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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과 화 (눅 6:17-26)

주현절 조회 수 10806 추천 수 0 2019.02.17 21:20:53
설교듣기 : https://youtu.be/fehIi1XBn-0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누가복음 6:17-26 

복과 화

누가복음 6:17-26, 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 20192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이나 책에서 그런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자기 내면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기도 합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하게 느낀다고 해서 실제로 행복한 것도 아니고, 행복하지 않게 느낀다고 해서 실제로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행복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똑같은 조건인데도 어떤 사람은 행복으로 느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불행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목사에게는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당신은 목회를 통해서 행복을 경험하십니까?’ 일반 사람들이나 목사나 마찬가지로 행복에 대한 생각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상투적인 행복의 조건에 예속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예수님도 소위 행복론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로마 철학자 세네카처럼 인생론을 펼치는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유명한 팔복이 그것입니다. 5:1-12절에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삼은 누가복음에는 네 가지 복이 나열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네 가지 화도 보충되었습니다. 복과 화가 대칭 형식으로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다음의 네 종류입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박해받는 자입니다. 거꾸로 화 있는 사람은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 받는 자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행복관과 반대됩니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될까요? 아니면 믿음 생활로 인해서 받는 어려움을 잘 견디라는 덕담일까요?

 

1) 가난한 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20). 거꾸로 부자에게 화가 임하는 이유는 그들이 위로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24). 현대인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비웃을지 모릅니다. 화를 받아도 좋으니 부자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대부분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자로 살아야 한다는 확신과 욕망에서 나옵니다. 국제관계도 똑같은 원리도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금 부자 나라는 모두 화를 당한 겁니다. 교회에서도 역시 부자 교인은 화를 당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성경의 가르침을 무력화시키는 상황입니다.

가난 자체가 복은 물론 아닙니다. 가난은 일상을 파괴하기에 우리는 가난에 저항해야합니다. 가난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가난은 부를 의지하지 않게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가난하면 더 돈에 매달리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게 자본주의 속성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현대사회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가 모두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가난이 자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에 의존할 수 있게 하기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우선 돈이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돈은 좋은 집과 자동차와 자녀 교육과 취미생활 등, 우리의 일상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긴 합니다. 그러나 윤택하게 사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다 지나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실감할 수 있도록 목회를 예로 들어야겠습니다. 우리교회는 가난합니다. 교회당도 없고, 빌린 교회당 공간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부자 교회에 비해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행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떤 교회 신자들보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배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진작 교회의 모든 에너지를 예배당 준비에 사용했을 겁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실제 삶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요한 자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는 말이 정곡을 찌릅니다. 부자는 돈이 주는 위로를 이미 받은 겁니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온갖 편의를 맛보았습니다. 그런 위로에 적응이 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위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돈이 주는 위로를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적당하게 받고, 죽으면 천국 가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안 됩니다. 이미 돈의 위로에 길들여진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기대하는 것처럼 흉내를 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돈의 위로에 길들여진 개인이나 사회는 불행합니다. 삶의 수단에 불과한 것을 절대화함으로써 삶의 본질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 이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합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수도사들입니다. 우리가 수도사들처럼 살 수는 없으나 수도사들의 영성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억지로 되는 않습니다. 특히 자본이 신처럼 숭배 받는 사회에서는 꿈꾸기도 힘듭니다.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화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2) 주린 자

