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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기타 조회 수 15936 추천 수 163 2006.11.12 15:15:53
성경본문 : 히브리서 6:13-20 
http://wms.kehc.org/d/dabia/06.11.12.MP32006.11.12. 히 6:13-20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저는 지난 4월2일 히브리서 5:1-10절을 본문으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도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히브리서는 신약성서에서 아주 독특한 형식의 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진술하는 복음서도 아니고, 사도들의 활동을 담은 사도행전도 아니고, 그들의 일반적인 편지도 아닙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히브리서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설교라고 합니다. 설교라고 하더라도 요즘과 같이 하나의 주제를 담은 단편적인 설교는 아닙니다. 히브리서가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천 년 전에 이런 정도의 글을 파피루스에 기록하려면 매우 큰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히브리서는 단순한 설교를 훨씬 뛰어넘는 신학 논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 나오는 6장1절과 3절에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숙한 신앙의 경지로 나가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교리적으로 흔들린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배교 행위까지 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책망하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실성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반드시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겠다.”(14절)
아브라함 이야기는 창세기 12-25장 사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하란으로 이민을 왔다가 아버지가 하란에서 죽자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정착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진 많은 이야기들은 주일학교 어린이들까지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현재 세계의 세 종교에서 조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당연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적인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슬람교도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실인 사라에게서 난 이삭의 후손이 이스라엘이며, 소실인 하갈에서 난 이스마엘이의 후손이 중동의 이슬람교도들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모든 인류의 실제적인, 또는 정신적인 조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은 땅과 후손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으며,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땅과 후손은 생명의 토대입니다. 이런 문제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만 실감이 납니다. 고대 가나안에서 목축업을 하면서 살아가던 아브라함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당시의 목축업은 계절을 따라서 풀이 있는 곳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아다녀야만 했습니다. 목초지는 바로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기초입니다. 가능한 넓은 땅을 갖고 있어야만 그들의 소와 양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땅은 물도 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때나 물이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넓은 땅을 소유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는 약속은 바로 그의 생존을 지켜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손 문제도 아브라함에게는 시급했습니다. 그가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에 이미 결혼했지만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타국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는 아브라함이 자식을 얻는다는 건 바로 생명을 얻는 거나 똑같았습니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고, 나이도 상당히 먹었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희망을 접어야할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 번성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얻었고, 적자인 이삭은 야곱과 에서를 낳았으며, 그 뒤로 그들은 나름으로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앞에서 히브리서는 신학논문, 또는 설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성서에 보도되어 있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그냥 전달하지 않고 나름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이 약속에 담긴 신학적인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13b) 하나님의 이 약속은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입니다.(16b)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로마법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사람은 모든 국민들에게 강제력이 있는 법 앞에서 맹세해야 합니다. 만약 그의 증언이 위증으로 드러날 때는 벌을 받아야합니다. 따라서 그 맹세는 매우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에 더 높은 힘이 없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는 겁니다. 이런 맹세를 통한 약속은 옳고 그름의 논쟁을 일시에 중단시킬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거짓으로 맹세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말은 여기서 무의미합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위에서 말한 대로 로마법을 생각하면서 성문법 자체보다 맹세가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법은 옳고 그름을 완전하게 판명하는데 결점이 많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게 법의 약점입니다. 어쨌든지 하나님의 맹세는 모든 시시비비를 중단시킨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주장은 옳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18a) 여러분은 히브리서 기자의 이런 설명을 어떻게 하시나요? 하나님은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이 아니겠지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분간하려면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거나, 또는 우리가 무엇이 참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은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의 이런 약속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그 대신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을까요? 현대인들 스스로가 생산하고 계획한 것들에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제가 일일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다툼과 번민으로 몰아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바로 이런 데서 연유하고 있으니까요. 한 가지 예만 들을까요? 제가 살고 있는 하양은 그런 낌새가 전혀 없는데 지금 서울과 경기도의 집값이 너무 올랐다고 야단이더군요. 경제문제에 대해서 제가 아는 척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내가 미처 따라갈 수 없는 복잡한 사회경제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하겠지요. 다만 이런 현상을 아브라함 이야기와 연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모든 걸 포기한 채 고향인 갈대아 우르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거나, 또는 자식 교육을 위해서 강남으로만 몰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은 아브라함이 끈기 있게 기다려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선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 자식이 없다는 불안 때문에 자신의 계산대로만 그것을 성취하려고 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생명을 약속하신 그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생명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8b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우리는 큰 용기를 얻어 우리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
성서기자는 왜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말할까요? 피난처라는 단어는 시편에도 자주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의 삶이 별로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시대나 또는 본문이 기록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나 끊임없이 생존의 위험이 따랐습니다. 시대마다 종류는 달랐지만 생존의 위험은 늘 그대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후손이 없다는 사실이 생존의 위험이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경우는 유대교와 로마권력의 핍박이 생존의 위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피난처로 삼았으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그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이 피난처였을까요?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기는 했지만 이삭 하나뿐이었습니다. 서자인 이스마엘은 이삭이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 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삭을 얻었지만 그것으로 완전히 생존의 위기가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위기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집트 노예생활, 광야생활, 바벨론 포로생활 등등, 이스라엘은 생존의 위기를 거듭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그런 위기를 단숨에 벗은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피난처라는 말은 모든 문제가 일시에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은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실제적인 위기가 있지만 생명을 지키시는 약속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희망의 길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우리가 희망을 굳게 잡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희망은 아브라함이 희망했던 땅과 후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땅과 후손을 통해서 생명이 보존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과는 다른 생명을 희망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19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이 희망은 닻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주며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 이런 문장은 여러분에게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우리의 영혼이라니, 하늘 성전의 지성소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요? 우리 앞에 놓인 희망으로 우리의 영혼이 보호를 받으며 결국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이런 용어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생명사건과 연관됩니다. 영혼은 우리 생명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모르듯이 말입니다. 뇌를 해부하면 거기에 마음이 들어있을까요? 우리의 가슴을 열어보면 거기에 있을까요? 그러나 인간의 몸과 마음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늘 성전의 지성소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이데아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면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고대인들이 우주의 하늘을 그런 지성소로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런 공간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하늘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생명의 원천과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저는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 그것을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믿습니다. 씨앗들은 꽃의 세계를 완전히 인식할 수는 없어도 그것을 믿을 수 있듯이,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듯이 우리는 생명의 원천인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갈 것을 믿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게 곧 희망입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의 “꿈은 이루어진다.”는 차원에서의 희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우리의 희망입니다. 부활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고 우리를 하늘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가게 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18b절이 말하는 “우리 앞에 놓인 희망”입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 삶을 안전하게 하는 닻입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는 20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보다 앞서 그곳에 들어가셨다고 말입니다. 지성소는 말 그대로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흡사 씨앗에서 꽃이 피듯이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생명의 제사를 드려주시는 대사제가 되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의 희망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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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똑소리

