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창조절 조회 수 10624 추천 수 0 2016.11.06 19:49:36
설교듣기 : https://youtu.be/UTdzKMk_VE4 
설교보기 : https://youtu.be/aF17xN50CFc 
성경본문 : 누가복음 20:27-38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20:27-38, 창조절 열번째 주일, 2016116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논쟁을 좋아하셨을까요? 옳고 그름을 놓고 서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논쟁 자체를 예수님이 즐겨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피하지 않으셨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반복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누가복음 20장에는 그런 유의 사람들이 여럿 나옵니다. 20:1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와서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어서 권위에 대한 논쟁이 이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논쟁 과정에서 기분이 상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눅 20:19절에 따르면 은밀하게 대리인을 예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이런 질문들은 다 예수를 함정에 빠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유대교의 고위 신학자이며 성직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전통을 위태롭게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상황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고, 예수님도 적당하게 타협할 수 없어서 예수님 공생애 3년 동안 이런 충돌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20:27절 이하에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질문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모세의 권위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 신 25:5절을 인용했습니다. 유대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전통이 있었습니다. 여러 형제가 있는 집에 어떤 여자가 시집 와서 살다가 자식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 시댁 형제들 중의 한 사람과 결혼해서 죽은 사람의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형제들에게는 그런 의무가 있었습니다. 만약 형제들이 이 여자와 결혼하는 걸 원치 않으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해야 합니다. 이런 전통을 근거로 해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큰 형이 한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둘째가 죽은 형의 아내와 결혼했지만 그도 역시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일곱 형제가 다 죽었다고 한다면 부활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들의 질문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이 질문은 누가 봐도 질문을 위한 질문이지 실제로 진리를 알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 아닙니다. 둘째, 이 질문에는 부활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들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 개념을 현재의 삶이 연장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가 없는데, 부활에 대한 이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교적 자세하게 답변하셨습니다. 답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결혼 너머

예수님은 34절 이하에서 이 세상에서는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함께 살지만, 죽은 다음 부활의 세계에서는 결혼이 필요 없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방식으로 삶을 경험했기 때문에 결혼도 없고 자녀도 없다면 그게 무슨 삶이고, 또 무슨 즐거움으로 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질문하고 있는 사두개인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이후 부활의 세상에 결혼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를 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이 세상에 결혼 제도가 생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자녀를 낳으려는 것입니다. 그게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녀를 낳지 않아도 됩니다. 자녀가 없어도 된다면 결혼 제도가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을 천사와 동등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미래가 바로 죽음 이후 부활에 일어날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죽을 수 없다거나, 천사와 동등이라거나 부활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는 결혼으로 표상되는 세상의 방식입니다. 부활은 그것 너머의 생명 세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가리키는 핵심은, 죽음 이후의 부활이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삶에만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현들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죽음 이후의 부활 세상에서도 결혼과 가정이 계속되느냐의 여부에만, 즉 거기서도 잘 먹고 잘 사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거기서 황금 면류관을 받는다는 성경의 표현을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복지의 극대화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각의 차원을 바꿔야 합니다.


장석주 시인의 시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는 다음과 같습니다.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지붕 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느리게,/ 고요히,// ,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 이 시가 그려내는 풍광이 눈에 그려집니다. 저수지 건너편에 외딴 함석지붕의 집이 한 채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함석지붕은 타악기가 됩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겠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처로 보입니다. 그 집의 굴뚝에서 빠져나오는 연기에서 이 시인은 삶의 극치를 경험합니다. 그걸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똑같은 광경을 보고 어떤 사람은 부동산 투기를 생각할 거고, 또 어떤 이는 함석지붕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낄 겁니다. 시인은 천천히 솟아올라 옆으로 펴지는 연기에서 느림을 삶의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생각이 다른 거지요.


