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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기타 조회 수 9417 추천 수 32 2004.10.04 00:24:34
성경본문 : 예레미야 8:18-23 
2004. 10.3.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렘 8:18-23

탄식의 이유
우리는 방금 2천6백 년 전 예루살렘에서 예언하던 예레미야의 시(詩)를 읽었습니다. 산문이나 소설 형식의 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도 힘든데 시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도 시를 즐겨 읽지 않는 이유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 있는 것처럼 예언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시들도 역시 이런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의 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은 그 예언자들의 영성이 지나치게 깊어서 우리가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경우도 있고, 거꾸로 우리의 영성이 말할 수 없이 무뎌서 예언자들의 시와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소통불능의 상태를 극복하려면 평소에 우리의 영성이 그만큼 깊어질 수 있도록 영적인 훈련을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흡사 모차르트의 음악을 이해하려면 그런 정도의 음악적 영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영성을 확보하는 훈련의 한 방법이 예언자들의 시를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예레미야의 시를 정확하게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그 첫 출발은 예레미야가 탄식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는 작업입니다.
지난 9월 둘째 주일의 설교 본문도 역시 예레미야(렘 2:4-13)서(書)였습니다. 이미 그때 예레미야가 처한 삶의 정황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아시리아를 정복하고 신흥 제국으로 부상한 바벨론과 이집트 사이에서 유다 왕들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다가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당하고 마는 그 역사적 위기가 바로 이 시의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위기가 차츰 임박하고 있을 때라기보다는 이미 전쟁의 참화 속으로 빠져버린,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많은 인재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 버린 이후의 때라고 보아야 합니다. 19절 말씀에 의하면 유다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신음 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야훼께서 시온에 안 계시는가? 왕 노릇 그만 하시려고 물러나셨는가?” 예레미야 자신도 이런 처참한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인지, “앞이 캄캄하고 마음은 떨립니다.”(21절)라고 읊습니다.
예레미야가 직면하고 있는 유대의 상황은 백약이 무효가 된 상태였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쑥대밭이 된 나라를 앞에 두고 이런 비탄의 시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흡사 우리가 일제에 의해서 식민지가 된 1910년대의 상황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6.25 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이 초토화한 그런 상황과도 비슷합니다. 그는 지금 모든 삶의 토대가 파괴되었고, 모든 희망들이 사라져버린 그 사태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런 절망의 상황 속에서 탄식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시를 읽었습니다.

낯선 텍스트
바로 이 순간, 그러니까 우리와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씌어진 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이 순간 우리에게 적지 않은 딜레마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시가 우리에게 별로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모든 성경말씀을 늘 절실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그만큼 영적으로 예민하기 때문이기도 있지만 말씀을 과장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자기연민이 강한 사람은 티브이에서 나오는 모든 드라마의 주인공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억지도 꾸며낸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시시한 이야기에 빠져들어서 울고불고 합니다. 이렇듯 성경말씀을 과장하거나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방식이 ‘알레고리’인데, 이런 방식이 한국교회에는 거의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말씀을 좀더 객관적 태도를 유지한 채 읽도록 해야 합니다. 설령 그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는 안 됩니다. 은혜라는 게 우리의 감정을 일시적으로 감동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진리의 영과 생명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은혜 받는 일에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가능한대로 성령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의도와 욕망을 제어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질문해 봅시다. 2천6백 년 전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그 사건이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그런 사건으로 인해서 “앞에 캄캄하고 마음이 떨립니다”는 예레미야의 마음이 우리와 동일시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의 마음이 떨리기 시작한다면 그건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이거나 자기를 속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예레미야에게만 절실한 문제이지 오늘 우리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없이 읽었을지 모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우리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을 받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니까 억지로라도 감동이 있는 것처럼 자기를 몰아갈 뿐입니다. 이게 바로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쓴 시와 역사적 증언을 읽는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딜레마입니다.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예레미야의 시를 읽는 우리에게 그런 딜레마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시의 내면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하기만 하면 이 시는 우리에게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의 생각과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다른 예언자들도 그렇습니다만 예레미야도 자기 민족의 몰락 앞에서 좌절하거나 슬퍼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사건을 분석했습니다. 일종의 역사비평을 통해서 얻은 대답을 시 형식으로 담아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시를 썼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우상을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어찌하여 남의 나라 허수아비를 들여다가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19 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즉 여러분의 역사의식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한 나라가 망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시리아의 군대에 의해서 망한 북이스라엘,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서 망한 남유다의 모습을 본다면 당연히 군사력이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일 것입니다. 이 말은 옳습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피를 쏟듯이 탄식하고 있는 예루살렘 함락 사건도 역시 바벨론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니까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도 많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침략을 받은 우리의 선조들이 상당한 정도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을 때는 나를 지킬 수 있었지만 없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만약 이라크가 미군의 최신 무기를 막아낼 만큼의 군사력이 있었다면 저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 모든 나라는 자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군사력 증강에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 시도를 제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런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그 현실만은 인정합니다. 미국과 북한의 싸움이라는 것은 누가보아도 골리앗과 다윗의 경우처럼 결과는 이미 뻔하기 때문에 북한은 늘 벼랑끝 전술을 선택했습니다. 자신들의 생존을 군사력에만 의존하려는 북한체제도 위험하지만, 자기들의 생존에 머무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한 지배권 강화를 위해서 군사비 지출을 세계에서 제일 많이 하는 미국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지 큰 나라와 작은 나라 불문하고 모두가 군사력으로 자기 나라를 지켜내려고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는 게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역사분석은 좀 달랐습니다.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역시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보았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역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으로부터 바라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게 당연합니다. 예언자들이 이런 역사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회개하라’고 외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임한 재난과 재앙의 원인이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데 있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그런 재앙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야훼 하나님의 뜻을 아무리 철저하게 지킨다고 하더라도 불행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처럼 회개라는 것이 모든 실제적인 문제들을 일소할 수 있는 직접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회개하라’고 선포한 이유는 ‘회개’의 의미를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훨씬 깊은 차원에서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즉 종교적 의식(儀式)의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영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인간 삶의 가장 심층에 놓여 있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회개하라는 예언자들의 선포가 담지하고 있는 근원적 의미를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그것을 ‘우상’과 ‘허수아비’라고 말합니다.

