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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부활절 조회 수 1823 추천 수 0 2023.04.30 18:28:00
설교보기 : https://youtu.be/6vJKNeZPe3I 
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2:18~25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부활절 넷째 주일, 2023430

 

 

저는 설교 준비를 위해서 해당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종종 짠한 마음이 듭니다. 그 본문을 쓴 사람과 독자들이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이 저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노예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권면이 오늘 설교 본문(벧전 2:18~15)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벧전 2:1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사환들아로 번역된 헬라어 οκέται(οκέτης의 복수 호격)를 영어 성경은 servant라고 번역했고, 우리말 <공동번역><새번역>하인으로 번역했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의 느낌을 확실하게 살리려면 종이나 노예라고 번역하는 게 낫습니다. 당시에 집안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지거나 자연재해 등으로 종으로 팔린 사람이 있고, 전쟁 포로로 잡혀 와서 노예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수많은 전쟁을 벌이면서 포로를 노예로 부렸습니다. 로마의 건축물이나 도로 건설을 비롯한 로마 문명이 작동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큰 부분을 이 포로 노예들이 감당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구약성경에도 언급될 정도로 노예 문제가 광범위한 현상이었습니다.

 

노예 그리스도인들에게

초기 교회 구성원 중에서 이런 노예 계급에 속한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유는 모든 사람이 신분의 차별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메시지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대립하는 두 세계에 걸쳐 있었습니다. 한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평등한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 질서 안에서 겪는 불평등한 세계입니다. 교회에 왔을 때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었으나 교회 밖에서는 노예 신세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흑인 노예 제도가 살아있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 시대에도 도망간 노예(오네시모, 1:8 이하)가 있었고, 도망 중에 체포당해서 모진 매를 맞거나 죽은 노예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소상하게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은 노예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듯이 노예 주인에게서 도망가라고 권고해야 할까요, 노예 주인의 부당한 행위에 강력하게 저항하라고 부추겨야 할까요, 아니면 천국에 희망을 두고 참고 살아야 한다고 달래야 할까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 의해 모질고 잔혹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대표적 황제는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입니다. 네로는 기원후 64년에 일어난 로마 대화재 사건으로 인해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려고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기원후 90년대에 황제 숭배를 그리스도인들이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맹수와 싸우게 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베드로전서의 집필 연대를 특정하기는 어려우나 네로나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 숫자도 얼마 안 되었고, 구성원 중에서 사회적으로 내로라할만한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중간 이하 계층이 많았고, 그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예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교회는 당시에 왕따를 당했습니다. 작은 돛단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한 적은 무리의 사람들이 어두운 밤에 거센 풍랑과 맞서는 형국입니다.

위에서 읽은 벧전 2:18절과 이어지는 구절을 포함하여 설교 본문 전체를 오늘의 관점에만 보면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노골적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관용이 있는 주인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하라고 말입니다. 19절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으라고 말합니다. 좋은 대우를 못 받는 건 둘째 치고 부당한 대우를 참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20절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화가 날 만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조롱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들어보십시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가 됩니까? 어느 목사가 이런 구절을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그대로 설교한다면 미쳤다는 말을 들을지 모릅니다. 악덕 기업가가 어떤 행패를 부려도 저항하지 말고 참으면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라거나, 또는 잔소리가 심하고 화를 자주 내는 남편에게 말대꾸하지 말고 참고 견디는 게 그리스도인 아내로서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는 걸까요?

저는 앞에서 고대에는 노예 제도가 일반적 현상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노예를 물건처럼 사고팔고 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은 노예에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방법 자체가 없었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기원전 1세기 검투사였던 스파르타쿠스가 벌인 노예 전쟁처럼 무력을 통한 방법뿐이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시대의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지 모르나 그 전쟁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고, 결과적으로 노예 해방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일상적인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분쟁이 종종 일어납니다. 대화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으면 최선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시시비비를 따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칫하면 폭력 사태로 번지고, 아주 극단적이면 목숨까지 위태로워집니다. 이럴 때 참아야 할까요, 아니면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싸워서 승리해야 할까요?

