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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기타 조회 수 9206 추천 수 34 2004.09.13 13:33:18
성경본문 : 예레미야 2:4-13 
왜 헛것을 보는가?


예레미야의 시대

오늘 본문의 ‘삶의 자리’를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는 일은 나에게 벅찹니다. 일단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BC 627-587년이라는 격동기의 줄거리를 이런 설교 시간에 세세하게 설명하는 게 별로 쓸모가 없기도 하지만 그 줄거리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BC 587년이라는 숫자가 무슨 사건을 가리키는지만 보아도 예레미야가 활동한 40년의 세월이 어느 정도로 고단했을는지 우리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BC 587년은 근근이 버텨오던 남유대의 예루살렘이 아시리아 제국을 함락시키고 명실상부 중동의 패권을 손에 쥔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초토화된 해입니다.
한 국가가 멸망하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따르게 마련인 것처럼 BC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역사에서 사라진 후 홀로 남은 남유대는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을 친 천하무적 아시리아가 남유대를 내버려둘 까닭이 없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남유대는 스스로 아시리아의 속국이 됩니다. 호전적인 제국에 붙어있는 작은 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미리 알아서 식민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전자를 택했다가 일찌감치 멸망당했다면 남유대는 후자를 택해서 생존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100년 이상 아시리아의 속국 신세를 면치 못한 남유대의 상황이라고 해서 멸망당한 북이스라엘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36년간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그 시기의 유대도 역시 이런 일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예레미야의 영적 시각에 훨씬 근본적인 문제로 포착된 것은 우상숭배였습니다. 한 나라가 어느 제국의 속국이 된다는 것은 그 제국의 문화와 종교에 지배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은 유대 왕에게 자기들의 신들을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 흡사 일제 말기에 그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듯이 말입니다. 유대 왕은 어쩔 수 없이 바알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고 그 밑에서 참배했습니다. 적당하게 몸을 낮추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시리아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몇몇 지도자들은 솔선수범 했겠지요. 이완용에 의해서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그 뒤로도 여러 친일인사들이 나왔듯이 유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여 년 동안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비참하게 지내다가 유대의 왕 요시야(BC 649-609) 시대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혁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의 개혁이라는 것은 다윗 시대의 율법책을 새로 발견하여 야훼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노력들을 가리키는데, 그 시기는 아시리아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내리막길을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적인 조치들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진단하기 어렵습니다. 요시야의 개혁만으로 유대를 지켜내기에는 그 당시 국제 정세가 너무 험악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요시야의 개혁이 위로부터의 개혁이기 때문에 국가 전체를 새롭게 하기는 역부족이었는지도 모르고, 또는 그의 후계자들이 바벨론보다는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외교적 잘못을 범했기 때문인지 결국 남유대도 얼마 가지 않아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따지는 하나님

이런 국내외적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레미야는 그 모든 문제의 근본을 영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훼의 영에 사로잡혀 그분의 말씀을 전합니다. 9절 말씀이 재미있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너희와 따지리라. 이는 내 말이니, 어김이 없다. 너희 후손과도 따질 것이다.” 이 공동번역에 따르면 야훼 하나님은 인간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분이십니다. 보기에 따라서 좀 유치하군,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개역성경에도 “다툰다”고 되어 있고, 루터번역도 대충 그런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이 말씀은 야훼 하나님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야훼 하나님은 역사로서 자신을 계시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와 아무 상관없이 추상적으로, 막연하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조금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따진다는 말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긴다는 뜻이 아니라 일종의 진리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야훼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나 자신 있게 그 야훼 하나님을 논쟁의 주제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자세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왜 진리인가에 대해서 논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를 경험한 사람의 자세는 결코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진리 논쟁의 주제로 삼으려면 우선 하나님을 진리의 차원에서 깊이 인식하고 체험하는 게 중요합니다. 자신의 짧은 경험, 감상주의, 폐쇄적 교리 체계만 갖고 하나님을 모두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주제로 세상 사람들과 논쟁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반론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믿을 대상이지 논쟁의 대상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그 분이 믿을만한 대상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이 세상을 유지하고 종말에 자기를 완전히 들어내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해야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믿음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한다면 사이비 이단들도 할말은 많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이비 이단들과 구변되는 기준은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해서 진리의 차원에서 논쟁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 헛것을 따르는가?

