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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통곡

기타 조회 수 22129 추천 수 41 2006.08.27 15:39:44
성경본문 : 사무엘하 19:1-9 
http://wms.kehc.org/d/dabia/06.08.27.MP32006. 8.27. 삼하 19:1-9
다윗의 통곡

압살롬의 반역
오늘 본문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이 식음 전폐하고 통곡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이렇게 목 놓아 울었습니다.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 내 자식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이게 웬일이냐? 내 자신 압살롬아, 내 자식아!”(삼하 19:1) 참으로 비통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는 아주 복잡합니다. 압살롬은 반역자입니다. 그가 죽었다는 건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즐거워해야지 왜 통곡하는 걸까요? 여기에는 성서기자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어떤 곡절이 숨어 있지 않을까요?
다윗에게는 배다른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성서에서 실명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왕자들을 나이순으로 거론하면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 그리고 솔로몬입니다. 이들 중간에 다른 왕자들도 많았습니다만, 이들이 대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네 명은 모두 출중한 왕자들이었습니다. 이중에서 누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할까요? 순리적으로만 말한다면 큰 아들인 암논입니다만 실제로는 가장 어린 솔로몬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뜻밖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모든 걸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너무 크게 발휘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서가 제공하는 그 역사적 흔적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곧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고 있는 다윗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이 명실상부하게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왕으로 등극한 다음에 자기 수하의 장군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쎄바를 빼앗았습니다. 성서 기자는 좀 짓궂습니다. 다윗이 한창 잘 나가는 순간에 그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서기자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윗 왕조의 원초적 욕망과 죄를 더 물고 늘어집니다. 그것은 곧 근친상간과 골육상쟁입니다.
큰 아들 암논이 배다른 누이인 다말을 성폭행했습니다. 암논은 자신의 욕심을 채운 다음에 다말을 창녀 보듯 무시했습니다. 버림받은 다말은 친오빠인 압살롬의 집에서 쓸쓸하게 지냈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다윗은 화가 났지만 암논이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밧쎄바 사건이 그에게 양심의 가책으로 작용했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은 앙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2년쯤 지난 뒤에 압살롬은 흉계를 꾸며서 암논을 죽이고 그술 왕 암미훗의 아들 탈매에게 도움을 받아 망명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카인의 아벨 살해를 연상시키는 이 사건이 오빠로서의 분노인지, 아니면 왕권투쟁의 결과인지 그 속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인 다윗 가문에서 일어난 수치스러운 이 일을 성서기자는 삼하 13장에서 가감 없이 사실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3년의 세월이 흐르자 암논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게 되었고, 압살롬을 향한 노기도 풀렸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요압 장군이 다윗을 설득해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압살롬의 귀국을 허락받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압살롬은 왕을 알현할 수는 없었습니다. 2년이 지난 후에야 정상적으로 왕자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압살롬은 계획적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면서 민심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4년 동안 애를 쓴 결과 그는 수하에 많은 장군, 책사, 제사장, 관료들을, 그리고 백성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왕으로 나서는 일만 남았습니다. 다윗을 추종하는 세력이 아직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압살롬은 일단 헤브론으로 나가서 대세를 얻을 계획을 짰고, 그의 계획대로 일이 전개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모인다는 소문을 들은 다윗과 측근들은 야반도주하듯이 예루살렘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압살롬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렇게 원수로 맞서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
그 이후의 과정을 자세하고 알고 싶으신 분은 삼하 15-18장을 읽으십시오. 오늘은 아무래도 설교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전쟁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말겠군요. 이런 이야기는 각자가 성경을 읽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다윗이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연, 또는 곡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조금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압살롬과 다윗의 싸움은 누가 보더라도 오랫동안 반역을 준비한 압살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습니다. 그는 성취욕이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누이 다말이 성폭행을 당한 뒤로 2년 동안 참았다가 배다른 형 암논을 죽이고, 망명생활 3년, 귀국해서 2년은 죽은 듯이 살았고, 그 뒤로 4년을 준비했으니까 11년을 기다려 이제 반역을 실행한 겁니다. 그동안 그는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지냈습니다. 압살롬처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잘 생긴 사람이 이스라엘에 없었으며,(삼하 14:25) 백성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니 그들이 압살롬을 따르지 않을 까닭이 있나요? 압살롬의 기세에 눌려 다윗 일행은 예루살렘 성을 포기하고 달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당연하게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연하게 흘러가는 수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건이 작용합니다. 한 가지는 내부 사건이고, 다른 한 가지는 외부 사건입니다. 다윗이 거의 잠옷 바람으로 도망하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당장 쫓아가서 초전박살을 내야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이 겁을 먹고 압살롬에게 돌아온다는 아히도벨 사령관의 의견을 압살롬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큰 세력을 결집한 다음 천천히 압박해 들어가서 다윗을 치는 게 좋다는 후새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후새는 지금 압살롬에게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다윗 편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이 전력을 추스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겠지요. 외부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윗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숨어 기다리던 다윗의 밀정 두 사람이 발각되었지만, 그들을 우물 속에 감추어 준 어떤 여인의 도움으로 그들은 위기를 모면하고 무사히 다윗에게 가서 압살롬의 계략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당장 다윗을 치자는 의견을 냈다가 묵살당한 아히도벨은 다윗 일행이 강을 건너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민심이 조금씩 압살롬으로부터 다윗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실제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리라는 건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성서기자는 전쟁 전반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습니다. 대신 압살롬의 죽음을 자세하게 보도합니다. 삼하 18장은 바로 그의 죽음에 대한 보도입니다. 압살롬은 처참하게 죽습니다. 그를 죽인 사람은 요압 장군입니다. 요압은 압살롬이 망명 생활할 때 다윗을 설득해서 그를 데리고 온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압살롬에게 호감을 가질 만도 한데, 그는 압살롬을 직접 처단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윗과 연관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는 하되 압살롬을 죽이지는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정확하게는 명령이라기보다는 부탁을 했습니다. 삼하 18: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요압과 아비새와 이때에게, 압살롬은 아직 철이 없으니 자기를 보아서라도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라고 당부하였다. 왕이 전 지휘관에게 압살롬을 두고 부탁하는 말을 전군이 들었다.”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가 상수리 나뭇가지에 머리가 걸렸고, 그 사이에 노새는 빠져나갔습니다. 그러자 압살롬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를 발견한 군인들이 요압에게 보고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왕의 부탁을 기억하는 군인들은 요압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자 요압은 직접 창 세 개의 던져 상수리나무에 매달린 채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고 합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 아들 압살롬이 그렇게 끔찍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중입니다.