마틴 루터 시대에, 우리나라의 동학혁명처럼 농민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작했으나 날이 갈수록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두 사람 사이에 의견이 갈렸습니다. 토마스 뮌처는 교회가 앞장서서 끝까지 농민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틴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 편을 들다가 농민들이 과격해지자 영주 편을 들었습니다. 루터가 그렇게 태도를 바꾼 이유는 분명합니다. 무정부 상태보다는 악한 질서라도 유지되는 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학 개념이 루터의 그 유명한 두 왕국론’(Zweireichlehre)입니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당시 로마 정권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드러난 롬 13:1~7절을 따른 것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를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3:1) 바울이나 루터가 당시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적당하게 타협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정말 소중한 부분을 세상의 시시비비로 잃지 않는 삶의 태도가 지혜롭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부부가 서로 자존심 싸움이나 말다툼에 휘말려서 멋진 봄날과 햇살과 기도와 찬송을 잃어버린다면 상대방을 굴복시켰다 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정말 유익한 게 무엇인지를 아는지, 그걸 경험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 21절 이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이 되셨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 화가 난 사람은 베드로의 이런 말을 들으면 화가 더 치솟을지 모릅니다. 지금 분하고 억울하고 자존심 상해서 죽을 지경인데, 그리고 우리가 예수도 아닌데 예수처럼 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살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도 없으려니와, 예수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비유로 말씀드린 것처럼 부부 싸움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더라도 봄날이 주는 삶의 환희를 경험하면 그런 싸움으로 삶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베드로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범하지도 않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할 수 없이 모욕당하셨습니다. 자기가 당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23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을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δικαίως)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산헤드린 종교 재판과 빌라도 총독의 정치 재판에서 예수님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피고인이 재판에서 자기를 변론하듯이 예수께서도 자신에게 덧씌워진 신성모독과 사회 소요죄가 부당하다고 따질 수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리고 인류를 구원할 소명이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하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짚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예수 스스로 할 수 없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예수께서 침묵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젖먹이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자신을 완전히 맡긴 겁니다.

이런 말씀도 흔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우리가 경험한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일을 당했는데도 침묵하면 세상에서 더 무시당하고,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억울하게 당해도 무조건 참고 견디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모든 걸 맡겨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싸울 때는 싸워야겠지요. 직장에서도 어필할 때는 어필해야 합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노력으로 세상과 자기의 삶이 정의롭게 바뀔 수도 있고, 때로는 그 모든 노력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궁극적인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거나 실행할 능력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외치면서도 정의롭지 못할 수 있고, 사랑을 베풀면서도 교만할 수 있는 아주 특이한 존재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능력을 손에 넣고 싶다는 욕망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자기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로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인 줄 아시냐?”라는 말로 하나님께 따지듯이 존속 살인을 변명한 가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우리와 적대하고 있는 북한이 불의하면 얼마나 불의하고 지금 우리나라 정부가 몰빵하듯이 다가가는 미국이 정의로우면 얼마나 정의롭겠습니까. 교회 밖의 사람들이 세속적이면 얼마나 세속적이고,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거룩하면 얼마나 거룩하겠습니까. 기성세대가 구태의연하면 얼마나 구태의연하고 젊은이들의 생각이 신선하면 얼마나 신선하겠습니까.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으로 정의와 평화를 붙들고 투쟁하면서 살되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만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은 놀랍게도 그 공의로운 심판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합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말이 되나요? 이는 한 마디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ἁμαρτία)에 대하여 죽고 의(δικαιοσύνῃ)에 대하여 살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 두 용어는 로마서의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롬 3:2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Θεοῦ)니 차별이 없느니라.” 대단한 통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미쳤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형제가 싸웠습니다. 동생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동생은 분해서 씩씩거립니다. 그들의 싸움을 본 아버지가 나중에 둘째에게 내가 보기에 네가 잘못한 게 없더라. 네가 옳았어.’라고 말해줬습니다. 이제 동생은 더는 기분 나빠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원수를 갚을까 하고 기회를 엿보느라 삶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근본에서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나음을 얻음’(ἰάθητε, you have been healed)은 요즘 표현으로 힐링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우리가 악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의미합니다. 거기서 근본적인 치유가 발생합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내셨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움이 너무나 놀랍고 찬란해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람은 자신이 심판받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만 살던 사람이 빛과 색깔이 있는 동굴 밖을 봐야만 그제야 자신이 어둠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동굴 밖의 빛을 어느 정도 맛본 우리는 그 빛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죄에 대하여 죽고, (디카이오수네)에 대하여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를 실감할 수 있도록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말하는 분이 계실까요? 더는 저도 모르고, 더 말해도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은 못 합니다. 일단 빛이 들어오는 동굴 입구를 향해서 돌아서야 하는데, 완전히 반대 방향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빛은 비현실입니다. 동굴 벽에 비친 자기 그림자만 현실입니다. 눈만 뜨면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 버는 일에만 마음을 고정한 사람에게는 봄날과 꽃과 찬송 소리가 비현실인 거와 같습니다. 동굴 입구를 향하다가 다시 반대를 향하면서 오락가락하는 분들을 위해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디카이오수네 데우는 우리 인생을 완성하려고 수고하지 않아도 이미 완성되었다는 (폭탄)선언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우리는 얼마든지 숨을 쉴 수 있고, ‘살아있음의 환희를 만끽할 수 있고, 기도하며 찬송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예 계급의 그리스도인과 비슷한 처지에서도 힐링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살이에서 이것 외에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더 얻으면 영혼의 만족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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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3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434
972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487
971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473
970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304
969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808
968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505
967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443
966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504
965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230
964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559
963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274
962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093
961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652
960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748
959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794
958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614
957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146
956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744
955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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