예레미야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렇게 따지십니다. “왜 헛것을 따르는가?” 예레미아는 이미 유대의 조상들이 “허수아비를 따르다가 허수아비가 되었다”고(5절) 진단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유대에서 예언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알의 말이나 전하며 아무 데에도 쓸모없는 것들만 따라 다녔으며”(8절), “아무 데도 쓸모없는 것을 잡았습니다.”(12절)다는 것입니다. 아시리아 제국에 기대어 그들의 모든 종교와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유대의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왜 유대인들은 거듭해서 우상을 섬기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실제로 경험하고 조상들로부터 생생하게 전해 들었을 유대인들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비롯한 근동의 우상을 따라간 것은 우리에게 불가사의입니다. 여러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 같으면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찾으려면, 혹은 그런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무슨 의미에서 유대인들이 “헛것을 따른다”고 말했는지 검토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우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헬라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의 형상이나 절의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 상 같은 것, 또는 무당 집의 여러 도구들을 생각하시겠지요. 아마 구약 시대의 바알을 섬기던 신전도 그런 모습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모습만 갖고 판단한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나 정교회의 교회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교회당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면 좀 무서운 느낌이 들 겁니다. 어떤 종파에서는 개신교회당 안에 있는 십자가상마저도 우상으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각 종파의 특징에 속하는 것이니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돈이 우리를 구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거기에만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게 곧 우상입니다. 권력이 그런 대상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그게 우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나 남편, 또는 자식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조금 고상한 차원에서 예술과 문학이 자기를 구원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그 사람에게는 우상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을 완전하게 사로잡고 있는 그 대상과 그 힘이 구원의 세계에서는 무능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볼 때는 헛것에 불과한 아시리아의 종교와 문화를 유대인들이 따라간 이유는 그 대상이 헛것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힘들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마 아시리아의 군사력, 그들의 물적인 토대, 그런 문화는 오늘 우리가 미국에게서 느낄만한 그런 힘으로 작동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의 형제인 북이스라엘을 이미 100 여전 전에 함락시킨 힘이 바로 아시리아입니다. 그것은 당장 무언가를 세우기도 하고 요절낼 수 있을만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가 헛것에 홀려 있다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여러 가지로 언급하지는 않고, 다만 이렇게 한 마디만 짚겠습니다. 3년 전 9.11 참사 이후로 지구촌이 테러와 반테러의 악순환 속에 빠져든 이유가 무언가 헛것이 우리 인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일방적인 물질적인 욕망, 승부욕 중심의 교육과 사회구조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힘들은 우리에게 평화와 정의와 기쁨과 자유를 허락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헛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이런 것에 우리의 모든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망각

헛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당연히 야훼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6후). 사제들도 야훼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8절). 영광스럽게 모셔야 할 하나님을 버립니다(11절). “생수가 솟는 샘”인 야훼 하나님을 버립니다(13절). 예레미야는 지금 유대라는 사회 전체가 헛것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결국 야훼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에 인간의 문명으로 만든 조직, 돈, 예술, 건축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너무 절실한 것으로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자기가 생산한 것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이 당연히 관심을 두어야 할 그 모든 것의 근원인 야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궁극적인 관심을 단 하나에만 둘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돈을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하나밖에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런데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광야에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던 야훼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시대보다는 궁핍의 시대에 훨씬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시대는 자기 자신의 업적이 별로 없는 시대이니까 하나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광야에서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자주 있었지만 그 시절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일치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게 발생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아시리아의 첨단 문명에 마음을 빼앗긴 유대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야훼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유대백성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똑같았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삶이 훼손되는 걸 보면 우리가 그들보다 더 심하게 하나님을 떠났을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자면 헛것과 야훼 하나님을 구별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한국교회가 야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물신주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근본 문제를 영적인 것에서 풀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모든 문제의 핵심은 야훼 하나님을 찾지 않고 엉뚱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산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일에 손을 떼고 오직 기도만 하라거나 예배를 더 많이 드려야 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훨씬 근원적인 것을 말합니다. 헛것과 참된 것을 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은 영적인 통찰력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바울도 늘 깨어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헛것과 참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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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주

September 17, 2004
*.208.102.182

근본, 진리로부터의 거리만큼 헤메이고 왜곡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도전은
비본질로 가득찬 현실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응방식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뿌리를 둔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 현실을 비본질적으로 만들어가는 세력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행복한 관계?
그것은
다수의 삶이 진리와 근본으로부터 멀어지지않게하는데 기여하게될
나의 임무를 외면하지않으며
조건에 굴복하지도않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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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zelkova

September 17, 2004
*.233.24.131

'진리 논쟁' 이라고 할수는 없겠지만 요즘 동기들과 함께 하나님, 생명, 기도, 성령 등등 이러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직은 이렇다한 결론으로서의 답을 얻지는 못하지만...이런 시간들이 많이 필요함을 안다...
많은 고민과 질문을 가짐니다. 정리하여 찾아 뵙겠습니다...

목사님 서울 잘 다녀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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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314
174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10406
173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572
17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6069
171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553
170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7975
169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755
168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451
16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850
166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409
165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580
164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5978
163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468
16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437
161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528
160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6004
159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409
158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6094
15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799
156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127
155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728
154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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