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부활절 조회 수 4795 추천 수 0 2019.05.13 10:14:08
설교듣기 : https://youtu.be/sp6xKfeBeB8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요한복음 10:22-30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10:22-30, 부활절 넷째 주일, 2019512

 

22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여러분은 예수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정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대답이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면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만 하는데, 세상 문제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비해서 먹고 살기는 훨씬 좋아졌는데도 사람들은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평화와 안식이 더 확장되었다고 보기가 힘듭니다. 지금보다 열배나 더 잘살게 되어도 싸우는 사람들은 여전히 싸우고 폭력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불행한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할 겁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구원자인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자기 인식

이런 질문은 예수님 당시부터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0:22-30절에 그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잠시 그곳에서 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언젠가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와서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구원을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갈망한다는 말은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에는 정의와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고, 그 사실을 절망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한 뒤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기를 더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자칭 그리스도라는 인물들도 나타났습니다. 군중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가서 로마를 물리치기 위한 무력 혁명을 준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을 확인하려고 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의 정체를 당신 입으로 밝히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일정하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소문에 대해서 질문하자 제자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소문이 나돈다고 대답했습니다(16:14). 이런 궁금증은 세례 요한에게도 중요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3).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질문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예수가 과연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교주인가 하는 문제가 당시에 뜨거운 감자였다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받고 어떤 대답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다.’ 이렇게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11:4)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어서 시각장애인들이 보게 되고 걷지 못하던 사람들이 걷게 되었고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삶의 나락에 떨어졌던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서 건짐을 받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비슷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거늘 ...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이 바로 자신이 누군지를 가리키는 증거라고 대답하신 겁니다. 이런 표현은 요한복음에 자주 나옵니다. 5:36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 증언하는 것이요.”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요 10:38절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이런 고백은 바로 예수님의 자기 인식이기도 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 즉 메시아인지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서 불안한 순간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불안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종종 드러납니다. 공생애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그것이 두드러집니다. 첫 장면은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시험이고, 마지막 장면은 십자가에서의 외침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말아야 하고, 메시야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상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주변의 평가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을 내세웠습니다.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지만 내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은 믿어야 할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은 물론 인간 구원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

예수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결국 예수를 통한 구원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것이고, 못하는 사람은 거부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거부했습니다. 단순히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몰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이상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경험했어야만 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어야 합니다.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신앙관이 잘못된 것입니다. 집의 기초가 부실하면 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신앙의 토대가 잘못되면 결국 결과도 잘못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고수하면 신앙이 왜곡되고 위축되는 거와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은 한 마디로 승리주의입니다. 그들은 메시야, 즉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로마 제국과 같은 악한 세력을 몰아내고 유대가 세계 중심 민족이 되는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를 물리친 모세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많이 행하고 승천한 것으로 알려진 엘리야 같은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이들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남은 돈으로 복권을 사고 1등 당첨을 기다리는 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에 따르면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칼 마르크스나 레닌, 모택동,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 세계적 부자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나 이건희 같은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능력을 행사한 인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한창 잘 나갈 때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하자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대라고, 친구만이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일일이 문자적으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운명도 그대로 따를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모두 십자가로 죽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리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만 대면해서 살았던 분으로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잘잘못을 일일이 따져서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내리기도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높고 존엄한 분이기에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지만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너무 가까운 분이기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승리할 때만이 아니라 실패할 때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건강할 때만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도 하나님은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만 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하는 염려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하늘의 아버지는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으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를 담보한 자만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똑같은 메시아 관으로 삽니다. 쉬운 말로 잘 먹고 잘 사는 걸 구원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걸 무조건 탓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적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들의 삶이 보호받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런 어려움이 해결되어도 다시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일단 긴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구호를 받아야 합니다. 정작 문제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도 더 많은 것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에 묶여 있는 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아도 나름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열정적으로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살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겁니다.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방식이라도 가능한 편하고 즐겁게,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면서 살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분들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인생살이에서 진정성이 있었으나 결국은 자신들의 고정된 구원관에 묶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실제로는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대충 알면 되고 세상에서는 똑똑하게 사는 건 잘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영생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한 이유는 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본문이 아주 특별한 용어를 통해서 말합니다. ‘내 양이 그것입니다. 26,27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 양이라는 표현은 자칫 편애처럼 들립니다. 이런 표현은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겁니다.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우에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예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경험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경험된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랑은 자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걸 느끼는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예수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인식하고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와의 특별한 관계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마치 텃밭과 사랑에 빠진 사람, 또는 그림이나 노래 같은 예술과 사랑에 빠진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런 특별한 관계를 가리켜서 내 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내 양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핵심은 영생입니다. 본문 28절에서 예수님은 내 양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술가와 시인들에게 창조적인 영감이 주어지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경험됩니다.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 자체가 이미 영생입니다. 영생은 구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생은 생명이 무한정 늘어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수렴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미혼모가 있다고 합시다. 자신이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입양시키기로 했습니다. 입양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아이와 입양할 사람의 관계는 이전에 남이었다가 이제는 가족이 된 것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게 영원한 존재인,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로 불리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가리킵니다. 그런 일치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필요는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만 의존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의 영생 경험은 종교적인 독단이나 자기도취나 자기합리화가 아닙니다. 생명의 능력에, 구원의 광휘에 휩싸이는 겁니다. 아무리 건강이 나빠져도 숨은 쉴 수 있고, 아무리 가난해져도 걸을 수는 있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능력과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점수를 받으려고 전전긍긍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우나 정말 실질적인 생명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생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즐겁게, 그리고 단단한 마음으로 제자들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설교 듣기 링크는 서울샘터교회에서 행한 정용섭 목사의 설교이고,