구체적으로 대답해보십시오. 죽음 이후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부활의 나라를 어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기서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거기서는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처럼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천사처럼 된다면 여기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행, 불행이 없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여기서 살기 위해서 기울이는 모든 본능적인 것들도 사라집니다. 그게 실질적으로 옳습니다. 죽은 사람을 직접 보신 적이 있습니까? 먼지가 된 그에게는 재산도 무의미하고, 가족도 무의미합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두려움이고 저주이고 어둠입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어둠의 나라인 땅속 스올로 내려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있는 사두개인들도 그런 스올개념을 바탕에 깔고 일곱 형제와 한 여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죽음의 실존에 관한 말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두렵거나 아니면 체념을 하고, 엉뚱한 망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죽어 천국에 가면 정말 행복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먼저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맛난 먹을 게 지천으로 널려 있고, 병에 걸리지도 않고, 장애도 다 고침을 받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세상일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기는 합니다. 그런 구절들은 다 은유이자 비유입니다. 아무도 죽음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에 대한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집에 살게 될 거라고 말하는 설교자들은 미숙하거나 거짓말 약장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의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차원을, 더 깊은 차원을 보게 합니다. 마치 똑같은 함석지붕의 굴뚝에서 솟아나는 연기를 보지만 서로 다른 삶을 경험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똑같은 저주스러운 죽음 앞에서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뭘까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저는 예수님이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로 답변하셨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답변은 부활을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이 연장되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대답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르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은 사두개인들이 모세의 전통 운운하면서 질문한 것에 걸맞도록 모세에 관한 구약성경의 한 대목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인용한 구약성경은 출 3:6절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아주 특별한 물리현상으로 보이지만 과학적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 현상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다음입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구절을 인용한 예수님은 여기에 당신 자신의 주석을 붙입니다. 38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일종의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들이 죽었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문자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아주 오래 전에 죽어서 그들의 뼈도 추려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말은 생물학적인 차원과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이런 말씀을 이해하려면 생명에 대한 이해를 더 넓혀야만 합니다. 단순히 숨쉬고, 심장이 뛰고, 뇌가 활동하는 몸만을 생명으로 알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위 구절의 후반부를 보십시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간단하고 분명한 말씀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즉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나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 똑같이 살아 있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는 지금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궁극적인 실체를 낱낱이 아는 게 아닙니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우선 살아 있다는 것이 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루 세끼 밥을 먹고, 숨을 일분에 열댓 번쯤 쉬고, 맥박이 70번쯤 뛰면 일단 살아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80년이나 100년쯤 살겠지요. 그리고 죽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죽기 전까지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시간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습니다. 앞으로 100년 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지금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100년 후에는 사라지고 없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잠정적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있다 하나 궁극적으로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겁니다.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살아있는 겁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느냐, 하고 묻고 싶으신가요? 그걸 누가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생명의 주인이 아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해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한 생각이 넓어지면 그 사실을 좀더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과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모세 전승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십니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은 존재의 근거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서 모든 피조물들은 존재의 근거가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생명은 그분 안에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2) 1:8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사람은 아무도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은 마지막 때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그 마지막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3)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일컬어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규정받을 뿐입니다. 주신 것을 받아 누릴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다면 살아있다거나 죽었다는 말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단지 늙어서 죽는 것으로 생명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생명은 단백질로 구성된 몸을 가리킵니다. 그 몸이 생명의 구성요소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생명이 그런 단백질 덩어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고 완성할 생명은 그것보다 훨씬 방대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일곱 명 형제들과 결혼한 여자의 운명에 대한 질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주장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죽음 이후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건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현대인들이 겉으로는 자주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계속 남아 있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유형의 대답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인간이 죽으면 스올에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무덤을 열어보면 그들의 생각이 무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죽으면 모든 게 끝장난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하게 열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 이후에 대한 허무가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다른 믿음으로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죽음 이후에 단순히 스올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모든 생명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비밀한 방식으로, 즉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허무하게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고유한 방식으로 지키십니다.



profile

[레벨:13]석진혁

November 06, 2016
*.73.245.202

아프리카 Tv로 예배를 보면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울산에도 샘터교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설교말씀이 은혜가 많이 되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6
*.164.153.48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분들을 위해서 인터넷 방송을 보내고 있으니

웬만하면 인근 교회에 직접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게 좋습니다.

