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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소명, 2004.8.15.

기타 조회 수 9831 추천 수 30 2004.08.16 09:30:26
성경본문 : 출애굽기 3:1-12 
2004. 8.15.                          
모세의 소명
출 3:1-12

모세의 상황
모세 이야기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나온 ‘십계’라는 영화나 요즘 만화 영화로 나온 ‘이집트의 왕자’는 바로 그 모세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위인들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일화들이 붙어 다니듯이 모세에게도 어렸을 때부터 극적인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대략 지금부터 3천5백년 전쯤, 이집트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던 히브리 민족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대상이 될 정도로 그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급기야 새로 태어난 히브리 민족의 아이들 중에서 남자아이들을 모두 강물에 던져 버리라는 긴급 조치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런 위기의 시대에 태어난 모세는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의 딸의 손에 들어가 왕궁에서 왕자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게 되었고, 그곳에서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목자로 살았습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성서에 기록된 모세 전승의 앞 단락입니다.
영화를 만들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이런 정도의 소재만 있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각색해낼 수 있을 겁니다. 방수 처리된 요람에 누인 모세가 파라오의 딸에게 발견되는 장면이라든지, 그 딸이 모세를 자기 아들로 키우게 되는 사연은 얼마든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모세의 유모로는 친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젖을 뗄 때까지 모세와 함께 살았을 친어머니는 모세에게 자기 민족과 야훼 하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겠지요. 그 이외에도 살인 사건과 그것으로 인해서 모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은 극적인 요소로서 부족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이야기꾼들은 이런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겠지만 성서는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은 히브리 민족의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2장은 모세의 출생과 망명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한 다음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으로 돌아갑니다. 성서는 모세의 ‘인간승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 사람을 영웅으로 묘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 신화와 구약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위인들의 활약상이 크게 부각되어 있지만 구약성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으며 비록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바로 이런 중심 주제를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성서는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에게 궁극적 관심을 두고 있다는 그 주제 말입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성서 기자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권을 행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주도권
위대한 인물이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그 사람을 찾는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사무엘, 이사야 등등, 모든 성서의 인물들이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모세도 역시 그렇습니다. 3장1절에 보면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목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연한 일인지 아니면 평소에 장인 이드로를 통해서 그 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성서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모세는 양떼를 이끌고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상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떨기나무에 불꽃이 이는데도 나무는 타지 않았습니다. 주석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성 엘모의 불’이라고 합니다. 이 떨기나무의 불에 호기심을 느끼고 가까이 간 모세에게 하나님이 ‘모세야, 모세야’라고 불렀습니다(5절).
하나님이 우리 인간처럼 소리를 내어 모세를 부른 것일까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긴 하지만 굳이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청각이라는 것은 공기의 진동이 우리의 귀속에 있는 떨림판을 떨게 하여 그것이 우리의 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됨으로써 일어나는 생물학적 작용입니다. 우리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큰 소리나 작은 소리, 우리가 포착해낼 수 있는 주파수를 벗어난 소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에게는 감각되는 소리가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 특유의 방식으로 그를 찾아오셨다는 뜻이지 반드시 우리가 친구를 부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부르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이 모세를 개인적으로 만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개인이나 집단에게 드러내는 하나님의 행위를 우리는 계시라고 합니다.
인간의 역사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단지 어떤 인물을 만난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고 그 역사의 내용에까지 확대되어 있습니다.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야훼 하나님은 6절부터 모세를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 소상하게 설명하십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고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온다. 또한 에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지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건져내어라.”(7-10).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 말씀이 설명하고 있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야훼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단순히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계획도 일러주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서의 관심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성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체 역사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나 민족들은 구원에 이르게 되고,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이나 민족은 멸망 받게 된다는 게 곧 성서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 인식의 길
우리가 이런 성서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하나이며,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모세가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이유로 주저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 뒤에 계속되는 이야기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오늘 본문에 한정해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 생각하겠습니다. 순종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다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도대체 모세는 지금 자신에게 말씀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 여러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확실하게 말씀하시면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고 믿겠다”고 말입니다. 저는 위에서 “모세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청각을 자극한 음성이라고 반드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사람에게 나타난 적은 인류 역사 이후로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죽습니다. 하나님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찾아오시고 그렇게 자신을 알리십니다. 그런 간접적인 방식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그 어떤 하나의 방식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람소리로, 어떤 사람은 성전 안에 감도는 황홀한 느낌으로, 사무엘은 모세와 비슷하게 자기를 부르는 음성으로 야훼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은 늘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는데 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하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 없던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불꽃이 이는 떨기나무를 본 사람이 어디 모세뿐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오직 모세뿐이었습니다. 마음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5절)는 야훼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지 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룩한 땅을 인식하고 있었고 자기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만 오늘 본문에 서술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단지 우리의 심리작용뿐이라거나 우리의 지적이고 인격적인 결단뿐이라고 말씀드리는 건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단지 휴머니즘이라거나 정신통일과 기 훈련과 비슷하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성서에 증거되고 거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모든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에게 그 야훼 하나님의 뜻이 인식된다는 점에서 이런 경험은 단지 인간의 심리적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일상의 사건과 현상 안에서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해낼 수 있습니다.

소명의식
위에서 우리가 나눈 설교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인 출애굽의 단초라 할 수 있는 모세의 소명을 구성하는 요소는 몇 가지로 구별됩니다. 우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시킬 계획을 주도적으로 세우시고 그것을 앞장서서 실천할만한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며, 선택받은 인물인 모세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순종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요소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모세에게는 민족 해방이 소명이었다면 지금 나에게는 무엇이 소명인가?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내밀한 영적인 관계에서만 판단될 수 있는 그런 문제를 제삼자인 제가 간섭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설교하는 자리이니까 몇 가지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원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우선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12,3세기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개혁 직후에 벌어진 30년 전쟁에서 보는 대로 사람들의 정치적, 종교적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 뜻 운운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난 이러한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접어두기로 합시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이렇게 기준을 정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적극적인 기준을 말한다면 그 일을 통해서 생명이 활성화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기준을 정한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시 혼란스럽습니다. 선천적 질병이나 장애를 고치기 위해서 생명 복제 기술을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세계를 허무는 일이기 때문에 유보되어야 한다는 주장 중에서 어떤 쪽이 더 생명 지향적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지구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개인용 자동차를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과 앞으로 인간의 기술문명이 발달하면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아무 문제없다는 주장 중에서 어떤 쪽을 우리가 선택해야만 할까요? 인간과 이 세계가 우리의 예상 안에서 단순하게 작동하는 게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돌아간다는 사실을 간과하다가는 자칫 우리는 독단론에 빠지게 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 앞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결국 궁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이 나에게 준 소명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만 판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된 소명에 빠지면 우리는 악하게 사용될 것이며, 바른 소명에 사로잡히면 모세처럼 하나님의 귀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이 바른 길에 서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의 심층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우리의 영성이 예민하게 작동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민족 해방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던 모세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소명을 구체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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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457
475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657
474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809
473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596
472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435
471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7096
470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10139
469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3263
468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396
467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600
466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221
465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935
464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1059
463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208
462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360
461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852
460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625
459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693
458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895
457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671
456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752
455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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