두 번째 복 있는 사람은 주린 자입니다. 굶주림도 가난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지난 127일 주현절 후 3주의 설교 본문은 눅 4:16-21절이었습니다. 그 본문에는 사 61:1절 이하가 인용되었습니다. 이사야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성령이 자기에게 임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 뒤로 나오는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는 다 가난한 자의 범주에 속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은 주린 자에게도 임합니다. 그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지금 배부른 사람은 화를 당합니다. 그들이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삶의 실제 경험에 근거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밥을 충분히 먹지 못하면 배가 고픕니다. 배고픈 것은 참기 힘듭니다. 역설적으로 배고픈 거를 모르면 배부름도 모릅니다. 밥맛을 절실하게 느끼려면 굶는 게 최선입니다. 요즘 티브이에서 소위 먹방(먹는 방송) 프로그램이 많이 나옵니다. 개인 유튜브 방송만이 아니라 지상파 방송에도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먹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먹는 행위가 일종의 연예 오락으로 떨어지는 현상입니다. 로마 시대 귀족들은 향연을 열고 산해진미를 마음껏 먹었습니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옆방에 가서 먹은 거 다 토해내고 다시 돌아와서 먹었다고 합니다. 모든 귀족들이 그런 방식으로 살지는 않았겠지만 로마 시대가 먹는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던 시대였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참된 의미에서 배부름을 얻지는 못합니다. 더 먹어야겠다는 욕망만 자극할 뿐입니다. 그것이 곧 굶주림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학자들은 이런 먹방 프로그램을 음식 포르노라고 부릅니다.

본문이 말하는 주린 자는 실제로 먹을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혼의 만족을 굶주린 사람처럼 갈망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혼의 갈증을 느낍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갈증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부지런하게 뭔가를 생산하고 성취하고 재미있는 것을 찾아다닙니다. 일상에 매몰되는 것으로 영혼의 갈증을 외면합니다. 인생이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배부르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헛배가 부른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느껴서 근본적인 것을 구하고 찾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기대합니다. 이런 사람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생명의 영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린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옳습니다.

 

3) 우는 자

세 번째 복 있는 사람은 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울다가 웃게 된 사람은 복 있는 것이고, 웃다가 울게 된 사람은 화를 당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떨어진 사람을 불행하게 여기고, 웃는 상황에 놓인 사람을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저도 울면서 살기는 싫습니다. 교우들도 우는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행 자체가 행복일 수 없고, 행복 자체가 불행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울 수밖에 없는 일은 찾아옵니다. 자기가 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족이 당하거나 이웃이 당하면 자신이 당하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문제는 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계속 머물지 않고 벗어나는 순간을 실제로 희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예를 들면 좋을까요. 가족이 먼저 세상을 뜰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실연도 울만한 일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눈물이 납니다. 가장 큰 슬픔은 자식을 잃는 참척입니다. 고통의 나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울다가 지칩니다. 정신이 들면 다시 울게 됩니다. 이런 운명에 떨어진 사람을 향해서 앞으로 웃게 될 터이니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습니다. 꺼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옆에서 지켜보고 그런 슬픔에 동참할 뿐입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아야겠지만 인생살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절망적이라고 여기겠지만, 그런 이들에게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차원에서 삶의 기쁨을 경험하는 일이 앞으로 일어납니다. 늘 웃는 일만 경험한 사람은 웬만큼 좋은 일에는 웃지도 않겠지만 나락으로 떨어져서 울어본 사람은 아주 작은 것에도 웃을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이기에 지금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4) 박해받는 자

네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박해받는 자입니다. 네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복입니다. 앞의 세 가지는 간단하게 묘사되었지만 네 번째 복은 길게 설명됩니다. 이것이 앞의 모든 복을 총괄하는 것이라고 봐도 됩니다. 여기에 바로 당시 기독교인의 실존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2, 23절을 읽겠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 문장도 앞의 문장과 마찬가지로 마카리오이 ...’로 시작됩니다. 마카리오이의 원형인 마카리오스는 영어로 blessed(복 받은)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 뒤에 나오는 사람에게 복이 있으라.’는 문장입니다. 복은 구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에 당시 기독교인의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악하다 저주하고 버린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왕따를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한 운명이기도 합니다. 이런 운명에 떨어지면 누구나 절망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이런 운명이 구약 선지자들에게 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26절에는 화가 임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유대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환호한 이유는 선지자들이 대중들의 귀에 달콤한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 잘 된다고,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솔깃한 말을 외친 선지자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기복주의 신앙을 외치는 교회에 신자들이 몰리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반대 입장을 취했던 하나냐 선지자가 대표적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무조건 배척당하는 게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배척당하는 이유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세상이 개혁되고 새로워지는 걸 반대하느라 배척당한다면 그건 부끄러운 것입니다.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폄하하고 북한 정권을 무조건 매도하는 기독교인들을 세상이 비난합니다. 이슬람교를 혐오하고 동성애자들을 혐오합니다. 이런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심지어 진화론을 부정하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정상적으로 바라볼 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좋은 게 아니라 무식한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입을 다물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나 하고 있는 게 낫습니다. 이런 일들로 무시당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경우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받은 박해는 예수님의 십자가 운명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유는 기존의 종교 절대 권력과 정치 절대 권력에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오래 내려온 율법 전통을 절대화함으로써 인간 삶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대교 고위층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주장입니다. 제자들은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함으로써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 인근의 지하묘지인 카타콤에 숨기도 했습니다.

