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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대림절 조회 수 18138 추천 수 0 2012.12.02 23:49:56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202.mp3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대림절 제1주, 2012년 12월2일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18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사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서의 역사적 배경은 유다의 멸망입니다. 당시 근동의 신흥 제국이었던 바벨론은 유다와 다투다가 기원전 588년부터는 아예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유다는 이집트에 구조를 요청하면서 1년 동안 버텼지만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기원전 587년 7월에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의 총공격을 받아 함락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의 전쟁은 완전히 ‘제로섬’ 게임입니다. 전쟁에서 지면 모든 걸 잃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궁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사용되던 귀한 집기들은 다 약탈당했습니다. 그리고 귀족과 지식인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갔고, 유다 지역은 바벨론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한 겁니다.

 

예레미야는 그 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수십 년 전부터 선지자 역할을 하면서 조국 유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두고 다른 선지자들과 다투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나냐 같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다를 다시 일으키신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흘렀습니다. 암흑과 같은 바벨론 포로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절망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왜 이방민족에게 패배를 당하고 수모를 당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암담한 미래를 내다보면서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날”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했을까요. 그 내용이 오늘 설교 본문인 렘 33:14-18절에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그 날’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14절은 “...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고 했으며, 15절은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라고 했고, 16절은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렘 23:5,6절과 상응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렘 23:5,6절의 문장은 시 형식이고, 렘 33:14-16절은 산문 형식이라고 합니다. 문장 형태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렘 23:5,6에도 ‘그 날’이 강조됩니다. 5절은 “... 보라. 때가 이르리리...”라고 했으며, 6절은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이게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유대 선지자들의 고유한 영적 시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단순히 행복과 불행이라는 현상으로만 봅니다. 자신이 볼 때 좋은 일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말하고, 거꾸로 나쁜 일이 많으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좋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결국 한평생 롤러코스트를 타듯이 일희일비합니다. 지금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밑바닥에 떨어진 자신들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점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 유다가 망하는 운명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바벨론 포로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의 성취라는 차원에서 삶을 이해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지금 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모든 삶이 무너졌는데, 간절한 기도가 수포로 돌아갔는데, 그게 무슨 말씀의 성취냐고 말입니다. 당연합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민중들과 선지자와의 영적 시각의 차이입니다. 민중들은 현실만 보았지만 선지자는 현실 너머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민중들은 자기가 계획한 인생설계도로만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성취입니다. 어려운 일도 마찬가지임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모든 걸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숙명주의가 옳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으로 악한 운명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에서 벗어난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지금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당장은 실패인 것처럼 보여도 부활의 승리를 거둔 것처럼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떻게 민중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그 말씀이 성취될 그 날이 온다고 외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기도하다가 갑작스럽게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 날’을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선지자의 전통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의 ‘그 날’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분이 죽을 그 날이 속히 옵니다.’라는 사실을 평소에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잘 생각하지 않던 준엄한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매 순간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그 날’로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 날’이 여러분의 삶에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요?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는 불행한 겁니다. 성경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정의와 공의

예레미야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것에 대해서 이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것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1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 정의와 공의는 16절이 가리키는 유대의 구원입니다.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이어지는 17절과 18절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다윗 왕조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성전의 제사 행위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날’에 이루실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유다의 구원을 정의와 공의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거꾸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면 유다가 구원을 받는다고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조국인 유다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서 억압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의한 세력은 바벨론입니다. 당시의 바벨론과 유다는 비교의 대상이 못됩니다. 바벨론은 근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제국이었고, 유다는 여러 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바벨론은 미국이고, 유다는 이라크나 북한입니다.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국력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이 주도하고 있는 고대근동의 억압적인 상황을 헤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상황을 불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어야만 유다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생각할 겁니다. 유다는 국제 경쟁에서 패배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과연 누가 옳을까요? 지금의 이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예레미야의 주장은 옳은가요, 아니면 패배한 자의 넋두리인가요?