임시방편으로나마 아프리카 티브이 대구샘터교회 예배를 통해서

설교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 하니,

저의 입장에서도 고맙습니다.

인터넷 방송이 더 활성화되는 시대가 되면

아마 온라인 신자들도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그게 어떤 파급을 불러올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profile

[레벨:7]소명

November 07, 2016
*.143.125.39

죽음이후에도 여전히 살게 하실 하나님이 계시기에 걱정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지금의 현실에서도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거겠죠?

나이가 들어감이 좋은것 하나는 무엇이든 느긋하게 바라보게 되고

삶의 지평이 조금씩 넓어진다는것~~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나날입니다ㅎㅎ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6
*.164.153.48

소명 님, 나이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거 맞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는 것이겠지요.

죽음 이후 부활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왜 '살아있음'인지를

더 명료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우리 기독교인의 인생이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profile

[레벨:21]주안

November 07, 2016
*.69.199.48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

지금도 함께하시는 주님!

영원히 생명을 주실 주님!

그래서 참~좋습니다~^^

오직 기쁨과 감사로 찬양드립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총 아래 영생함을

확신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6
*.164.153.48

확신의 내용을 채워가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주안 님이 좋아하는 찬양의 본래 의미만 잘 알아도

그 내용을 채우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 내용이 우리를 다시 확신으로 이끌어줄 겁니다.

profile

[레벨:18]은나라

November 07, 2016
*.164.89.102

죽음 이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삶이군요? 하나님과 우리와 본질이 다르듯..

현재의 삶도 마찬가기구요.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육체 가운데 살지만, 그리스도와 하나된 삶

이 땅에서 육체가운데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게 뭔지, 좀 더 확실하게 잡힙니다.

이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이낳고 직장다니고 병들고 사고나고 문제가운데 있고 죽는 삶을 다 겪으며 살지만, 그 안에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 너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받고 누려야하는 생명, 그 생명의 신비와 고귀함을 조금은 알것도 같습니다. 감사드려요. 정목사님~^^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6
*.164.153.48

우리의 현재와 미래, 궁극적으로 죽음과 그 이후까지

하나님의 자유에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삶의 태도가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점점 성숙해지면서

지금 여기서의 실존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광휘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설명이 겉돌지 않고 실질적인 것으로 다가오기를...

profile

[레벨:18]부스러기 은혜

November 08, 2016
*.240.61.228

지금 여기서의 실존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광휘에 휩싸이게 된다...

종말론적 완성으로 누릴 부활생명을 오늘 여기서 미리 경험하며 사는 삶

오늘 내 안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목사님의 표현대로 '광휘에 휩싸이는 삶'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될때 그 느낌을 언어로 표현할수 있을까요?

자유 해방
세상에서 얻을수 없는 평안 안식 기쁨
영혼의 깊은 안도 평화
모든 지각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이런 표현으로도 부족하기만 할것 같은데,
성경속에서 '광휘에 휩싸이는 삶'의 느낌을 달리
표현 한 구절이 있는가 해서 문의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8, 2016
*.164.153.48

1) 모세의 가시떨기 나무 경험

2) 아브라함의 밤하늘 별을 세는 경험

3) 이사야의 스랍들 경험

4) 시편기자들의 무수한 신앙고백들

5) 욥의 귀로 듣는 데서 눈으로 보는 경험

6) 마리아의 천사 경험

7) 바울의 예수부활 경험

8) 루터의 칭의 경험

9)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 경험

10) 바르트의 절대타자 경험

....

무수히 많지요.

이런 걸 원하는 질문이 아니지요?

하나님을 생명의 광휘로 경험하는 걸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시 경험과 비슷한 거라서 보이는 한 순간을 포착해서

은유, 서사 등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더 구체적인 것을 원하면 사이비 이단 교주에게 가야 합니다. ㅎㅎ

profile

[레벨:18]은나라

November 08, 2016
*.105.196.251

하나님안에만 있는 영원한생명은..우리가 숨을 쉬는 생명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완성시킬 생명이며,

하나님 안에서 비밀한 방식으로,즉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는것이기에..