  설교 보기 링크는 대구샘터교회에서 행한 백성웅 목사의 설교(엡 4:1-6, 부활 예수의 현존)입니다.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May 14, 2019
*.118.81.62

27절의 "다르느니라.”를 "따르느니라.” 고치셔야 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y 14, 2019
*.182.156.135

예, 고쳐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17]아셀

May 17, 2019
*.38.24.86

귀한 메세지 감사합니다.
요즘 특히 오늘 저와 제 친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y 17, 2019
*.182.156.135

아셀 님은 정말 오래된 다비안이신데, 

뭐라 말해야할지, 

아직 다비아에 머물고 계시다는 게 놀라군요. 

10년이 훨씬 넘었으면 여기서 들을 거는 다 들은 거니 

흥미가 떨어질 때가 된 거지요. 

제 설교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게 생각합니다. 

요즘 찔레꽃 향기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도시에 사는 분들은 잘 모를 겁니다.

profile

[레벨:17]아셀

May 17, 2019
*.33.164.49

별 말씀을 요 목사님^^
요즘와서 언뜻 언뜻 메시지의 깊이가 더 깊이 느껴 집니다.
다른 강좌도 즐겨 듣고 이습니다.
특히 알리스터 박사님의 책을 강독하시는 동영상도요. 늘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3754
853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563
852 주현절 예레미야의 소명 [11] 2007-01-28 15957
851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3174
850 주현절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 15:12-19) [37] 2007-02-11 16248
849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618
848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720
847 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9] 2007-03-04 13674
846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523
845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650
844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800
843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2051
842 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4] 2007-04-08 13087
841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759
840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979
839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375
838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4000
837 부활절 누가 내 어머니인가? [16] 2007-05-13 15712
836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965
835 성령강림절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8] 2007-05-27 14335
834 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11] 2007-06-03 12375
83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10018
832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880
831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856
830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933
82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959
828 성령강림절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13] 2007-07-15 13524
82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1195
826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834
825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828
824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11024
823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2061
822 성령강림절 믿음의 완성 [26] 2007-08-26 15322
821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1170
820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780
819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570
818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662
817 성령강림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9] [1] 2007-09-30 17411
816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785
815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848
814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387
813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782
812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491
811 성령강림절 거짓 예배, 참된 예배 [7] 2007-11-11 15756
810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340
809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772
808 대림절 영적 각성 [19] 2007-12-02 15017
807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4683
806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5124
805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906
804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758
803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609
80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5041
801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475
800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608
799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412
798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895
79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907
796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9083
795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230
794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4004
793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935
79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566
791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713
790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362
789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174
788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865
78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439
786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538
785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673
784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8091
783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920
78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1098
781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8136
780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558
779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748
778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7085
7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6095
776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530
775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849
774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8129
773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6035
77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451
77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409
770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410
769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710
768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476
76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949
766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345
765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2130
764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292
763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681
76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1116
761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824
760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789
759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974
758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910
75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687
75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804
755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958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