 

오늘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됩니다. 국제 질서는 그만 두고 국내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대형마트 규제 문제로 시비가 그치지 않습니다. 대형마트로 인해서 동네의 작은 가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겁니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는 것에 제한을 두기도 하고, 공휴일에 영업을 하지 못하게도 했습니다. 이것을 대형마트 쪽에서는 불공정하다고 여길 겁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영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느냐고 불평합니다. 무엇이 정의이며 공의입니까? 교회 사정도 비슷합니다. 대형교회로 인해서 작은 교회들의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종교적 메리트를 제공하는 대형교회는 점점 더 커지고, 작은 교회는 무기력감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공의입니까? 저는 경제학자도 아니고 사회학자도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이라는 제국이 주도하는 이 세상을 불의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세상의 질서는 악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절대적인 힘으로 지배하고 있는 그런 질서는 정의롭지 못합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냉소적 발언이 진리로 받아들여집니다. 바벨론의 힘 앞에서 유다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게 당시의 국제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거기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실행한 바로 ‘그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날이 오면 유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외칩니다.

 

여러분은 예레미야의 이런 예언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정의와 공의에 대한 그의 예언은 ‘공자 왈’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노이며, 절규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 분노와 절규가 있는지, 아시지요?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투쟁이 수년간 이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고압 송전철탑에 올라가서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힘이 없는 이들의 마지막 분노이자 절규는 아닐까요?

 

다윗의 후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회 정의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편한 생각이 들기도 할 겁니다. 이 세상이 다 그런 건데 어떻게 하라는 거냐,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운동권이 되든지, 최소한 시민운동가가 되라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 기회나 능력이 있는 분들은 그렇게 하면 좋습니다. 직접 그런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문제가 중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기회가 닿는 대로 그런 분과 그런 일을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분노와 절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성취될 날이 온다는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유다 역사에서 실현되었을까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구원과 예루살렘의 안전한 삶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고 팔레스타인에 유다를 재건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유다는 다른 제국에 의해서 계속해서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나라는 없어졌습니다. 자기나라 말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아니 궁극적인 방식으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자신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예언했습니다. 본문 15절에 따르면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이는 다윗에게서 온 ‘공의로운 가지’입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레미야가 말하는 그 다윗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막연했던 ‘그 날’에 일어난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된 부활 생명 사건입니다. 그것이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 약속을 우리는 희망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종말론적 대림 공동체입니다. 바벨론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 세상의 감언이설에 부화뇌동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정의와 공의를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궁극적인 정의와 공의의 세계라 할 수 있는 부활 생명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다시 오십시다. 희망하십시오. 궁극적인 정의와 평화의 순간이 오고 있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으로 대망하십시오. ‘그 날’은 옵니다.(*녹음 파일은 서울샘터교회 예배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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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몽구

December 03, 2012
*.156.139.161

귀한 말씀 늘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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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3, 2012
*.185.31.7

설교를 귀하게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몽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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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피트

December 03, 2012
*.194.139.29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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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3, 2012
*.185.31.7

주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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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December 03, 2012
*.18.118.229

목사님께서 선지자를 역사가에 비유하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역사기록에 대하여 '전달하는 기록'과  '해석된 기록'으로 나누었는데,

최근에는 '모든 역사는 해석된 기록이다.'라는 관점이 많아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의 기록이든 해석된 기록이든 선지자들의 기록은 참 독특한 기록인 것 같습니다.

역사 안에 살면서 역사 밖에서 역사를 보는 눈을 가졌다고 해야할까요?

 

마치 극한상황에서 경험할 수 있는 초감각과 비슷한 인지능력 같고,

자기 밖에서 자신을 보는 것을 경험한다는 일류 스포츠맨들의 이야기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라도 한정된 상황이 아니라 역사라는 거대한 틀을 해석한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마치 꿈같은 이야기 같습니다.

선지자들의 활동 중에는 마치 미치광이와 비슷한 사례도 많은 것 같고 ...

 

이런 능력은 부러워하기도 그렇고,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살아가는 동안 이루어져 가거나 혹은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나 알 수 있는 일 일까요?

 

이런 것을 '역사와 전통'에서 배운다는 것은 마치 수평선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해일을 보는 기분일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맨정신 유지할 자신이 없습니다.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파도를 오히려 즐기는 서퍼들이 있듯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선지자들이 오늘 날에도 우리 주변에 함께 살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하기에

그런 분들을 통해서라도 크신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길이 저에게도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혹시 이런 마음가짐이 좁은 길은 회피하고 쉽고 편안함만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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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3, 2012
*.185.31.7

포크 군,

'높은 파도를 오히려 즐기는 서퍼들이 있다'는 표현이 멋지오.

