 근거로 없이 야훼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한 것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무슨 근거로 그곳을 ‘하늘문’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야곱이 무언가 분명한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하늘에 닿은 층계와 하늘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여러분은 이 성서텍스트가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왔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야곱 민담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구전의 방식으로 통해서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이런 구전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후대 사람들의 해석이 첨가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것 자체가 변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늘 새롭게 해석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의 장소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지인 벧엘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야곱 사건과 후기 역사의 해석이 연결된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텍스트를 읽는 우리는 일단 이렇게 입장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고향에서 사고치고 하란으로 도피하는 중간에 결정적인 하나님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에게서 사랑받을 만큼 괜찮은 인물이 아니었지만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그에게 하늘문을 발견한 것과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의 경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삶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17절). 야곱의 꿈처럼 우리가 실제로 하늘문을 발견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지금까지의 모든 세계관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바로 이 두려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흡사 빛마저 끌어들이는 블랙홀처럼 모든 것의 궁극적인 토대인 그 존재 앞에서 우리는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가 규정하고 범주화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뛰어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이 빛보다 빠른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한다고 합시다. 그가 태양계를 벗어나 은하수를 누비고, 여러 성운 사이를 여행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것보다 더 큰 충격입니다.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뛰어넘는 세계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반론을 펼칠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경험은 진정한 하나님 경험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철학적인 경험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말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기본으로 제시하고 있는 그 ‘케리그마’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문답의 차원에서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초기 원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사건 앞에서 기본적인 케리그마에만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지만 기독교 신앙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발생했던 구원 사건의 심층으로 들어가야만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부활’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우리는 여전히 생명의 본질에 관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아는 게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 생명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두려워질 뿐이지 우리에게 명확하게 잡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옳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렇게 절대적인 생명 앞에서 경험하는 두려움이라고 말입니다. 두려움의 경험이 곧 하나님 경험입니다. 두려움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두려움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유를 보십시오. 그는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16절). 야곱은 가족이 있는 브엘세바에서만 야훼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을 일정한 장소와 직결시키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낯선 씨족이나 부족들과 끊임없이 생존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자신들의 터전을 떠나지 않는 걸 신상에 좋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가족, 브엘세바라는 한정된 범주 안에서만 삶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던 야곱이 완전히 낯선 곳에서도 역시 자기의 생명의 유지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얼마나 큰 변화이며,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삶의 과정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단지 가족과 자기 자신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데서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생명의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두려움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교회만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에서 훨씬 넓은 세계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신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두려움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충격과 두려움을 피하고 자기에게 익숙한 경험 안에 안주하기만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진정한 하나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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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1032
558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1021
557 창조절 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 4:4-9) [15] 2013-11-18 11020
55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80
555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964
554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64
553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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