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부활절 조회 수 5259 추천 수 0 2020.05.10 22:00:46
설교보기 : https://youtu.be/f8mC9haq9r8 
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2:2-10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20510

 

 

성경을 자주 읽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배에 참석할 때 외에는 아예 손도 안 대는 분들이 간혹 있을 겁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바빠서 시간 내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멀리 느껴진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성경에 종교적인 메타포와 상징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일종의 시입니다. 시어의 깊이를 뚫고 들어가지 못하면 시는 그럴듯해 보일 뿐이지 삶의 현실(reality)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시영 시인의 짧은 시 저 잎새 하나를 읽어볼 테니 어떤 느낌이 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나뭇닢 하나에도 신의 강렬한 입김은 스며/ 바람 불지 않아도 저 잎새 밤새도록 찬란히/ 은빛 등을 뒤집고 있으니

 

(1)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함께 읽은 벧전 2:2절 이하에도 시처럼 은유가 많이 나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 보배로운 산 돌,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 거룩한 제사장,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 등등입니다. 급기야 어두움과 기이한 빛이라는 표현까지 나옵니다. 이런 일련의 단어를 들으면 뭔가 참된 것을 말하는 거 같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이 현실과는 관계없다고 여깁니다. 기독교의 다른 가르침도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는 비슷합니다. 구원, 하나님 나라, 생명, 의로움, 성화, 창조, 재림, 부활이 상투적인 낱말로만 남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시를 해설하는 사람처럼 베드로 사도의 말 중에서 한 대목을 집중적으로 해설해보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풍성한 삶의 능력 가운데서 살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9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을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놀라운 빛가운데로 인도해 주셨다는 위 문장은 기독교인의 영적 실존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고급스러운 표현입니다. 공동번역의 놀라운 빛을 우리말 성경은 기이한 빛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기이한 빛이라는 표현보다는 놀라운 빛이라는 표현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영어로 원더풀 라이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지금 우리가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사람과 똑같이 기독교 신앙으로 산다면 당연히 원더풀 라이트 안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이 문장을 쓴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돌고래가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듯이 저 놀라운 빛 안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 놀라운 빛이 무엇일까요?

 

(2) 놀랍고 기이한 빛을 이해하려면 먼저 빛이 없는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 예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전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리를 찾는 썩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왜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는지, 예수는 왜 성전에서의 환전 거래를 부정하는지, 유대 종교 권위에 왜 순종하지 않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율법 체제를 삶의 절대 규범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어두움입니다. 둘째,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아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조상 대대로 동굴에서 지내던 종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동굴 입구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절대 규범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동굴 밖은 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동족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놀라운 빛의 세상을 전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묵하라는 강요를 받았습니다. 침묵할 수 없어서 혼자 외치다가 결국 화형당했습니다. 그리고 동굴 안은 이전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여기서 어두움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닙니다. 생명이 없거나 생명이 위축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어도 내면은 어두울 수 있고, 거꾸로 겉은 초라해도 내면은 생명으로 빛날 수 있습니다. 위의 예를 다시 보십시오. 예수의 복음과 대립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을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세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만 보면 그들은 빛의 세계에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삶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굴 안에서만 살았던 사람들에게 동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의 외침은 미친 사람의 허튼소리였습니다. 자신들이 어두운 동굴 안에서 경험한 것만을 절대적인 삶으로 여겼기에 빛으로 가득한 동굴 밖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인식의 오류가 저들을 어두움 안에 가둔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현대인은 어둠 안에서 살아갈까요, 아니면 빛의 세계에서 살아갈까요?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어둠을 구체적으로 알려면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시대를 아는 게 필요합니다. 대다수 학자는 네로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 박해가 심하게 일어났던 기원후 64년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 소아시아에서 기독교 박해가 시작한 기원후 96년 이후라고 주장합니다. 어쨌든지 두 시기의 공통점은 기독교가 로마 정권에 의해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의 모든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차원에서 크고 작은 박해가 이어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지하묘지인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해에는 두 가지 정치적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황제 숭배의 강화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수단입니다. 기독교를 공격함으로써 정권을 향한 로마 시민들의 비난을 피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도미티안 황제 시대에 기록된 또 하나의 성경인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로마 황제는 적그리스도였습니다.

