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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879 추천 수 3 2010.11.14 22: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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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이사야 65:17-25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사 65:17-25), 11월14일, 성령강림절 후 25째 주

 

   새 하늘과 새 땅

     이사야는 오늘 설교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장엄한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요한계시록 21:1절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구약과 신약이 같은 개념의 단어로 말하는 이유는 두 성서가 똑같이 묵시문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시문학은 유대인들의 고유한 세계이해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지금의 세상이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통해서 온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생각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런 사정이 이사야 시대에도 있었고, 요한계시록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말씀드리기 전에 또 하나의 다른 질문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 다른 질문이 앞의 질문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 두 질문의 대답이 사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말은 처음의 창조가 불완전했다는 말인가요? 첫 창조가 불완전하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창세기의 창조 보도에 따르면 하나님이 지은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완전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완전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세상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사실은 모순입니다. 이미 완전하다면 다시 창조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인간의 타락을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게 되었으니까 다시 창조해야만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또 다른 질문이 계속됩니다. 창조가 완전했다면 인간의 타락도 미리 막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나온 이야기가 인간의 자유입니다. 하나님 창조의 완벽성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방식으로 완전한 창조입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타락하게 되었고, 결국 모든 피조물인 세상도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기독교의 기초 교리입니다.

     위의 설명으로 창조와 타락의 관계가 말끔하게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대답은 역사가 끝나는 종말에 주어지겠지만 지금 역사 안에 있는 우리는 역사적인, 즉 잠정적인 대답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도 그런 역사적인 대답을 전하고 있고, 요한계시록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쪽 모두 역사에서 어떤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하나님의 새 창조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게 했습니다. 이사야가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합니다. 지금 이사야가 새 창조의 세계로 묘사하고 있는 내용을 거꾸로 읽으면 그가 어떤 역사를 경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경험한 예루살렘은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노약자와 아이들이 죽어나갑니다.(20) 굶주림과 약탈이 만연합니다.(22) 모든 노동이 헛수고로 돌아갑니다.(23)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파괴되는 사건이 이 말씀의 배경입니다. 그 사건은 예루살렘의 함락입니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초토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족과 지도자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전쟁이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는 여기서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정글에서 포식자가 초식동물을 먹이로 삼는 것과 비슷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사야의 역사 경험

     이사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해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 지도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 왕국을 새롭게 건설하기 시작한 기원전 537년에서 521년 사이라고 합니다. 꿈을 부풀었지만 실제로 새로워지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사야의 활동 이후에 많은 예언자와 제사장들의 노력으로 기원전 515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처럼 기대를 모았으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사야는 성전 봉헌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유대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이 새로워진다는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의 구절입니다.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없고, 기아와 약탈이 없으며, 노동의 정당한 열매를 얻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즐거운 성(城)이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사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일상적인 삶의 내용들입니다. 위대한 정치가가 나오면 해결될 만한 내용입니다. 이사야의 꿈은 복지국가처럼 보입니다. 이런 정도 수준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는 것은 아무리 예언자들의 상상력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쳐 보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인간과 세상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건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여기에 일상적인 삶이 보장되어 있을까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없을까요? 아무런 걱정과 근심 없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사는 사람들은 있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이사야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총체적으로 가난한 북한 주민들 중에서도 살만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우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노숙자들 중에서도 있고,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과 여자들의 부르짖음도 있고, 공권력의 폭력에 삶을 파괴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청업체에서 노동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정치 민주화가 크게 신장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없는 세상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다고 외칩니다. 그런 때가 빨리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사야의 심정을 이심전심으로 이해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전형적인 묵시문학 방식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 65:25) 이런 세상이 와야 더 이상 우는 소리나 부르짖는 소리가 없겠지요. 이런 세상은 우리가 여기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을 한 울타리 안에 넣어보십시오. 이리가 곧 어린 양을 잡아먹습니다. 이 둘이 함께 어울려 지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의 하늘과 지금의 땅에서는 힘이 센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전혀 다른 생명의 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이런 꿈이 없다면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사야의 이런 예언은 성취되었을까요? 예루살렘은 즐거운 성이 되었을까요? 사람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땅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이사야의 희망은 좌절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즐거운 일상이 보장되지 못했습니다. 몇 번의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를 다시 일으키지 못하고 어둠의 세월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말씀 선포는 무의미한 것일까요? 백일몽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를 성공과 실패로만 규정하면 안 됩니다. 당장의 효과만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재단해서도 안 됩니다. 이건 개인의 삶이나 교회활동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의 과정에도 당장 뚜렷하게 효과가 나지 않거나 오히려 실패로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에 천착하는 목회로 인해서 교회가 당장 크게 부흥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목회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비록 실현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긴 하나님의 역사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마치 앞서의 과학자들이 실험을 실패하다가 나중에 어떤 과학자들이 실험에 성공하듯이 이사야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옳은 실패였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새 창조다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후 5백 여 년이 지난 뒤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곧 새 창조의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보십시오. 포도원에서 하루 한 시간 노동한 사람이나 열 시간 노동한 사람에게 똑같이 하루 일당인 데나리온을 주는 포도원 주인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같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 창조가 필수적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다는 이사야의 예언과 영적 호흡을 같이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이 별로 차이가 없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슬람교도들도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언자 전통에 서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단순히 전한 분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복음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첫 창조에도 참여하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이 복잡하게 들리시나요? 예수님의 부활이 그 증거입니다. 부활은 창조 사건입니다. 이전의 생명을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새 창조라는 복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예언자가 아니라 새 창조의 주체이신 메시아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도 모른 채 증언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실현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가 말하는 새 창조와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십시오.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고 마음에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런 창조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참여하게 될 부활의 세계에서는 지금의 경험이 기억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대법관은 훗날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걸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아예 기억도 없습니다. 여기서 신문 돌리며 산 사람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목사와 장로라는 직분이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창조입니다. 너무 막연한가요? 재미가 없을 것 같은가요? 높은 자리와 소유를 확인하는 데서 재미를 찾는 분들은 그렇겠지요. 그런 것에 영혼을 빼앗긴 분들은, 부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에게는 그 세계가 오히려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전혀 다른 즐거움의 세계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 곳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그 생명의 세계가 온전히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가 우리의 참된 생명이며,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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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Epiphany

