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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신비, 생명의 신비

성령강림절 조회 수 15647 추천 수 0 2009.09.07 15: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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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6:56-68 
 

성찬의 신비, 생명의 신비

(요 6:56-69)


노골적인 질문을 이해해주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걸 보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또는 잘못 믿으면서도 교회생활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친구를 따라다닐 수도 있고, 부모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나올 수도 있고, 사람을 만나는 재미로, 또는 습관적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생활과 믿음생활은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교회생활은 어영부영 해도 가능하지만 믿음생활은 그런 방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6장65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66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제자들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따르던 사람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요 7:1절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고,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요 7:5절)

이 와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예수님 주변의 많은 이들 중에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제자들만이라도 이렇게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게 말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판 가룟 유다는 제외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누구는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누구는 못 믿을까요? 어떤 사람은 믿음의 은총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린아이라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간단한데도 제자들이 그걸 어렵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반응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거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늘 그런 태도였습니다. 니고데모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요 3장) 그들은 모두 인격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 주님의 말씀이 무엇일까요? 그 말씀을 읽는 우리는 그것을 잘 알아들어서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있을까요?


살과 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첫째,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56절) 식인종이 아니라면 사람이 직접 예수님의 살을 씹어 먹고, 피를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에 기독교인은 성찬의 빵을 주님의 몸으로 믿고 먹으며, 포도주를 주님의 피로 믿고 마십니다. 성찬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을 담는 종교적 징표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몸이 있고, 예수님의 피가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성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미사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반감은 성찬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온 것입니다. 성찬의 핵심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거한다는 위 본문이 가리키듯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부활하는 세례를 거친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찬을 통해서 이런 죽음과 부활에 반복해서 참여하게 됩니다. 그와의 일치를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을까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와 하나가 된다는 생각이나 느낌이 전혀 없으신가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할 겁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기본적으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증명이라고 한다면 믿음을 통한 증명만이 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성찬의 신비로 들어가는 것 말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성찬의 빵은 예수님의 살을, 포도주는 피를 가리킵니다. 빵이 실제로 주님의 몸으로 변화한다거나 포도주가 실제로 주님의 피로 변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살과 피가 예수님의 실체를 가리키듯이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바로 예수님의 인격과 삶과 운명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인격체에 일어난 구원사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동의하고, 그것을 믿는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일치입니다. 이 사실을 제자 중의 여럿이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주님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57절) 이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첫 번째 말씀의 연속입니다. 참된 양식인 예수님과 일치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는 사실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들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셉, 어머니 마리아, 형제들을 알고 있었고, 그의 어린 시절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평범한 이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세상에서는 우습게 들리겠지요. 세 번째 말씀에서 이 사실은 더 분명해집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했습니다.(58절) 앞에 나오는 요 6:5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이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의 사람들이 생명의 문제를 광야의 만나에서만 생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만나를 통해서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광야의 만나는 매력적이고 황홀한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시작한 유대인들은 먹을거리가 곧 떨어졌습니다. 광야에서 굶어죽을 바에야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들 앞에서 특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른 아침 텐트 밖으로 나와 보니 광야에 만나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주워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일상으로 경험하던 고대 유대인들에게 만나는 영적인 로망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많은 다툼이 먹고사는 데서 시작했는데, 만나 사건이 반복될 수 있다면 그런 다툼도 없어지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광야의 만나를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과 다른 것을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른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그 떡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의 만나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너무 세속적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다고 보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광야의 만나를 먹어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것을 모를 만큼 천박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몰랐던 사실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가 영원한 삶에 이르는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올림 받은 주님

설교 첫머리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영생의 양식이라는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지금도 귀한 시간을 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 비해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잘 몰랐지만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알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유대인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광야의 만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근거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내용이 우리의 삶과 실제로 일치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말이 아니라 능력인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말이 아니라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의 참된 양식이 되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요한복음 기자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받았을 겁니다. 당신들은 무슨 근거로 예수를 영생의 양식이라고 믿는지 근거를 대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61b, 62절입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전에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가리킵니다. 부활과 승천은 하나의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올리우심’이 그것입니다.