 

(3) 로마 제국과 그 시대를 어두움이라고 보는 베드로전서의 관점은 옳을까요? 역사가들은 서로 다르게 평가할 겁니다. 지난 유럽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은 로마 문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건축, 예술, 연극, 문학, 철학, 과학, 군사 등등, 인간 문명 모든 분야에서 로마는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 영향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신학도 로마 문명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4세기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결정하는 최고 권위의 공의회를 소집한 사람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기독교는 로마 문명과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교황과 황제라는 두 체제가 유럽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격된 후에 갈릴리 예수의 혁명적인 복음 능력을 잃어버리고 어용 종교로 타락했다고 비판합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어둠의 세력은 단지 로마 제국이라는 특정 국가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두 발을 내디뎌야 할 세상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문명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는 겁니다. 그 한계가 곧 어두움입니다. 그 한계가 저절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로마 문명은 한계를 감추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빛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런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빛과 어두움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시대정신 속에 파묻혀서 그 한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 시대 당시에 기독교인은 절대적인 생명의 빛을 경험했기에 세상의 어두움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어두움과 빛은 이런 점에서 상대적입니다. 어두움을 알아야 빛을 느낄 수 있고, 빛을 경험해야만 어두움을 뚫어봅니다.

 

(4)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기이한 빛, 즉 놀라운 빛은 무엇일까요? 빛은 구원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놀라운 빛에 들어갔다는 말은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빛을 일상에서 종종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시리즈 형태로 만든 영화 <빨간 머리 앤>을 시간이 나는 대로 보고 있습니다. 처음에 우연히 첫 편을 보았다가 계속 보는 중입니다. 고아 소녀 앤은 우여곡절 끝에 늙은 남매가 사는 가정에 양녀로 들어갑니다. 앤은 끔찍하게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세상을 빛처럼 느낄 줄 아는 소녀였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선으로 나무를 보고, 하늘을 보고, 사람을 볼 줄 압니다. 앤에게 세상은 늘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앤으로 인해서 늙은 남매의 삶에도 생기가 돌게 되었고, 마을 전체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고아 출신인 데다가 외모가 초라한 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일상과 사물을 고정된 세계로가 아니라 신비롭게 열린 세계로 볼 수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앤과 같은 존재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빛으로 나타나는 요정, 또는 천사입니다. 여러분은 일상에서 그런 빛을 경험하고 있으신가요? 아니면 무덤덤한가요?

 

(5)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기이하고 놀라운 빛은 자연적인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입니다. NIV 성경은 “into his wonderful light”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생명 자체이니 생명의 빛이라고 해도 되고, 하나님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을 같은 구절 앞 문장이 네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그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5절에 이미 나왔습니다.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 말입니다. 이런 표현이 가리키는 특징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우리의 삶을 위축시키는 세상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new being)를 가리킵니다.

이를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 있으면 이전 것(the old)은 무엇이든지 지나갔으니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전 것에 매달려 삽니다. 부끄러운 과거로 인해서 힘들어하고, 또는 거꾸로 자랑스러운 과거로 우쭐댑니다. 양쪽 모두 우리 삶을 파괴합니다.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런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더는 과거의 일로 부끄러울 게 없고, 거꾸로 우쭐댈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현재의 삶이 절정이라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을 다른 말로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이한 빛(원더풀 라이트)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6) 저의 설명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여전히 생각할 분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 배고프고, 몸이 아프고, 실연당하거나 실직당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인생살이에서 벌어지는 고난과 시련은 물론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듭니다. 짜증 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불안하거나 우울하게도 됩니다. 저는 지금 믿음만 있으면 어려움을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여러 가지 불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빛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들어서 눈을 바로 뜨면 그 빛을 볼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사사로운 일에 정신을 다 빼앗겨서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흔한 표현으로 시련과 불행은 다 지나갑니다. 시련과 불행이 몰고 온 충격도 시간과 더불어서 줄어듭니다. 사실은 행복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행복한 일이 몰고 온 기쁨도 시간과 더불어서 줄어듭니다. 그런 삶의 조건들은 시간과 더불어서 시들해집니다. 어떤 경우에도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빛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즉 이 순간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절정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믿음이고 영성이고 삶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집중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7) 어떻게 그 사실에 집중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빛을 구도적 태도로 따라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 깊어집니다. 형식에만 머물면 신앙의 진보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진정성 있게 다가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짚었던 택하신 족속이라는 단어를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이 말은 곧 지금 우리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고,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복된 일인지 느끼는 분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늘 여기에 모이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지금 기적과 같은 사건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다.”라는 말씀 앞에서 가슴이 뜨거워졌을 겁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빛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몇 년이나 살았고, 앞으로 얼마나 남았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살이에서 맞아. 이것이 바로 생명의 놀라운 빛이야.” 하고 환호성을 친 순간이 언제였습니까? 많았겠지요. 그런 순간이 점점 더 많아집니까? 아니면 줄어듭니까? 인생은 생존경쟁이니까 놀라운 빛이니 뭐니 할 것 없이 가능한 한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 업적을 남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으신지요. 자기 업적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삶도 한 인생이긴 합니다.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나 근본에서는 불행한 인생입니다. 빛이 아니라 어두운 데에 머무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둠에 들어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면 저의 설교가 전혀 들리지 않겠지요. 설교자로서 제가 여기서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반복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어내어 놀라운 빛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으니, 그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십시오. 아멘!