November 16, 2010
*.238.32.253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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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6, 2010
*.120.170.250

에피파니 님,

닉이 멋있네요.

에피파니는 주현절을 가리키지요?

주님을 뵙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이 거친 세월을 견뎌야겠지요.

저도 할렐루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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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November 17, 2010
*.106.156.126

목사님,

두 번 읽고 한 번 들었지만 주일 날 직접 듣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읽고, 들을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리며

십자가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신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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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7, 2010
*.120.170.250

이일녀 집사님,

인터넷이 편리한 점도 많지요?

이제 신자들이 영적인 훈련에서

한 교회에 묶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창조와 그것의 종말론적 완성,

그리고 부활생명은 생각할수록 신비롭습니다.

그것이 단지 신앙지식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영적인 삶에 분명한 내용으로 자리를 잡아야겠지요.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하심에

우리의 영혼을 열어놓는 일이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신비에 기쁨으로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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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주님의평화

November 17, 2010
*.215.155.235

목사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설교문중에서는 약간 의문점이 있어 오랜만에 댓글을 남깁니다.

이사야의 '기억하지 못한다'라는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성도들의 부활과 질적으로 다른 부활로 이해해야하는 모순이 생기진 않는지요?

예수님은 분명 부활의 첫 열매셨는데, 그는 부활후 죽음 이전의 모든 것을 기억하셨을뿐 아니라,

도마와의 대화에서 보면, 손과 옆구리에 십자가형의 상처마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세계와 부활한 이들이 완전 불연속성을 갖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의 성화와 성도의 삶의 '경주'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질수 있다는 결론으로까지 도달하지 않을까요?

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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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7, 2010
*.120.170.250

주님의평화 님,

무슨 일을 하는 분이세요.

중요한 질문을 주셨기에 궁금해서요.

설교를 접하면서 핵심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명이 필요한 대목을 잡아내는 일도 필요하거든요.

주신 질문에 대답하려면 제가 땀을 좀 흘려야겠습니다.

(오늘밤 11시15분에 추적60분에서 천안함에 관해 보도한다고 해서

빨리 대글을 정리하고 그걸 시청하려고 합니다. ㅎㅎ)

예수님의 부활장면에 대한 설명만 해도 되겠지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설명은

신문기자가 어떤 사건을 보도하는 듯한 실증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몇 가지 부활전승 이야기로 전한 겁니다.

복음서의 보도만으로 부활의 실체를 가려낼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가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동안 지상에서 활동하다가

승천하신 것으로 보도합니다.

그리고 또 수년이 흐른 뒤에 바울에게도 나타나신 것으로 말합니다.

승천하셨다가 다시 내려오신 것은 물론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에게나 경험될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폐쇄적으로 경험된 사건이었습니다.

도마의 대화에 나오는 손과 옆구리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지

부활 후에도 상처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의 세계에 참여하면

2천년 유대 남자였던 바로 그런 모습의 예수님을 그대로 만나게 될까요?