작두를 타듯이,

백척간두에 올라서듯이

유와 무의 경계에,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 자신을 던지는 이들이

바로 선지자들이 아닌가 모르겠소.

그들이라고 모든 걸 확신한 것은 아니오.

예레미야로 마찬가지요.

역사의 미래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없소.

선지자 아니라 선지자 할아버지라도 못하오.

모든 걸 알아서가 아니라

희망하는 것에 자신을 던진 것이오.

그게 쉽지 않소.

사람들은 희망의 내용을 생각하지 않소.

그걸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선지자요.

그런 선지자는 자신의 예언이 실패해도

과감하게 신탁을 전했소.

그 신탁을 역사적 검증에 맡기고 말이오.

자, 길을 가봅시다.

안개가 가득 낀 숲속의 없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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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December 03, 2012
*.18.118.229

안개가 가득 낀 숲속의 없는 길!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숙명(?)일지 모를 표현인 것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한 것 같은 현실속에서 

확인할 수 없는 무언가를 확신하고 자신을 던지는 삶!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 마더 테레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며 미소를 짓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속에는 미소도 없고 어둠 뿐이라던 테레사 수녀

그런 그녀에게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일 것이라는 밴 엑셈 신부


자기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겁이나고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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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4, 2012
*.185.31.7

그렇소.

하나님을 실체로 경험할 수가 없소.

그분은 어둠, 무, 현묘, 누미노제와 비슷하오.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많은 이들의 하나님 경험은

불꽃이고, 바람이고, 합창소리이고, 얼굴이 아니라 등이고,

그래서 두려움이고 충격이고 놀람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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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예베슈

December 04, 2012
*.196.215.104

아아---
 
정목사님! 감사합니다. 예레미아의 영성이 정목사님의 영적 해석을 통해 저의 영에 와 박히는 느낌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지금은 어떤 지 모르겠지만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초끈이론같은 과목들은 대학에 간 후에야 비로소, 그것도 대부분 전공자에 한해서 수강신청이 되는 그런 수업이었는데 이런 물리학 과목이 초등학교 저학년 과정에서 다루어질 만큼 세상이 진보한다면요, 정목사님이 지금 하신 말씀도 주일학교에서 처음 가르치는 교제의 제 1 장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 이란 제목으로 등장할 것 같습니다.

그 때가 되면 현재 논란 중에 있는 기독교적 이슈들에 대해 우리 후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면서 나름대로 해답을 조금씩 찾아 가리라 생각됩니다.

역시 우린 십일조의 정당성과 이로 인한 개교회주의의 고착, 더 나아가 만인구원사상을 통한 타종교에 대한 관점, 이런 논란 속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겠지만요, 그래도 우리 후손들은 나름대로 그 실마리를 찾아가리라 기대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리라는 믿음 때문이죠. 물론 그 때는 눈부신 발전을 했다지만 그 시대 나름대로의 논란들이 존재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측량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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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4, 2012
*.185.31.7

예배슈 님, 안녕하세요.

제가 역할을 잘해서

예레미야의 영성이 예배슈 님에게까지 전달되었군요. ㅎㅎ

좋은 점을 지적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라고 해도

신학적인 문제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전달 방법론은 아이들의 수준에 어울리게 해야하지만

주제만큼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바로 서야 합니다.

좋은 대림절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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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바람

December 05, 2012
*.88.144.163

목사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상상력에 집중했을 뿐인데 저에게

참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설교가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

요즘 제 임지 문제 때문에 좀 위축되는게 사실인데

목사님 설교를 통해서 다시 힘을 얻습니다.

 

'영혼의 공명'이 있는 설교...

저도 하고 싶습니다 ^ ^

그리고 조만간에 교회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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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5, 2012
*.185.31.7

앗, 노을이의 사진이 바뀌었소이다.

그 사이에 저렇게 많이 자랐군.

모두들 수고가 많았소.

박 목사,

목사의 길이라는 게

때로는 버텨내야 하고,

때로는 버리기도 해야 하고,

또는 눌러 앉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고,

귀를 막기도 하고, 입을 다물기도 하고,

....