지금 여기서의 실존도 하나님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속에 그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이라는 광휘에 휩싸이게 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한가지 이글과는 상관없는 궁금함인데요, 이름 밑에 밑의 숫자가 무엇인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8, 2016
*.164.153.48

이름 밑의 숫자가 두 줄 나옵니다.

첫째 줄의 숫자는 글을 올린 일시이고,

둘재 줄의 숫자는 사용하신 컴퓨터의 고유번호입니다.

컴퓨터 고유번호를 보면 어느 지역인지도 알 수 있다네요.

신기하지요? 나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profile

[레벨:16]맑은그늘

November 08, 2016
*.212.139.114

설교링크입니다.

편집 : https://youtu.be/aF17xN50CFc

무편집 : 준비중

profile

[레벨:6]시유

November 08, 2016
*.255.175.193

가지런히 챙겨놓으신 신발 어설프게 신었더니 슬그머니 들어가는군요. 이 놀라운 기쁨을 놓치지않게 날마다 신발끈을 조여야겠습니다.
profile

[레벨:3]floer

November 10, 2016
*.111.3.79

유튜브로 계속 올려주시는건가요? 제가 있는곳에서는 아프리가카 잘 안되는것 같아서요.

profile

[레벨:16]맑은그늘

November 10, 2016
*.212.139.114

앞으로 계속 올립니다.

2016년 1월부터 현재까지 설교는 모두 올렸고요.

2015년부터 이전 설교도 준비되면 유튜브에 올릴 예정입니다.

profile

[레벨:41]새하늘

November 11, 2016
*.116.65.251

맑은그늘님의 고생 때문에 저는 편하게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21]주안

November 11, 2016
*.69.199.48

맑은그늘님!

덕분에 잘 듣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3]floer

November 11, 2016
*.130.157.217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29]유니스

November 08, 2016
*.166.228.196

목사님,

살아있다는 것은 죽기 전까지의 현상에 불과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살아있슴'은 지금 이 자리인데요...

아무리 100년 미만의 삶이지만 하루하루가 무겁고 힘드는데

죽기 위해서 거쳐가는 시간에 불과하다면 

왜 사는 걸까요.

죽어서 이 땅의 연장선을 누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지금의 내 숨이 붙어있는 동안의 의미가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죽음 이후의 질문'에 대한 것이지만

지금의 삶에 대한 열정이나 소망의 값어치가 떨어진다면 

다른 질적인 생명에 대한 기대감도 희미해지는 것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8, 2016
*.164.153.48

이번 설교를 유니스 님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집중해서 듣지 않으셨군요. ㅎㅎ

아마 내 설명이 충분하지 못했겠지요.

죽기 전까지의 현상은 생물학적으로의 생명을 가리키니

그것을 뚫고 나가야만 성경이 말하는 부활 생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삶이 '죽기 위해서 거쳐가는 시간에 불과하다'고 내가 말한 적이 없어요.

다만 지금의 삶이 잠정적이고 무상하다고는 말했겠지요.

이게 똑같은 말이 아니랍니다.

잠정적이고 무상하다는 말은 죽음 이전의 삶에 대한 성격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 두 가지 관점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대글 앞 부분에서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살아있음'의 의미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기독교인들은 이미 '부활 신앙을 통해서'라는 답을 알고 있어요.

문제는 그 부활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지요.

설교 후반부에 인용한 '하나님 안에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는 말씀을

좀더 깊이, 좀더 오래 생각하다보면 어느 정도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살아있음의 차원이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미래가 나무라 하더라도, 바위라 하더라도, 강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 '살아있는' 것이에요.