요압의 위협
승전의 잔치를 벌여도 시원치 않은 판국에 왕이 통곡하고 있으니 군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요압은 울고 있는 다윗 왕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을 위해서 우리가 생명을 걸고 싸웠는데 이럴 수 있느냐? 우리가 죽고 압살롬이 살아있는 게 당신에게 훨씬 좋았을 것 같다. 더 이상 울지 말고 신하들에게 따뜻한 말을 하시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이라도 모든 신하들이 당신 곁을 떠나게 될 것이며, 결국 당신은 지금까지 당한 것보다 더 큰 불행을 당할 것이다.(삼하 19:6-8) 요압의 말을 들은 다윗은 마지못해 왕이 신하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성문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압살롬의 반역에 얽힌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요압이 다윗에게 한 말은 이중적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총사령관답게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 왕에게 진언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왕을 위협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군사들을 끌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약간 이상합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니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자신의 부탁을 어겼다고 해서 요압을 당장 처벌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책임 추궁은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반대로 요압의 위협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미 다윗은 왕권을 행사할만한 위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조짐은 이미 압살롬의 반역에서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압살롬이 민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다윗에게 반역을 한다는 건 다윗의 왕권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됩니다. 이때부터 이미 이스라엘의 실권이 요압에게 넘어갔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결국 요압은 훗날 아도니아와 솔로몬의 왕권투쟁에서 아도니아 편에 섰다가 죽습니다.

다윗의 통곡
다윗은 지금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왕의 체통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통곡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눈물인가요?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압살롬이 누굽니까? 다윗을 이어 왕이 될 형 암논을 죽였습니다. 다윗의 용서를 받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다음에 흉계를 꾸며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죽음을 다윗이 정말 슬퍼했을까요?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대목에서 다윗의 부성애를 강조합니다. 옳은 말인가요?
제가 보기에 다윗은 지금 압살롬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 때문에 울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그는 압살롬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에게는 압살롬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실제로 문제는 요압입니다. 평생 전쟁만 하던 다윗은 결국 군인들에 의해서 왕권을 행사하기 힘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현재 그런 상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역사를 보도하는 성서기자들은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여기서 압살롬의 죄가 핵심이 아니며, 다윗의 부성애도 주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의 삶도 일개 촌부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성서기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글의 행간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룬 위대한 정치적, 군사적 업적도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근친상간과 골육상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관료와 장군들에 의해서 쉽게 흔들립니다. 평생 동안 쌓아온 엄청난 업적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삶의 근본으로 들어가 보면 그런 업적을 남긴 왕이나 없는 촌부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일까요? 지금 예수 믿는 우리의 인생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비록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았지만 야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게 겉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시련을 당하고 통곡하니까요. 그러나 야훼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사람은 기우뚱거리면서도 자신이 궁극적으로 삶의 무게를 두어야 할 대상을 놓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특별한 점들이 별로 보이지 않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을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면 비틀거리다가도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의 통곡은 자신을 향한 연민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호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의 진정한 호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붙들어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용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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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675
17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6206
171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627
170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8060
169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853
168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545
16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936
166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495
165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677
164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6077
163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556
16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534
161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617
160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6104
159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503
158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6181
15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890
156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223
155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821
154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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