profile

[레벨:29]모모

May 15, 2020
*.62.222.10

<빨간 머리 앤> 은 만화영화인지 실사영화인지 궁금하군요. 저도 한번 꼭 보고 싶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y 15, 2020
*.182.156.135

모모 님, 실사영화입니다. 44분 짜리가 30편이나 되니 

단번에 다 볼 수 없고, 속도를 느리게 잡고 보세요.

저는 다 끝냈습니다. 앤이 대학생이 되고 

어머니 사진첩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profile

[레벨:5]김혜식

June 02, 2020
*.62.190.78

이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종교성A와 종교성B가 구분 되는 것 같네요. 둘다 하나님의 빛에 들어가기 위해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인데 전자는 그 장이 내면성(영혼)이고 상대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모호한 일신론적인 경향이라면 후자는 그 장이 삶이고 상대가 삼위일체인 것 같네요.
어찌됐든 절대의존의 감정을 갖는다는게 자그마난 쾌락하나도 떨치지 못하는 저로서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02, 2020
*.182.156.135

자그마한 쾌락을 왜 떨쳐버리려고 애를 쓰시나요? ㅎㅎ

쾌락도 하나님의 선물이니 너무 부정적으로 대하지 마시고 

자기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보살펴보십시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2402
954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315
953 기타 자유의 길, 분열의 길, 2월13일 2005-02-13 8680
952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9198
951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9208
950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476
949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256
948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9100
947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9060
946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10147
945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746
944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10110
943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656
942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528
941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375
940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882
939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332
938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811
937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916
936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2121
935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385
934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258
933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855
932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488
931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563
930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638
929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9225
928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638
927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636
926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368
925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1145
924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452
923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995
922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5015
921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809
920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453
919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689
918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7164
917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1999
916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777
915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255
914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770
913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679
912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877
911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678
910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551
909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579
908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567
907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966
906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758
905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940
904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5034
903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298
902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847
901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262
900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494
899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440
898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512
897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426
896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5945
895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929
894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3013
893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720
892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345
891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10193
890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13515
889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370
888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930
887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953
886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5457
885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4064
884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774
883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897
882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9291
881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3764
880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7209
879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743
878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632
877 기타 예언의 성취 2006-08-13 16370
876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8278
875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2185
874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753
873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3666
872 기타 창조 영성 [4] [2] 2006-09-17 15444
871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20328
870 기타 고난 받는 그리스도 [2] [2] 2006-10-01 15512
869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20007
868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878
867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871
866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4069
865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5011
864 기타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2] 2006-11-12 16096
863 기타 야훼 찬양! (욜 2:21-27) [3] 2006-11-19 13672
862 대림절 새로운 세상이 온다! [2] 2006-11-26 15682
861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5301
860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5109
859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4719
858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5096
857 성탄절 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7] 2006-12-31 13219
856 주현절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의 비밀 [5] 2007-01-07 15870
855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474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