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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기타 조회 수 14969 추천 수 100 2006.01.22 14:39:47
성경본문 : 마가복음 1:14-20 
http://wms.kehc.org/d/dabia/06.01.22.MP32006. 1.22.        
막 1:14-20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예수활동의 시작
신약성서에 나오는 네 복음서는 각각의 특색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도입부의 차이입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설화를,  요한복음은 로고스론(論)을 다룬다면,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이런저런 말없이 세례요한의 설교로부터 시작합니다. 마가복음은 진행이 빠릅니다. 짤막하게 세례 요한을 다룬 다음 곧장 예수의 활동을 전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활동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시며”(14절). 마가가 예수님의 활동 개시를 요한의 체포와 연결시키는 이유는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광야에서 설교하던 야인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7절). 예수님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세례 요한의 퇴조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는 왜 여기서 단순히 ‘복음’을,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했을까요? 예수님의 메시지는 갑자기 하늘에서 초월적으로 떨어진 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와 긴밀한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이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복음은 제2 이사야의 선포와 맥을 같이 합니다. “반가와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향해 이르는구나.”(사 52:7). 여기서 기쁜 소식은 곧 복음입니다. 마가는 지금 이미 오랜 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전해진 그 복음을 예수님이 선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사야가 전한 복음이나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 내용적으로 똑같다고 한다면 예수님도 이사야 같은 예언자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일상에서 경험하듯이 똑같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누가 했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사건은 곧 메시아의 바로 그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확신과 믿음에 의해서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행하신 모든 가르침과 행위들은, 즉 그의 복음은 곧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그의 복음이 곧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복음,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야말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토대하고 있는 신앙의 실체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15절). 구약 이사야를 비롯한 여러 예언자들에 의해서 선포되었던 그 하나님의 복음이 이제 때를 만났습니다. 이 ‘때’는 곧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그 구원의 시간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현실화되었습니다. 마가는 지금 바로 이 예수님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 질문은 곧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그 장면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는 그 장면을 16-20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가를 지나다가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 시몬과 안드레 형제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 예수님의 공생애는 갈릴래아 호수 부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처음부터 예루살렘으로 치고 들어가지 않고 변방인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갈릴래아는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의 무장봉기가 자주 일어나던 곳입니다. 이건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래아 사람들의 민족의식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들의 심성이 그만큼 거칠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하나님의 큰일을 의도했다면 가능한 조속히 예루살렘에 근거를 마련하는 게 좋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런 큰일을 의도한 게 아니기 때문에 고향인 나사렛에서 가까운 갈릴래아 호수에서부터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시몬과 안드레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숫가를 산책하실 때는 새벽이었을 겁니다. 대개 고기는 밤에 잡고, 동이 트기 전에 거둬들입니다. 병행구인 누가복음 5:1절 이하를 보면 그 상황이 조금 더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말을 듣고 시몬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눅5:5). 이로 미루어보면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를 찾아오신 때가 새벽, 또는 이른 아침인 것 같습니다. 시몬 형제가 일상인 고기잡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바로 그 시점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본문은 아주 간략한 정보만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정확하게 따라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다짜고짜로 “나를 따라오라.”고 말한다면 ‘저 사람, 맛이 갔나?’ 하는 말을 듣기 맞춤입니다. 더구나 그 당시에 예수님과 시몬의 나이가 비슷했다는 걸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시몬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함께 일할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셨겠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 왔으니까 함께 그 복음을 전하자는 이야기를 여러 번에 걸쳐서 시몬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의 압축이 바로 “나를 따라 오라.”는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 형제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b)는 구절에 놓여 있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의지해서 전도자의 길로 나섰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표현은 보기에 따라서 선정적입니다. 늦은 밤에 번화가를 지나다보면 술집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도 역시 사람을 낚는 것이겠지요.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사람들을 자기가 목표로 하는 일에 억지로 끌어들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런 차원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속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연대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솔선수범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시몬 형제를 향해서 그런 요청을 하신 것입니다. 자, 함께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에 나서자고 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에서 발견되는 그 기쁜 소식, 이제 예수님에게서 현실화한 그 복음 운동에 나서자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부르심을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삶 전체가 바로 이런 부르심과 직면하신 적이 있나요?