쉽지 않소이다.

특히 한국교회처럼 목사 상이 이상한 교회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을 거요.

성자, 폭군,  월급사장, 피정규직, 무당, 교회관리자 ...

여기에 영성가, 선지자, 구도자의 모습도 포함되겠소?

철저하게 자본주의에 물든 한구교회 안에서

영적인 깊이에 천착하는 목회, 설교는 구조적으로 가능하지 않소.

그래도 어쩌겠소.

이왕 선택한 길이니

그분의 통치를 온전히 신뢰하면서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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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바람

December 07, 2012
*.88.144.163

예! 안타깝고 기특한(?) 마음으로 주신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영적인 깊이에 천착하는 목회, 설교는 구조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씀이

용기와 두려움을 동시에 주는 군요.

 

하지만 용기가 두려움을 이길 줄 믿습니다.

이 '용기'는 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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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tulip

December 07, 2012
*.205.72.126

목사님!

설교를 듣고 읽으면서 너무 힘이 되고 명쾌한 느낌이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그 날을 향하여 방향 키를 잡고 놓지 말아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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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8, 2012
*.149.31.175

튤립 님,

사람들이 어렵다고 자주 말하는 제 설교를 듣고

명쾌하게 받아들이셨다니 천만당행입니다.

'그 날'이 우리 모두의 영혼 중심에

굳건하게 자리잡히기를 빕니다.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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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y 15, 2013
*.44.68.186

우리가 악한 운명과 싸우지 않으면 악한 종이 되는가요.
악에 동조도 악의 한 축이지만 악과 중립을 유지하는 것도 자기몸에 악을 반쯤은 섞어 놓은 것이겠지요.
머리는 악인데 손은 선인 기괴한 구조,
머리는 선인데 손이 악인 더 기괴한 구조를 가지고 편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손이 악을 저질렀다고 탓합니다.
공의의 길목을 가려는 나를 내손이 옆으로난 가드레일을 쥐고 놓질 않습니다. 그사이 그나마 미지근했던 공의의 마음마져 식어버립니다.  아무래도 공의의 본질은 유지하되 종류가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내 인생에 서서히 다가 오나봅니다.
철탑위에 김밥은 못올리더라도,
국록을 먹는자들에게 뇌물을 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용기있게 얘기하고
최선을 다해 그런 악을 짚고 일어서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 악에 맞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나의 길을 가는게 공의의 길을 가는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길이아니라.
부활의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 알고 있기에 조금은 거칠지만 공의의 길을 참고 넉넉하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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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0711
953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229
952 기타 자유의 길, 분열의 길, 2월13일 2005-02-13 8604
951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9124
950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9116
949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389
948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183
947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9009
946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8989
945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10070
944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695
943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10024
942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574
941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438
940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283
939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789
93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242
937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756
936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827
935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2049
934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315
933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174
932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775
931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415
930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493
929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564
928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9144
92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565
926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553
925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279
924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1076
923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377
922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924
921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4948
920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718
919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378
918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609
917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7074
916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1919
915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706
914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177
913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693
912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609
911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809
910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595
909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475
908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490
907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472
906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890
905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671
904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853
903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958
90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197
901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755
900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180
899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394
898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334
89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425
896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338
895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5848
894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822
893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915
89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616
891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242
890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10091
889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13423
888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268
887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827
886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835
885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5378
884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955
883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684
882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787
881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9130
880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3662
879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7102
878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638
877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480
876 기타 예언의 성취 2006-08-13 16272
875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8120
874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2023
873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586
872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3408
871 기타 창조 영성 [4] [2] 2006-09-17 15330
870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20171
869 기타 고난 받는 그리스도 [2] [2] 2006-10-01 15398
868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9848
867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746
866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754
865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951
864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4904
863 기타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2] 2006-11-12 15974
862 기타 야훼 찬양! (욜 2:21-27) [3] 2006-11-19 13561
861 대림절 새로운 세상이 온다! [2] 2006-11-26 15504
860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5119
859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905
858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4516
857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902
856 성탄절 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7] 2006-12-31 13113
855 주현절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의 비밀 [5] 2007-01-07 15803
854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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