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929 추천 수 0 2018.06.24 21:49:13
설교듣기 : https://youtu.be/rxNrWCJNynE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마가복음 4:35-41 

두려움의 대상

4:35-41,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2018624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광풍 이야기

오늘 설교 본문인 막 4:35-41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대단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어느 정도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허황되게 읽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자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배를 빌렸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원래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살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니까 그곳에 여전히 배를 모는 친구들이 많았을 겁니다. 예수님 일행이 탄 배만 있었던 게 아니라 다른 배들도 뒤따랐다고 합니다. 다른 배에는 예수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탔겠지요. 항해하는 도중에 돌풍을 만났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인근의 헬몬 산에서 내려온 찬 기류가 호수의 따뜻한 기류와 만나서 종종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물결이 높아지고 물이 갑판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비상사태입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우리가 흔하게 보는 것들입니다. 지하 룸살롱에 불이 나거나 관광버스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일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개 패닉 상태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피해를 더 키우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엄중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배의 고물(뒷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잠들었다고 합니다. 피곤해서 잠시 존 것인지, 그냥 누워만 있었던 것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의 그런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 상황을 38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갈릴리 호수를 항해하는 중이라면 예수님은 고물이 아니라 이물에 앉거나 서서 폼 나게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뭔가 깊은 생각을 하셨어야만 합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했었어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배 뒷자리에서 잠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뭔가 밸런스가 깨진 광경입니다. 이는 요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라는 신탁을 받았지만 나름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것이었는데, 니느웨와는 완전히 다른 지역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광풍으로 배가 비상사태에 빠졌을 때 배의 가장 아래층 선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든 예수를 본 제자들은 예수를 깨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죽게 된 우리를 왜 도와주지 않으십니까?’ 이런 표현도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배를 다루는 기술은 예수에게 없습니다. 제자들이 훨씬 더 전문가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겁니다. ‘선생님,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그만 주무시고 일단 빨리 일어나세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예전에 이런 일들을 많이 경험해본 터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상식적인 것이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지하 건물이 무너지거나 불이 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나서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서 나보다 더 전문가인 집사들이 나서고, 제가 그분들의 말을 따를 겁니다. 오늘 이야기는 일반적인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엇일까요? 39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 잔잔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고대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헬라 신화에는 바다를 다스리는 신 포세이돈이 나옵니다. 포세이돈은 바다의 바람과 파도를 일으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는 신입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예수가 자연의 악한 능력까지 제어할 수 있는 초능력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는 복음서에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나옵니다.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9:25). 오늘 이야기에 이어지는 막 5장에는 정신질환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5:8). 귀신이 2천 마리 이상의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돼지 떼가 몽땅 호수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저런 놀라운 초능력이 있는 걸 보니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분명한 거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이야기가 헬라 신화나 여러 나라의 영웅 설화에 불과하니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느 쪽입니까?

만약 예수가 바람과 파도까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예수의 운명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처형 사건은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 죽음 앞에서 힘들어했습니다. 기도 중에 흘린 땀방울이 핏방울로 보일 정도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당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면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신적인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무능력을 그대로 보이신 것입니다. 자연현상까지 통제할 수 있는 기세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늘의 불을 내려서 자신을 십자가형으로 몰고 간 산헤드린 의원들과 빌라도 총독과 사형집행인들을 압도했었어야만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예수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가버나움을 끼고 있어서 예수에게는 친근한 장소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는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돌풍에 대해서도 들었고, 직접 그런 경험도 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강행군으로 인해서 피곤했습니다. 예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군중들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역으로 가는 중입니다. 어부들이 돛을 올리고 배를 모는 사이에 예수는 고물에 누워서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배가 크게 흔들렸지만 깊은 잠에 취했기에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비몽사몽 중에 제자들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걸 느꼈습니다. 잠에서 빠져나오면서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예수는 돌풍이 곧 잠잠해지리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겠지요. ‘여러분, 괜찮습니다. 곧 좋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내가 기도드리겠습니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돌풍이 그치자 제자들은 예수가 바람과 파도를 꾸짖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예수의 구원 능력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람과 파도를 예수가 다스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구원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구원 능력을 경험한 사람의 눈에는 바람과 바다도 예수에 의해서 제어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게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바람과 파도 역시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게 성경의 자연관입니다. 이런 성경의 자연관을 믿는 저는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에 대한 거부감도 없고, 지나친 기대감도 없습니다. 자연과학의 결과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연과학으로 인간과 세계가 구원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견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구원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것이니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으며, 곧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과감하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로부터의 구원이 당시에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더 많아졌습니다.

어떤 성서주석학자들은 오늘 이야기를 초기 교회가 처한 영적인 실존에 대한 설명으로 읽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배는 교회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세상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폭풍을 만난 배처럼 온갖 세력에 의해서 흔들리고 난파의 위험에 떨어지곤 합니다. 마가복음은 기원후 70년경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함락된 해가 70년입니다. 그 이전부터 유대와 로마와의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교회는 로마 제국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습니다. 그 상황은 공포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잠에 떨어진 예수에게 했던 말이 바로 당시 교회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호소는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죽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난파선의 승객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호소도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질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죽음과 비슷한 재난과 고난에 종종 떨어집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이 잘 풀려서 난파선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산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행복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게 되었다는 말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실제로 죽는 날이 오기도 하고,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고 주변과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주변에 난파선과 같은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요. 난민들이 세계 곳곳에서 생기고 국내에서도 난민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의학이 크게 발전했어도 선천적인 장애인들이 여전해 태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허무에 떨어져서 죽게 되었다고 외치곤 합니다.