November 14, 2006
*.204.70.4

"지금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거나, 또는 자식 교육을 위해서 강남으로만 몰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은 아브라함이 끈기 있게 기다려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의 글을 읽다보니까 저의 삶을 <소유와 불안>의 관점에서 다시한 번 성찰해 보게 되는군요.
실은 제 이름으로 집 한 채 보유하지는 못했지만 보험은 든 게 있거든요.
한 때 보험이 과연 기독교인에게 신앙적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해 본적이 있지만
현실적인 여건에 밀려 과감하게 보험을 가입하긴 했는데
이게 잘 한 행동인지 아직까지 확신이 서질 않는군요.
그렇다고 죄책감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기독교인의 보험가입(혹은 주식투자)과 신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문제인지
정목사님의 고견을 한 번 들어보고 싶군요.
다비안들의 의견도 괜찮구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14, 2006
*.150.14.177

보험은 사회 안전망이니까 필요한 거겠지요.
그게 개인에게만 맡기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게 필요하겠지요.
그리스도인이 집을 소유하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내가 집 소유와 보험 같은 것이 불신앙적이라는 그런 뉘앙스로 말했나요?
오늘 이 사회가 개인주의에 떨어지지 말고
공동체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합니다.
현재 이런 부분이 우리에게 지나칠 정도로 부족하니까요.
북유럽의 모델이 그런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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