사도신경에 그 내용이 정확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궁극적인 생명으로 올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궁극적인 생명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역설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것이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 어렵습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와 함께 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종교 권력과 투쟁했다는 사실도 우리가 얼마든지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주로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신앙적 태도이지만,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삶을 따르자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자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작은 예수가 되자고 합니다. 그런 것들은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신앙의 결과들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인 생명으로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따라할 수는 없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일들에만 관심을 보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에 흥미도 없고 이해도 안 된다면 결국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66절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른 동기는 광야의 만나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였습니다. 예수야말로 그런 방식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메시아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오병이어 사건 뒤에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지금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합니다. 그가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올림을 받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굶지 않고 복지 사회를 꾸려가는 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한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을 황당무계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들은 보따리를 쌌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이들은 나름으로 자신의 고유한 영적 세계관으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문제는 생명에 대한 자신들의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생명의 신비를 인식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습니다. 일부러 눈을 감은 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은 그렇게 취약합니다. 종이 한 장만 눈을 가로막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만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만 가능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합니다.

너희도 가려는가 하는 주님의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님에게 있으며, 주님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가기는 어디를 가느냐고 말입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행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는 베드로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생의 말씀이 주님에게 있다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신앙의 능력과 그 위기를 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 스캔들입니다. 걸림돌입니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졌고, 넘어질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떠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 진리를 가리키는 성찬의 신비가, 곧 생명의 신비가 우리의 영혼을 화염으로 감싸기를 바랍니다. 아멘! (200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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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September 07, 2009
*.162.15.85

목사님의 설교비평집 1권을 다 읽고 2권도 거의 다 읽어갑니다.

날마다 한두 토막씩 읽는데 너무 영적인 울림과 공감이 커서 감격에 겨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통 신학과 철학 쪽 서적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입시공부와 거리가 있어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예수께서 그 살과 피로 세우신 새 언약과, 성령께서 우리 삶에서 종말론적으로 이루고 계신 새 계명...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할 때 가슴이 벅차집니다. 이번 말씀도 은혜 받으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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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7, 2009
*.120.170.243

김용남 학생이 고등학생 맞아요?

만약 김용남 학생이 한국의 평균 고등학생이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있어 보이네요.

내 책을 즐겁게 읽어준 게 고마워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런 짧은 대글에서도 학생의 사유 세계가 엿보여 하는 말이에요.

설교비평 3권도 있으니까 그것 마저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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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September 07, 2009
*.229.154.102

김용남형제님,

하두 신기해서 자꾸 댓글을 읽어 보게 되네요.^^

부럽기도 하구요.

이런 글을 읽다보면, 저도 가슴이 벅차답니다.

얼굴 한번 꼭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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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유목민

September 09, 2009
*.232.228.240

시방 뭐라고라잉? 고등가 학상이 설교비평을 읽고 종말론적 삶이란 말을 언급한단 말인가요잉?

오~ 성찬의 신비여, 희망의 신비함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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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September 07, 2009
*.164.230.58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명에 대한 문제를 광야의 만나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듯이

이 세상의 모든 고정관념에 묶여있는 한,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그럴듯 하더라도,

예수님을 떠날 수 밖에 없는  거라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만나와는 차원이 다른 예수님 자체, 그의 살과 피만이 유일한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이 

아직은 뭔가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예수님만이 영원한 삶에 이르는 생명의 양식임을 알고 믿고 살아갈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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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7, 2009
*.120.170.243

이선영 님,

잘 지냈어요?

지난 수련회에 참가 신청을 하고 못 왔지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참가했으면 좋은 일들이 많았을 텐데요.

총각들도 좀 참석했거든요. 음.