이 질문은 이 세상에서 노력이 저 세상에도 아무런 가치가 없냐는 질문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가치가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 세상은 장가 가고 시집가는 게 아니듯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삶의 방식이 그대로 연장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전혀 다른 가치의 삶이라고 하는 게 옳습니다.

부활의 세계에서 지상의 모든 삶이 기억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훼손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치가 전혀 의미가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거기서는 모두가 왕자처럼 살게 될 텐데,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 무의미하게 살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지금까지의 내 설명이 정답은 아닙니다.

정답에 이르는 작은 길을 안내한 것뿐입니다.

계속 다른 길도 찾아보세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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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November 19, 2010
*.23.36.245

제 소견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무엇이든 가능하시고 무엇이든지 아시고 태초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어떤 모습을 보이고자 하신다면 충분히 보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

 

성서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가 우리의 신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마저도 사실일 수 있기에 어떠한 형태로 어떻게 부활하느냐는

직접 겪어볼 때까지는 제가 감히 생각이라도 해볼 수 없는 범주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성화나 믿음의 경주가 죽음 후에, 부활 후에 어떠한 댓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일들을 해나가는 것 뿐이기에

부활 후에 상급이 전혀 주어지지 않더라도(상급이 있다는 가정하에)

이 땅에서 열심히 믿음의 경주를 하며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의무이며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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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9, 2010
*.120.170.250

눈사람 님,

위의 질문에 좋은 길을 말씀하셨네요.

각자가 방향을 바르게 잡고 있으면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의 영적인 길을 갈 수 있다는 게

이런 데서도 확인이 되는군요.

제 설명보다 더 확실하고, 더 긍정적이고,

더 정통적이고, 더 신앙적인 길을 말씀하셨네요. ㅎㅎ

자, 우리 각자 자리에서

믿음의 경주를 잘해봅시다.

긴 호흡으로, 그러나 멈추지 말고,

확신에 거하나 맹신에 처하지 말고,

그분의 종말론적 약속을 신뢰하고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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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주님의평화

November 28, 2010
*.215.155.235

질문을 드려놓고 오랜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정목사님과 눈사람님의 답변을 읽으면서 미소짓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정답'을 요구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고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단지, 정목사님의 설교에 약간의 균형을 더하는 질문이었다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두분의 좋은 답변들에 감사를 드립니다.

눈사람님의 답변은 요약하면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상급이라는 의미시겠죠.

사실 부활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객관적인 리소스가 매우 한정적입니다. 성서에 있는 텍스트가 전부인 셈인데,

그 텍스트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신구약 전체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제자들과 사도들의 '증언' 입니다.

이 문제는 부활에 대한 이 아름다운 두 개의 기둥이 우리 앞에 '현실'로 드러나는 날, 우리 모두 함께 기쁨 가운데 그 경이로운 신비를 맞이하기로 합시다. ^^ (물론 아직도 우리는 연구해야 할 책임이 있겠지만요.)

아 그리고 목사님, 저는 성공회 뉴욕 롱아일랜드 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준비중인 Aspirant 입니다. 올해 2월에 최종 결정이 내려지는데, 주교님의 허락을 받게 되면 신학교에 진학하고 3-4년후 졸업하면 사제서품을 받게 되겠지요.

아직까진 제게 성소(calling)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는 중입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기억하시게 되시면 염치없지만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외람된 질문으로 많이 바쁘신 분의 시간을 빼앗었더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정요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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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 성령강림절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13] 2007-07-15 13482
82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1154
826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794
825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786
824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10972
823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2023
822 성령강림절 믿음의 완성 [26] 2007-08-26 15276
821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1133
820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742
819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539
818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622
817 성령강림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9] [1] 2007-09-30 17371
816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741
815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811
814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343
813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737
812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453
811 성령강림절 거짓 예배, 참된 예배 [7] 2007-11-11 15713
810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296
809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730
808 대림절 영적 각성 [19] 2007-12-02 14916
807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4577
806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5036
805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755
804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630
803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549
80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5001
801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437
800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569
799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369
798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845
79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858
796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970
795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191
794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964
793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895
79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518
791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665
790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321
789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136
788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828
78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397
786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499
785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612
784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8031
783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802
78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979
781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8021
780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450
779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632
778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7041
7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984
776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483
775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734
774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8078
773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993
77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416
77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366
770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374
769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670
768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433
76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914
766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303
765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2090
764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242
763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632
76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1080
761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784
760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747
759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846
758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871
75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630
75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756
755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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