다른 하나는 도움의 손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잠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이유 없는 재앙과 고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이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일일이 응답하신다고 주장하면서 행복한 듯이 살아가겠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한국교회에는 이런 현상이 더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 안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침묵 현상이 일어납니다. 종교적 감수성과 교회 이기주의와 물신숭배가 만연하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침묵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초기 교회는 어디에서 문제 해결의 답을 찾았을까요? 믿음입니다. 잠에서 깬 예수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한 뒤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초기 교회가 놓인 상황만 본다면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가복음 공동체는 상황이 아니라 믿음 없는 것이 근본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간질병 아이에 과한 이야기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구절들이 주로 기도와 연관해서 오용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신앙생활과 성경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때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믿음으로 치장하기도 합니다. 희화적인 사건들도 한국교회에서는 자주 벌어집니다. 집 장만해달라는 기도를 믿음으로 구하라고 부추깁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는 해외 선교사들이 모인 집회에서 선교용 승합차를 장만하는 기도를 드리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몇 년 식과 색깔까지 밝히라고, 또는 결혼 대상자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선동합니다. 믿음과 기도의 전형적인 오용이자 왜곡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신뢰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완성자이십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믿음은 오히려 드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어떤 것들을 하나님으로 착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작동이 안 되면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불안해합니다. 현대 문명은 모두 인간의 이런 심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상품판매 전략입니다. 사람의 불안에 호소합니다. 정수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건강을 잃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배우들과 같은 외모를 갖추기 위해서 성형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젊은이들이, 특히 젊은 여성들이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탈()코르셋 운동이 벌어지긴 합니다. 교회생활도 이런 불안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들은 신자들을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어서 교회에 노예처럼 의존하게 만듭니다. 알량한 믿음으로 천국 갈 수 있다는 사탕발림도 실제로는 이런 불안 심리에 기댄 겁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많은데 실제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만이 우리를 무서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단순히 신앙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서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제자들의 마지막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4:41).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행위를 통해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회복한 것입니다. 큰 광풍과 물결로 표현된 세상살이의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앞서의 무서움과 다릅니다. 앞서의 무서움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돌보지 않느냐?’는 원망이나 하소연으로 나아가지만 여기서의 두려움은 창조와 생명의 능력을 향한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앞서의 무서움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게 점점 더 매달리게 하지만 여기서의 두려움은 자기에게서 해방시킵니다. 그 해방의 마지막 차원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풍과 물결을 보고 너무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정말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과 실제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profile

[레벨:5]bboyswj

June 26, 2018
*.224.255.62

아멘. 굳이 목사님의 음성을 듣지 않아도, 설교문에서 차분함과 튼튼함이 전해집니다. 힘이 턱 하니 빠지는 듯 싶더니 곧바로 새로운 소망이 생깁니다. 늘 감사합니다 목사님.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26, 2018
*.182.156.178

추천
1
비추천
0

저의 설교로 새로운 소망이 생겼다니,

저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세상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 두려워하면서 살아봅시다.

이런 삶이 가능하려면 예수에게 가까이 가능게 최선이겠지요.


profile

[레벨:17]홍새로

June 29, 2018
*.151.83.22

광풍과 물결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어린시절 들었을때,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대단한 분이구나라고 생각했고,
나이가 좀 들었을때는 헬라신화, 영웅설화에도
많은 기적들이 나오는데 뭐가 특별한거지? 라고 생각했었지요.
이제 목사님 말씀을 통하여

이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임을 알게 되었네요.
생명은 생사여탈권을 가진것처럼 보였던 로마황제의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있다 는것을

예수님의 말씀과 삶으로 경험한 것이군요.
이것은 지금 우리들의 삶을 끝없이 소유하는것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생각에서
난파선의 승객같은 실존을 깨닫고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하신다는 믿음이
두려움을 찬양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아는것이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29, 2018
*.182.156.241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하신다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평생 붙들고 나가야 할 화두와 같습니다.

저절로 이해되거나 경험되는 게 아니고,

그런 이해와 경험의 차원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완전한 자유에 속히 이르렀으면 합니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거기에 조금씩이나마 가까이 갔으면 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3063
853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541
852 주현절 예레미야의 소명 [11] 2007-01-28 15931
851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3153
850 주현절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 15:12-19) [37] 2007-02-11 16218
849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593
848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702
847 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9] 2007-03-04 13651
846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491
845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623
844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773
843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2024
842 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4] 2007-04-08 13060
841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736
840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944
839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355
838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3971
837 부활절 누가 내 어머니인가? [16] 2007-05-13 15672
836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940
835 성령강림절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8] 2007-05-27 14314
834 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11] 2007-06-03 12355
83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990
832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850
831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831
830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915
82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937
828 성령강림절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13] 2007-07-15 13498
82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1172
826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816
825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803
824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10990
823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2037
822 성령강림절 믿음의 완성 [26] 2007-08-26 15295
821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1147
820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759
819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556
818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640
817 성령강림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9] [1] 2007-09-30 17394
816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759
815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827
814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363
813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752
812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471
811 성령강림절 거짓 예배, 참된 예배 [7] 2007-11-11 15730
810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316
809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748
808 대림절 영적 각성 [19] 2007-12-02 14960
807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4623
806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5073
805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808
804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671
803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580
80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5020
801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457
800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594
799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394
798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878
79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888
796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9009
795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218
794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988
793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920
79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544
791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695
790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346
789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158
788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851
78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422
786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526
785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642
784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8065
783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848
78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1022
781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8063
780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498
779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676
778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7068
7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6020
776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515
775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778
774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8114
773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6019
77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435
77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391
770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397
769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695
768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458
76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937
766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331
765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2117
764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277
763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658
76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1100
761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806
760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779
759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892
758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893
75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665
75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788
755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938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