우상과 허수아비
다시 그 본문을 읽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우상을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어찌하여 남의 나라 허수아비를 들여다가 섬기며 내 속을 썩여주느냐?”(19 후).
왜 그들은 우상을 섬겼습니까? 자신들의 신세가 망하게 되었다고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겼다는 게 좀 이상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일과 예루살렘이 망한 것과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우상을 우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경우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내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대략적으로 두 가지의 가능성이 모두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그들의 그런 행동과 생각이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이 일부러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우상을 섬겼다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행복한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우상을 섬겼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상은 무엇일까요? 하나의 작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의 중고등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의 목표만을 향해서 사육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인간의 전인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분적으로 역설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한 가지의 목표가 지상명령으로 작동되는 사회가 바로 우리의 모습니다. 그런 것이 곧 우상입니다. 인간이 만든 생산품, 조직, 체계, 문화를 절대화함으로써 인간의 근본적인 삶이 훼손되는 행위가 곧 우상숭배입니다. 물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경쟁력을 갖춘 다음에 연봉이 많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설령 그런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는 생명의 조건들이 보장될지 모르지만 그 결과로 인해서 훨씬 많은 사람들의 삶이 훼손당한다면 우리는 그런 체제가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안식일에 지체장애자를 고친 예수님의 행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곧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생명과 관계된 일을 막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만 놓고 본다면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은 우상이었습니다. 비록 종교적인 법이었지만 그것이 절대화함으로써 더 이상 생명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우상들은 허수아비라고 진단합니다. 이게 곧 예레미야의 역사의식이었습니다. 무능력한 허수아비를 믿는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는데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늘 그런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 사실이 예레미야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물론 우상숭배를 일소하고 창조자 야훼 하나님만을 바르게 믿고 그런 삶의 내용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재앙과 불행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범주를 뛰어넘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할말이 없습니다. 다만 그런 일이 없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예언자의 호소는 여전히 호소력이 있습니다. 허수아비에 불과한 우상의 실체를 인식하고 참된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그 호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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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초

October 06, 2004
*.208.101.249

자기시대의 허상을 파악한다는 것은 본질에 대한 철저한 감각이 전제되지않으면
가능하지않읍니다.
온전한 삶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그런 삶이 가능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란 불가능하기때문이죠.
이런 맥락에서 우상과 허수아비를 극복한,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다는 것은,
그래서 엄청난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읍니다.
'만난다'는 이 적접적인 체험, 조지 폭스가 일상으로 경험했던 그 세계는
어떻게 열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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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7, 2004
*.235.145.20

어떻게 열리는가?
그 길에 대해서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거나,
아니면 알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
그 순간에 바로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인식하는 세계가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런 영성의 세계가 어떻게 열릴까?
시인들이 시의 세계에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비교해서 생각하면 됩니다.
황지우의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라는 시집을 읽으셨나요?
존재론적인 인식이 투명하고 투철한 시를 쓰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가 경험한 자신과 주변의 어떤 고유한 세계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런 세계는 늘 다양한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참된 시라고 한다면
바로 그 시의 세계가
기독교적 영성의 세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원초적 언어의 세계를 모색하는 시와
원초적 생명의 근원을 추구하는 종교는
비슷한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열리는가?
왕도는 없습니다.
우연하게 주어지기도 하고
오랜 공부와 구도의 과정을 통해서 주어지도 하겠지요.
다만 약장사 같은 소란스러움에서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득음, 득도, 성령충만은 비슷한 경험에 속합니다.
결국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어떤 힘들의 작용이지요.
그런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간섭할 수 없습니다.
비록 폭스가 역사의식이 불투명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우리가 물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를 철저하게 왜곡하는 경우,
즉 적극적으로 친일에 가담하는 경우라면
그 사람의 예술과 학문과 종교까지 질문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내버려두는 게 낫습니다.
다시, 어떻게 열릴까요?
근본적으로는 그 세계가 열린다기보다는
나를 여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무얼까?
나를 연다는 게....
어린아이같은 무심의 상태로
이 세계를 직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철저한 사회과학의 기준으로 세계를 뚫어보야할까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큰 세계와 힘이,
때로는 유와 무를 뛰어넘고,
사랑과 미움을 밀쳐내면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그런 힘을
우리가 어렴풋이라도 느끼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천천히 그 길을 가다보면
무언가 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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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878
190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304
189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733
188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8179
18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812
186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441
185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8065
184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445
183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314
18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313
181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199
180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201
179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628
178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189
1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9035
176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1360
175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390
174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10470
173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613
17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6126
171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578
170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8009
169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788
168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480
16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888
166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439
165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614
164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6016
163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500
16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480
161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562
160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6038
159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442
158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6126
15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834
156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163
155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763
154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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