예수가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이 좀 추상적으로 느껴지요?

플라톤의 '이데아'도 그렇고,

화이트헤드의 '과정'도 그렇고,

노자 장장의 '도'도 역시 추상적이에요.

왜냐하면 그런 개념들은 은폐된 현실성이기 때문이에요.

천천히 영적인 길을 가다보면

그런 추상적인 세계가 구체적으로 다가올 겁니다.

길을 잘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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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오명철

September 08, 2009
*.243.153.40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다림의 소망

저의 신앙의 생활속에선 이것이 갈급함과 초월과 어려움으로 반복되어집니다.

이미와 아직의 관계속에서 영생의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지

성찬식을 할때마다 느껴지고 오히려 나태함과 두려움이 내 안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릅니다.

이 신앙의 여정을 얼마나 걸어가야 할지는 이미 앞서가신 분들을 보면 까마득 합니다.

하지만 깨진 무릎을 털며 다시 일어나고 또 걸어가고, 뛰다가 쉬었다가 하는 제 모습이 보기 좋을때가 있습니다.

흉내낼수 없는 신앙의 핵심! 저의 존재와 근원의 관계가 선명해지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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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8, 2009
*.120.170.243

지금 오명철 님이 느끼는 어떤 것들은

좋은 징조들이에요.

까마득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가려넌 마음이 든다고 했잖아요.

가다가 앞선 선배들을 따라잡기도 하고,

한참 떨어지기도 하면서 길을 가는 거지요.

이게 곧 기독교 신앙의 수행이랍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앙은 행위에 앞서 수행이라고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존재와 근원이 선명해지는 그 과정이

바로 수행이랍니다.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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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September 09, 2009
*.106.156.126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지난 10달 동안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늘 자신에게 하던 질문입니다.

오랫 동안 주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도 신앙의 핵심을 몰랐던 저를 깨달았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beginner(초보운전)란 닠네임을 썼구요.

 

아직은 이 질문앞에 배드로처럼 자신 있게 고백할 수는 없지만

창조, 빛 생명, 사랑의 주님을 향해 시동을 걸고 몇미터는 나간 것 같습니다.

주님!

제게 은혜를 베푸사 초보운전의 딱지를 떼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 속에서 마음껏 달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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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9, 2009
*.120.170.243

비긴너 님,

벌써 대구샘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가

열달이 되었나요?

작년 11월부터니까 그렇군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니 다행입니다.

어느 순간에 그 빛이 더 밝아질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빛에 완전히 휩싸일 겁니다.

저도 사실은 똑같이 초보랍니다.

초보를 독일어로는 '안팽어'(Anfaenger)라고 합니다.

운전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처음의 배움이 중요한 것 같더군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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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September 09, 2009
*.234.41.70

살아가면서, 아주 드물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던'  순간을 만날 때가 있게 됩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순간은 정말 가장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그 어떤 절대적인 '어떤 것' 을 느꼈을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들었을때는 더 말할 필요가 없구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감히 그 어떤 것도 보탤 수가 없고, 다만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할 뿐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때문일까요?

목사님,

그러나, 제 눈은 늘 뿌연 안개로 덮여 있습니다.

한 눈 팔고 살때가 허다해서 그렇겠지요.

그러다가  이런 말씀 앞에 서면 다시 제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기억해 내지요.

'그 순간'을 진리의 오심, 그 분의 임재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저 유구무언입니다. 

 

주님, 비천한 저를 떠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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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비가오는날

September 10, 2009
*.63.219.187

라라님

저는 요즘 BLACK 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인도영화랍니다.

인도영화가 작품성이 높더라고요.

헨렌켈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닫힌세계에서

열린세계로,

혼돈에서,

질서로,

블랙에서,

다층적 색깔을 인지하던가요.

