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성령강림절 조회 수 2228 추천 수 0 2023.06.11 18:36:17
설교보기 : https://youtu.be/Y27TaIpc3M4 
성경본문 : 창세기 12:1~9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12:1~9, 성령강림후 둘째 주일, 2023611

 

 

하나님의 부르심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족장 시대를 연 아브라함은 유일신 종교라 일컬어지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신앙인의 표상으로 인정받는 인물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75세에 하란에서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았고 175세에 가나안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소명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창 12:1절 이하에 나옵니다. 첫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름을 바꾸기 이전이라서 아직은 아브람으로 불리지만, 우리는 편의상 그냥 아브라함으로 부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지명)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로 알려진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위치하고, 하란은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 중간에는 그 유명한 바벨론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부산과 대구와 안동이 똑같이 낙동강을 끼고 있듯이 세 도시가 유프라테스강을 끼고 있습니다. 데라가 아브라함을 비롯한 몇몇 가족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까지 온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대목에 압축적으로 나옵니다. 데라의 가계도는 조금 복잡합니다.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나홀, 하란(인명)입니다. 나홀은 자기 동생인 하란의 딸, 즉 조카 밀가와 결혼했습니다. 하란은 밀가를 비롯한 이스가와 롯을 낳고 젊어서 죽었습니다. 데라는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 손자 롯만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205세에 죽었다고 합니다. 데라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고 창 12장부터는 아브라함의 서사가 파노라마처럼 25장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들은 순간에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까 무조건 순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갈대아 우르는 매력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도시였습니다. 지금의 뉴욕이나 런던이나 베를린이나 서울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런 도시는 물적 토대도 단단하고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도 선두를 달리기에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볼거리도 많아지고 먹을거리도 다양해지며 취미활동의 기회도 많아집니다. 요즘 대도시에 카페, 고급 식당, 병원, 대형마트, 미장원, 안마시술소, 사우나, 헬스장, 무도장, 술집, 연극과 영화관 등등이 즐비하듯이 말입니다. 갈대아 우르도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삶을 즐길 수 있는 매력이 차고 넘치는 문명 도시였습니다.

문명화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일종의 종교 현상에 가깝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표면적으로 종교라고 하지 않으나 삶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종교적입니다. 일례로 대형마트나 초현대식 백화점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건물은 대형 교회당과 비슷한 기능을 감당합니다. 고객은 거기서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실컷 구경하고 손에 넣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도 있고, 무료하거나 허무한 삶에서 해방될 수도 있습니다. 일 년에 오천만 원 이상을 구매하는 부자 고객만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를 여는 백화점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행위가 일종의 구원입니다. 자기가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는다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말씀은 나는 자연인이다는 프로그램에서 보듯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이 아브라함의 소명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말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대하게라는 말이 아주 솔깃하게 들립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서사를 보면 그가 가나안에서 상당한 재력을 자랑하는 토호(土豪) 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거 같습니다. 개인 병사를 318(14:14)이나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더구나 역사가 흘러서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똑같이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으니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합니다. 미국에 이민 간 교포가 사업에 성공하거나 정치에 성공해서 ‘TIME’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여 표지 사진에 올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었다거나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물은 어디에나 흔합니다. 성경은 그런 인물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로 경험하고 그 부르심에 최초로 응답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야말로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소명 경험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 명령을, 그 약속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 본문은 그것에 관한 설명이 일절 없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12:4)라는 표현만 나옵니다. 성경은 늘 소명 경험을 간략하게 보도합니다. 모세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소명 경험에 관한 이야기도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소명 경험이 갑작스러운 거라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 이전에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소명 경험이 과연 옳은지 아닌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예수 제자들과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명 경험은 우리 귀로 직접 어떤 소리를 듣거나 길을 가다가 갑자기 산 복권이 1등 당첨되는 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아브라함의 소명과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형식에서도 가장 가까운 소명 이야기는 모세의 소명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에 이어지는 출애굽기 초반에 나옵니다. 애굽 왕자로 살던 모세는 동족 히브리인들의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망명자가 됩니다. 나이 마흔에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 토속 종교 제사장인 이드로의 데릴사위가 되어 양을 키우면서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사십 년 동안 모세의 영혼이 얼마나 갈급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어느 날 그는 미디안 토속 종교의 성지인 호렙산 근처로 양을 몰고 갔다가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가시덤불 현상을 보고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선승들이 대나무 바람 소리를 듣거나 기왓장이 떨어져서 깨지는 소리를 듣고 큰 깨우침을 얻는 거와 비슷합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힌 듯이 답답했던 영혼이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경험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첫 지도자였다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입니다. 아브라함은 달을 섬기는 갈대아 우르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가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서 그곳을 떠나서 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인 하란까지 와서 지냈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미국과 러시아 연해주나 중국 만주로, 일본과 유럽 각지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거기서 돈을 잘 벌어서 편안히 사는 사람도 있고,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의 편안한 삶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영혼이 답답한 겁니다. 영혼이 답답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타는 목마름이 뭔지를 아는 사람만 물을 찾는 거와 같습니다.