인자인 예수로 인해서 박해를 받는 이들을 향해서 본문은 기뻐하고 뛰놀라.’고 격려합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에게 해당되는 하늘의 상은 나중에 받는 게 아니라 이미 여기에 은폐의 방식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이미 여기서 기뻐하고 뛰놀 정도로 큰 상을 받았습니다. 선지자의 영성으로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상이 무언지 압니다. 세상의 칭찬은 멀리하고 하나님의 칭찬에 귀를 기울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칭찬은 오히려 우리 영혼을 위축시킵니다. 하나님의 칭찬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 역시 죽을 몸이지만 부활을 희망하는 사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수 있으니, 그것 자체가 이미 큰 상을 받은 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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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쿠키

February 20, 2019
*.123.87.233

십자가가 역설이고 비밀인 것 처럼
'복과 화' 도 역설이고 비밀입니다.
나의 주님이 이런 '복과 화'를 선포하심이 오늘 따라 더욱 뜨거운 감사가 솟구칩니다. 정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평안과 안식을 주시네요.
칭찬을 받는 자에게 화가 있다는 말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내 삶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제가 좋아하고 경험한 고후 6장 10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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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0, 2019
*.182.156.135

'칭찬'에 좌우되지 않으려면 인간의 칭찬에 개입된 허위의식을 알고,

하나님의 칭찬으로 인한 삶의 능력을 알아야겠지요.

오늘 수요공부에서 읽은 말씀 중에서 이와 연관된 인상 깊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고전 4:3)

자신의 판단에서도 벗어났다니, 대한한 영성이지요?

하나님에게 완전히 의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저도 바울처럼 내가 나를 판단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기는 한데,

갈 길이 멀다는 것만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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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February 21, 2019
*.151.83.22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가 복 받은사람이고 가난한자는 그렇지 못하다고 여기지요.

오랫동안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목사님 말씀을 통하여

이것은 세상이 정한 판단기준 이란것을 알았습니다.  

부요한자는 부로써 이미 위로를 받았으므로

부를 최고의 가치로 두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필요로 하지 않을것이고,

하나님 나라는 생명에 천착하는 삶의 태도로서

돈으로 살수없는 것을 주므로 가난한자의 것이 되는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저희것이 된 가난한자가 복 받은 사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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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1, 2019
*.182.156.135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파격적입니다.

부요한 자에게 화가 임한다고 하잖아요.

사람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하는 돈에

완전히 의존하는 거니까 화가 임하는 거겠지요.

이게 젊은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에요.

가난을 미화하는 거는 아니고,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부자 기독교인들도 기본적으로는 가난하다는 생각으로 살면 되겠지요.

재화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돈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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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522
509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17
508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505
507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99
506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464
505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51
504 부활절 사랑함이 사랑받음이다. (요 14:15-21) [14] 2014-05-25 10441
503 주현절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5] 2014-02-16 10434
502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429
501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426
500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424
499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420
49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417
497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404
496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387
495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381
494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349
493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10327
492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300
491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94
490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278
489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253
488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253
487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219
486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219
485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205
484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76
483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165
482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152
481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47
480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120
479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19
478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118
477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66
476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10062
475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54
47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10051
473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10045
472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37
471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10034
470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10031
469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10028
468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10020
467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10008
466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10000
465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99
464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96
463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94
462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983
461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952
460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51
459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49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945
457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35
456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902
455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97
454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889
453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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