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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기타 조회 수 9621 추천 수 35 2004.07.11 23:50:38
성경본문 : 열왕기하 2:7-14 
2004. 7.11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왕하 2:7-14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유난히 긴밀한 사람들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이스라엘에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 백성들과 왕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라는 명칭 때문에 점쟁이들처럼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는 사람쯤으로 생각하면 그들을 잘못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선포의 핵심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사회정의를 세워나가라는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사회정의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그 문제가 같이 돌아가는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때로는 신체적 위협이나 생존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왕과 귀족의 탐욕을 지적하면서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워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들과 똑같은 예언자이면서도 약간 성격을 달리 합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이들도 우상을 섬기는 왕들과 투쟁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예언자 전통에 있기는 하지만 사회 정의에 대한 직접적인 설교를 하는 것보다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을 수호하는 일에 더 큰 무게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와 엘리사에게는 기적 설화가 많이 따라다닙니다.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 우상의 능력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적 사건보다 더 효율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도 역시 그런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불말과 불수레
흡사 헬라의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처럼 엘리야도 구약의 역사에서는 가장 카리스마가 강한 예언자였습니다. 우상을 섬긴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황실 예언자 450 명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황소 두 마리를 제단에 올려놓고 자기가 섬기는 신의 능력으로 그 황소를 태우는 경쟁이었습니다. 왕상 18장을 읽어보신 분들은 엘리야의 승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전승된 엘리야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엘리야도 결국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카리스마가 따라다닙니다. 웬만하면 늙어서, 또는 병들어 죽을 때가 된 사람은 편안하게 누워서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게 정상인데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은 특별했습니다. 2장 앞부분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혼자 죽을 장소를 찾아서, 또는 제자에게 임무를 넘겨주기 위해 길을 떠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인 엘리사는 스승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반복해서 말합니다. "결코 안 됩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절대로 스승님과 헤어질 수는 없습니다." 스승의 죽음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죽으려고 하는 엘리야가 야속했는지, 또는 자기가 엘리야의 뒤를 이을 만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판단이 든 까닭인지 모르지만, 엘리사는 엘리야를 놓치지 않고 계속 따라 다니다가 요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겉옷을 벗어 말아 가지고 그것으로 요단강 물을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이 두 사람, 죽으려고 작심한 스승 엘리야와 그 운명을 막아보려는 제자 엘리사는 갈라진 강을 마른 땅처럼 밟고 건넜습니다. 강을 건너면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이제 나를 데려 가실 터인데, 내가 자네를 두고 떠나기 전에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는가? 말해 보게."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되자 엘리사는 더 이상 엘리야의 죽음을 거부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남기실 영검에서 두 몫을 물려주십시오." 영검은 영어로 spirit, 독일어로 Geist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영감'으로 번역된 반면에 공동번역에는 '영검'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대충 영적인 능력이라고 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엘리사가 두 몫을 달라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 엘리야의 카리스마를 익히 보아왔던 엘리사로서는 그런 카리스마에 관심이 많았을지도 모르고, 또는 스승의 일을 감당해야 할 자기의 처지의 절박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 갑자기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나서((11절), 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졸지에 벌어진 이 광경을 쳐다보면서 엘리사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지키던 병거여, 기병이여 .. "(12절). 이제 엘리야는 엘리사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구약의 인물 중에서 이 땅에서 정상적으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을 에녹과 엘리야로 생각합니다.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믿을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수천 년 전에 고대인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그 실상을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성서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안 되고, 어쩌면 그래야만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원한다면 그런 요소들을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는 실제로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일까요? 따라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이 세상에 와야 한다고 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이 옳은 것일까요?
구약학자들의 설명을 짧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불말과 불수레 다음에 등장하는 회오리바람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말은 회오리바람이 자연 현상인 것처럼 불말과 불수레 역시 자연 현상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한 요단강 동쪽의 열풍을 동반한 회오리바람을 불말과 불수레로 표현한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합리적인 이러한 해석과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던 병거여, 기병이여..."라는 엘리사의 외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불말과 불수레는 엘리야에 대한 칭호인 '병거와 기병'의 회화적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또는 말은 고대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제의용 짐승이었다는 점에서 이 엘리야 전승의 토착화 과정에서 그 이전의 태양 제의전설과 혼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구약의 다른 전승과 연결시키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래 불은 하나님의 현현 장면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요소라는 점에서(출 3:2, 24:17, 사 30:27, 합 3:3-5, 신 33:2) 불말과 불수레를 통해서 엘리야의 카리스마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
엘리야가 사라지자 그 현실을 받아들인 엘리사는 자기의 겉옷을 찢어 버렸습니다. 화가 났는지, 불안한 마음의 표현인지, 아니면 그 당시 죽음 앞에서 행하던 관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엘리사는 대신 엘리야가 떨어뜨린 겉옷을 집어들고 왔던 길을 뒤돌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요단강에 이르자 스승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쳤지만 물이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떠난 다음에 제자 엘리사가 처음 시도한 기적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실패 앞에서 느꼈을 엘리사의 좌절감을 우리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승의 카리스마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차에 처음 시도한 이 일이 실패하고 말았으니 당연히 참담한 심정이 된 엘리사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스승의 카리스마가 자기에게 이어지지 않은 것일까? 나에게 그럴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것일까? 스승의 일들을 앞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나에게 문제란 말인가?
엘리사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렇게 외치면서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다시 내리쳤습니다. "엘리야의 하느님 야훼여, 어디 계십니까?"(14절). 그러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고, 엘리사는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놀라운 신적인 능력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제 엘리사도 명실상부한 예언자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현상의 물리적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어 엘리사에게 발생한 이런 놀라운 카리스마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가 핵심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엘리사는 요단강을 가르기 위해서 두 번 시도했습니다. 두 번의 시도에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같은 점은 엘리야의 겉옷이고, 다른 점은 두 번째 시도에서 엘리사가 이렇게 외쳤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의 하느님 야훼여, 어디 계십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런 놀라운 신적 카리스마가 일어날 수 있었던 힘은 엘리야의 겉옷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어떤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몇몇 영웅을 기리거나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야훼만을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사람을 지나치게 의지하거나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씁니다. 엘리야는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지만 엘리사가 그의 겉옷이라고 붙잡으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의지하고 싶어합니다. 오빠부대로 나서는 소녀들이 스타의 손수건이나 물건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영웅을 만들고 싶어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영웅을 만든 다음에 그 대상을 자기 삶의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흡사 엘리야의 카리스마에 집착해서 결국 그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를 수 있다고 생각했듯이 말입니다.
엘리야의 옷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가 바로 요단강을 갈라지게 할 수 있는 힘들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강이 갈라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그런 물리적 현상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생명의 깊은 세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모두 해명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는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가 일으키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웅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 야훼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영웅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우리에게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놀라운 생명과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려면 사람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오는 게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오십니다. 그 역사에 바르게 참여한 사람들이 바로 영웅들이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정확하게 배우고 그 전통을 이어가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 생명 사건은 이런 역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참여하면 오늘 본문에서 요단강이 갈라진 것 같은 생명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런 구원의 세계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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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54
46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953
459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52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947
457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39
456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906
455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99
454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92
453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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