여기서 영혼이 답답하다는 말은 영혼이 간절하다는 뜻입니다. 돈이 간절한 사람은 돈을 찾고, 친구가 간절한 사람은 친구를 찾습니다. 영혼이 간절해야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영혼이 간절하다는 말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모든 일이 사람의 재밋거리 중심으로 작동하는 오늘날에는 더 그렇습니다. 세상살이가 재미있으니까 더는 의미 있는 어떤 것을 찾지 않는 겁니다. 오늘날 그 재미가 무언지를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온종일 재미있게 놀 수 있습니다. GPT를 활용할 줄 알면 재미가 더해질 겁니다. 영화를 실컷 보고, 음악도 실컷 듣고, SNS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일상생활도 기웃거립니다. 유튜브에는 온갖 볼거리가 차고 넘칩니다. 그것이 현대인들에게는 삶의 리얼리티입니다. 그런 문명이기(利器)를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힌 젊은이들은 영혼의 간절함이 무엇인지 절감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이 간절하다는 말은 삶의 근본을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인 예를 들어도 이해를 바랍니다. 저는 평생 신학자와 목사와 글 쓰는 이로 살았습니다. 평생 교회에서 설교했고, 상당한 기간 신학대학에서 강의했고, 상당한 분량의 책을 쓰고 번역했습니다. 제가 쓴 책 중에는 소위 말하는 기독교계에서 베스트셀러도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 칠십 세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영혼이 간절합니다. 삶의 가장 핵심 영역인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은 인간적 업적을 성취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자식을 잘 키우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하거나 신앙적인 교양을 쌓는다고 해서, 그리고 교회를 초대형교회로 키운다고 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에 집착할수록 하나님에게서 오히려 더 멀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이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을 거론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의 율법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전통이 그들 신앙의 토대였습니다. 자랑할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근거는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믿음이라고 변증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관해서는 이미 롬 2~3장에서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그 대목에서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귀한 명령이지만 사람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피력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 충만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믿음을 확실하게 드러낸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영혼의 자유

교회 밖에 있는 현대 지성인들은 이런 설명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냉소적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삶의 핵심이 어디 따로 있냐고, 영혼이 실재하느냐고, 모두가 이유도 모른 채 세상에 태어나서 늙어 병들고 고생하다가 죽어서 아득한 미궁의 세계로 빠져드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 대충 여기서 재미있는 삶으로 만족해야지 공연히 영혼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런 영혼의 간절함은 삶의 실체를 왜곡하거나 외면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분들에게 저는 할 말이 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각각 밭을 샀거나 소를 샀거나 결혼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14:15 이하) 마지막 절인 2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이, 즉 영혼의 만족이 무엇인지 모르면 다른 바쁜 일을 핑계로 초대를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바쁜 세상살이에서 경제적인 생산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주일 공동예배에 억지로는 참여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결국에는 각자 선택해야 합니다. 소명에 응하든지 외면하든지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그냥 머물 수도 있었으나 그곳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갔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만이 우리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어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이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껴보셨는지요. 다른 말로는 영혼의 자유입니다.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영혼 구원입니다. 바울이 롬 4장에서 역설한 의로움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유나 고대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한 이유는 모두 한결같이 바로 영혼의 자유를 향한 갈망에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영혼의 자유와 풍요로움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자유와 풍요로움이 우리에게 늘 충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도 있고 밑으로 뚝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맞나, 하는 불안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자유와 풍요로움이 무엇인지는,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느낍니다. 한밤중 폭풍우에 흔들리는 항해 중에도 멀리서 깜빡이는 등대 불빛을 보듯이요. 우리에게 숙제는 우리의 영혼이 더 풍요로워지고, 더 예민해지는 것, 즉 등대 불빛이 더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을 가리킵니다.