이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오늘 이 현실의 삶을 새롭게 이해할 것이고,

유니스 님이 걱정하는 '삶에 대한 열정'도 단순히 표면적으로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뜨거워질 겁니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삶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이요.

profile

[레벨:17]홍새로

November 09, 2016
*.182.105.202

이제 죽음 이후에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 하게 됨을 목사님 말씀으로 듣고나니,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 허무함만 주는것이 아니라, 돌아갈 집이 있는 여행자의 안식을 기대하는 마음처럼 평안해집니다.
고대인들은 단순히 스올에 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운명으로 저희들이 알게 됨이 하나님의 사랑일테지요. 이제 가을이 가을이어서 좋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9, 2016
*.164.153.48

그렇습니다.

종말을 희망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서,

사실 모든 신앙과 신학은 종말론적인 것인데, 

지금 여기서의 삶도 생명 충만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반복적으로 되새겨야만 기독교 신앙이 유지됩니다.

그런 되새김을 위한 의식이 바로 예배이지요.

그걸 안다면 예배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profile

[레벨:4]칸타빌레

November 14, 2016
*.173.64.197

안녕하세요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여러 해 들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새롭게 깨달아 가는 중에 있는 성도 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서  자주 강조되는 생명의 완성...하나님이 얘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것을 고대하고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번주 설교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에서도 생명의 완성을 설교하셨는데 '하지만 성경에는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하는지가 제일 힘듬니다 .


사랑의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구하고 나머지를 멸망시키실거라는 구절들.....원초적이고 비신앙인같은 질문이지만 계속해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기에 이렇게 감히 여쭈어 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14, 2016
*.164.153.48

칸타빌레 님, 안녕하세요?

질문은 진리의 문이고,

질문은 자체 안에 답을 갖고 있으니

꾸준히 기독교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하십시요.

말씀하신 '심판과 멸망'에 대한 구절들은

맥락을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구절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히 답변드립니다.

1) 심판과 멸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돋보이게 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다.

2) 구원에서 일부의 사람을 제외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위배된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까지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4) 구원의 깊이는 사람이 다 헤아리지 못하니 그걸로 사람들을 단죄하면 안 된다.

5) 심판과 멸망은 생명 아닌 것들을 제거한다는 것이지 일부 사람들을 제외시킨다는 게 아니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이유가 '너무나' 많다.

profile

[레벨:4]칸타빌레

November 15, 2016
*.173.64.197

목사님 답변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도 목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세상을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온 세상의 큰 기쁨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고 멸망 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헤아리지 못할 구원의 깊이...조금씩 알아가며 감격하며 생명을 노래하며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1954
852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494
851 주현절 예레미야의 소명 [11] 2007-01-28 15878
850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3107
849 주현절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 15:12-19) [37] 2007-02-11 16164
848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544
847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657
846 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9] 2007-03-04 13606
845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446
844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572
843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722
842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984
841 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4] 2007-04-08 13017
840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690
839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891
838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307
837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3914
836 부활절 누가 내 어머니인가? [16] 2007-05-13 15584
835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888
834 성령강림절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8] 2007-05-27 14271
833 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11] 2007-06-03 12312
832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953
831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796
830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778
829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860
828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894
827 성령강림절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13] 2007-07-15 13449
82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1121
825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760
824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752
823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10938
822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1987
821 성령강림절 믿음의 완성 [26] 2007-08-26 15247
820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1099
819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708
818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501
817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592
816 성령강림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9] [1] 2007-09-30 17332
815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711
814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777
813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304
812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699
811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420
810 성령강림절 거짓 예배, 참된 예배 [7] 2007-11-11 15682
809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260
808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699
807 대림절 영적 각성 [19] 2007-12-02 14838
806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4501
805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965
804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681
803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582
802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508
801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970
800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405
799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537
798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339
797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807
796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828
795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923
794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159
793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933
792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865
791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483
790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628
789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284
788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105
787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790
786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361
785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457
784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576
783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974
782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749
781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926
780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979
779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401
778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588
77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7001
776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927
775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443
774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684
773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8053
772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969
77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381
770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334
769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344
768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635
76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387
766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879
765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276
764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2055
763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202
762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96
761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1046
760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747
759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711
758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790
757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839
756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95
755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716
754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87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