예수의 제자들
시몬 형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그들이 고기잡이를 끝낸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웬 낯선 남자에게서 갑자기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러 번에 걸쳐서 예수님을 만났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계속 고기잡이를 할 것인지, 아니면 예수를 따라 나설 것인지 오랫동안 고민했을 겁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마가복음은 그들의 내면세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 결과에 대해서만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18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시몬과 안드레 형제와 똑같이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도대체 이들, 예수님의 처음 네 제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섰나요? 그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였다거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따라나선 것은 아닙니다. 이들 제자들에게 영적인 갈증이 있었다고 보아야지요. 예수님과 이들 제자들 사이에 영적인 스파크가 일어났다고 보아야지요. 연인들 사이에도 그런 스파크가 일어나잖아요. 평범한 어부들이 어떤 영적 경험이 있었기에 예수를 따라 나섰는지는 성서가 아무 말 없으니까 접어두고, 마가복음이 보도한 것에만 한정해서 이들의 행동을 짚어보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소명장면은 늘 이 두 단어가 겹쳐있습니다. ‘버린다’와 ‘따른다’입니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은 바로 그들의 일상을 지켜주던 도구입니다. 그들은 매일 그물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챙기고, 그물을 고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했던 그물을 그들은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 중요하다고 여기던 것을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물을 들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하나님이 매우 공평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물을 갖고 있든지 예수님을 따르든지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경구에 이런 의미이겠지요. 자기에게만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참된 자유를 경험할 수 없을 겁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제자로 산다는 것은 삶의 어떤 부분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부분을 버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런 게 있을 겁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면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의 그물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버린다고 해서 늘 나쁜 습관과 태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괜찮은 것마저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그게 더 중요한 요소입니다. 남이 나를 인정해 주는 그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운동에, 그 복음 운동에, 생명운동에 결정적으로  지장을 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나의 가족일 수도 있고, 나의 학력일 수도 있고, 나의 취미일 수도 있고, 각자에게 다르게 나타날 겁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대목에서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들 어부들은 직접 예수님을 만났으니까 그물과 배를 버릴 수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건 별로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요. 이 어부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앞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겠다는 그들의 결단은 모든 진리를 파악했기 때문에 나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자체가 그들에게 은총이었습니다. 그들은 은총의 기회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마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사람은 이들 어부만이 아니라 여럿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은총을 외면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나선 우리에게도 여전히 불확실한 게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운명을 걸어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결단을 했으면 차근차근 그를 따라 사십시오. 우리가 선택적으로 버려야 할 것을 버려두고, 구체적으로 그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제자들에게 임했던 놀라온 은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profile

[레벨:2]김민철

January 23, 2006
*.116.36.79

먼지님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관심사가 다른 분들과조금 다른 분인가요??
여하튼 평안하세요..
profile

[레벨:0]먼지

February 06, 2006
*.255.46.249

여기 이런 꼬리글이 달려있다는 걸 지금 알았네요.
제가 정목사님 글에 오타 지적을 해드리기로 했었거든요.
전후사정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네요.
웬 이상한 사람이 정목사님 글 쓰실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오타지적을 해대고 있으니...^^
저는 그냥 평범한 초신자입니다.
아는 게 별로 없어서 허구헌날 눈팅만 하고 있지요.
김민철님도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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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9022
176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1347
175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366
174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10454
173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599
17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6103
171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570
170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8002
169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782
168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470
16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869
166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429
165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603
164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6009
163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489
16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460
161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551
160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6024
159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434
158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6119
15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827
156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158
155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754
154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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