그 숙제를 풀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을 바로 내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게 최선입니다. 그 경험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삶에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의 소명 이야기는 삶의 본질에 닿아있기에 우리의 영적인 눈높이에 따라서 늘 새롭게 경험될 겁니다. 그 소명 경험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떠남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를 향한 회심입니다. 떠남과 나아감은 동시적 사건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편안하게 해줄 듯한 돈에서 떠나야겠지요.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서도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떠남은 돈과 가족과 친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는다는 게 아니라, 즉 출가자가 된다는 게 아니라 그들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돈과의 관계도 새로워지고, 친구와의 관계도 새로워지고, 교우들과의 관계로 새로워지는 것이 곧 떠남의 영성입니다.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관계는 먼저 새로운 차원을 경험해야만 가능합니다.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차원에 들어간 수준만큼 일상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남녀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랑의 밀당차원만 아는 남자나 여자는 상대방과 밀당 관계만 맺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지배하려고만 하겠지요.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세상은 우리를 온통 그런 밀당 관계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행한 거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새로운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면, 그 사랑을 경험할 때만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이가 충분히 들었는데도 그런 차원을 갈망할 뿐이지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날이 저물어가는데 아직 갈 길이 한참이나 남은 어떤 늙은 나그네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이 저와 여러분에게 날이 갈수록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profile

[레벨:18]부스러기은혜

June 12, 2023
*.253.57.26

칠순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영혼이 갈하다는 목사님의 자기고백이 짠하게 와닿습니다.

목회적 성과나 욕망의 성취등 일상의 표면에 집착할수록 

일상의 심연과는 멀어진다는 말씀도 그러하고요.

우르에서 하란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세상의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영혼의 갈함의 임계량이 채워져갈 즈음에 그 분의 음성이 들리었겠죠?

갈함이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그래서 더 타들어 가는 영혼의 헛헛함을 부여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오늘이란 시간은

흡사 세상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어 늘 군중속의 고독자 심정으로 살았을

아브라함과 모세가 갈함을 움켜쥐고 보냈던 그 시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감격이 평생을 갈수없듯이

열대지방의 한낮 스콜(Squall)처럼 맛보기로 잠깐씩 채워주시는 은혜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더 사모하게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손에 잡힐듯 말듯한 구원의 외로운 여정속에서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이 위로가 되어줍니다.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12, 2023
*.104.32.110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간절함이 

늙은 나이에도 (나름으로) 생동감 있게 살아가게 하는 거룩한 동력입니다.

칼 라너의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78쪽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영혼의 모든 힘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그분께 흘러들어가고,

사랑 안에서 우리 존재의 가장 내면적인 중심이 되시는 그분,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신 그분께 밀려듭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3253
1054 기타 무엇을 기다리는가? [3] [2] 2004-06-14 20224
1053 기타 기도와 말씀 선포 [6] [2] 2004-06-30 15365
1052 기타 신앙의 외면과 내면 (빌 2:14~18) [1] 2004-06-30 14618
1051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8409
1050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921
1049 기타 수군대는 사람들 2004-06-30 14174
1048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269
1047 기타 빛과 어두움 [3] 2004-06-30 15487
1046 기타 영적인 삶과 이성적인 예배 (롬 12:1, 2) [2] 2004-06-30 15718
1045 기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2] 2004-06-30 14592
1044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632
1043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797
1042 기타 예수의 권위 (막 1:21~28), 2003.6.1 2004-07-02 13741
1041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860
1040 기타 삶의 중심 2004-07-02 13282
1039 기타 용서의 능력 [1] 2004-07-02 17927
1038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936
1037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869
1036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608
1035 기타 우상과 귀걸이 [1] 2004-07-02 16481
1034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4205
1033 기타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1] 2004-07-02 15111
1032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756
1031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886
1030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826
1029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627
1028 기타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4] [1] 2004-07-02 13173
1027 기타 생명을 얻는 길 [1] [1] 2004-07-02 13460
1026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311
1025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2077
1024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795
1023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4116
1022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814
1021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714
1020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516
1019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509
1018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996
1017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179
1016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692
1015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691
1014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577
1013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960
1012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654
1011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583
1010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948
1009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312
1008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1106
1007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461
1006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432
1005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556
1004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737
1003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3303
1002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461
1001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951
1000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322
999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580
998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630
997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679
996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252
995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223
994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716
993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222
992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560
991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198
990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931
989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808
988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850
987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570
986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659
985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513
984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799
983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821
982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536
981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794
980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3000
979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878
978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568
977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669
976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613
975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380
974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10109
973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476
972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540
971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536
970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345
969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854
968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553
967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480
966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544
965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282
964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604
963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304
962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137
961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703
960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784
959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835
958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647
957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180
956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783
955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23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