마음으로,

이성으로,

영으로,

사물을 인지하고,인식하고,

아직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마음과 촉각과 느낌으로

더나아가서 자연의 신비를 알아가죠,

가르치는 선생남과 일치속에,

소망하게되고,기뻐하고,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경험되는 세계를...

그러나 아직도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블랙입니다.

"어떤면에서

우리들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없으니

블랙이 아닐까요?"

 

라라님이 경험된 그 순간을

저도 경험 할 수 있는지요.

진리의 오심

그 분의 임재

진리가 주시는 자유 속으로 ...

블랙을 넘어,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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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0, 2009
*.120.170.243

비오는날 님,

시 한편을 잘 읽었습니다.

영적인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언어의 놀라운 세계와 만나게 되지요.

계속해서 그런 훈련을 해보세요.

영적인 언어가 자신을 끌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나도 블랙을 한번 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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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September 10, 2009
*.234.41.70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혼돈에서 질서로,

.....블랙을 넘어,

빛으로

 

참 놀랍습니다.

어떤 이끌림을 받지 않고는

이런 시를 토해 낼수 없겠지요.

비오는날님은 이미

진리, 그 자유의 세계에 들어가 계신 분이군요.

 

저도 <BLACK> 꼭 봐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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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0, 2009
*.120.170.243

라라 집사님, 무언가 불빛을 보았으나

화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겁니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에 속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빛을 어렴풋이나마 보았다는 것이겠지요.

그것만 해도 인식의 엄청난 진보랍니다.

보통은 빛이 있다는 소문만 듣거나

때로는 그것 자체를 무시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빛 앞에서

우리가 할말을 잊는다는 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 사실을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딜레마이면서 동시에 마땅한 도리이겠지요.

오늘도 가을 햇살이 찬란하군요.

profile

[레벨:5]희락당

September 10, 2009
*.12.62.129

목사님 설교는 참 좋은 신학 텍스트입니다.

모든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져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특별히 이 부분에서 눈이 멈춰 섰습니다.

 

역설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것이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 어렵습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와 함께 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종교 권력과 투쟁했다는 사실도 우리가 얼마든지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주로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신앙적 태도이지만,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삶을 따르자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자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작은 예수가 되자고 합니다. 그런 것들은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신앙의 결과들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인 생명으로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따라할 수는 없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일들에만 관심을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대부분의 설교자의 초점은 바로 위의 것들에만 맞추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교인들이 할 수 있는 것들에만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하기 때문에, "자기 의"를 부추기는 꼴이 되는 것 같습니다.

목회 일선에 있는 저도 이렇게 설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많이 발생합니다. 신앙의 신비를 이야기하면, 교인들은 못 알아듣겠다고 아우성이고, 대신에 자신들이 하고 있거나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은혜 받습니다.(은혜 받는 척하는건지도 모르죠.)

 

참 딜레마입니다. "칭의"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의"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막무가내로 "칭의"에 관해서만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하면, 진짜로, 다 떠나버리니까요.. 그렇게 되면 현실적으로 목사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아무튼, 목사님은 참 좋은 선생님입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0, 2009
*.120.170.243

희락당 님,

좋은 선생을 알아보는 희락당 님은 좋은 학생이고,

앞으로 좋은 선생이 되겠군요. ㅎㅎ

제 설교의 핵심을 인용해주셨네요.

신자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그 방향으로 나가야겠지요.

우리가 도덕교사나 처세술 강사나 사회개혁운동가는 아니잖아요.

설교자가 예수의 케리그마에 확실한 관점을 확보하기만 한다면

청중들도 약간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같은 방향을 보게 될 겁니다.

설교자들은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성령이 개입하시니까요.

그게 바로 성령론적 설교라고 할 수 있어요.

진리의 영인 성령은 진리가 선포되는 그 자리에 함께 하실 테니까요.

위 설교가 윤리적 실천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전달되는 건 아니겠지요.

척박한 설교 현장에서 용기를 잃지 말고

길을 잘 가봅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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