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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받는 그리스도

기타 조회 수 15589 추천 수 60 2006.10.01 15:14:14
성경본문 : 마가복음 8:27-38 
http://wms.kehc.org/d/dabia/06.10.01.MP32006.10.1. 막 8:27-38
고난 받는 그리스도

천기누설
오늘 이야기는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여기서 아주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런 질문이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길을 가시던 예수님은 그 도중에 이렇게 물으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님은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의 평판에 민감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아니면 사람에게 오르내리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걸까요? 아니면 세상 사람들보다는 제자들에게 만이라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왜 하셨는지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당시에 예수님에 관해서 여러 소문들이 무성했다는 사실만은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 공생애 후반부에 속합니다. 그가 이미 일, 이년 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불치병을 치료하고, 장애인들을 고치고, 여러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논쟁을 비롯해서 많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누군가 하는 소문들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소문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이 죽인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는 소문, 엘리야라는 소문,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사람들에게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을 알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군요.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제자들 중에서 소위 수제자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의 대답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의 단초입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b) 마태복음은 그 구절을 이렇게 전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 16:16) 누가복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눅 9:20b)
공관복음이 약간씩 다르게 표현하지만, 공통되는 부분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정체가 명시적으로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춘향전> 이야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몽룡은 과거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남원에 내려왔지만 자기 신분을 속이고 그 동안의 형편을 살폈습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암행어사 출두야!”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진술은 그야말로 천기누설입니다. 나사렛 목수 출신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일은 그렇습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발설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당부하신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해보십시오. 간혹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직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걸 보면 이 말씀은 아직 그 때, 즉 주님의 카이로스가 이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진술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것과는 다른 의미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와 연관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리스도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당시의 이런 사정이 본문 31절 이하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솔직한 베드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31절)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는 게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그리스도 상이 과연 옳습니까? 고난당하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며, 동의하십니까?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시나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고난 받고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그리스도 상입니다. 제 질문은 이런 교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차원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고 믿으시나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고난당하는 그리스도 상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 하고 펄쩍 뛰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라다니면 베드로가 왜 이렇게 예수님의 생각을 모르는지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옳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도 당신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했으면 좋았겠는데, 그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부활까지 말씀하셨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딘가 크게 이상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지금 부활이라는 단어를 놓친 걸까요? 예수님이 고난당한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그 뒤에 나오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듣지 못할 걸까요?  
우리는 고난과 부활을 구분해서 베드로의 반응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건 훨씬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에 베드로는 부활만이 아니라 고난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메시아의 고난은 말이 안 되는 거였으며, 부활은 실감나지 않은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일이, 즉 고난과 부활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펄쩍 뛴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고난과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경우가 흔했습니다. 사실 모든 대화는 기본적으로 소통의 한계가 있습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 사이에는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종교에서는 이런 현상이 훨씬 심각합니다.
일전에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어떤 분이 상담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십일조 헌금 때문에 거의 노이로제 비슷한 현상까지 보이고 있었습니다. 자기 주변의 친구들은 자기가 볼 때 엄청난 십일조 헌금을 드리면서 신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못하는 자기는 지옥에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 이전의 상담에서 저는 그분에게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시댁 어른들을 돕는 게 우선이니까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조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더군요. 오랫동안 세뇌된 마음에는 다른 말이 들어가기가, 이해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죽는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도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입니다. 물론 이사야를 비롯한 몇몇 구약성서에 고난 받는 메시아 상에 대한 진술이 있긴 합니다만 그건 예수님의 사건이 있은 지 한참 후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의해서 인용된 것이지 예수님 공생애 당시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없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승리자입니다. 인류를 구원할 자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다니요.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도 베드로나 그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신다는 말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종교적인 차원으로만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실제의 삶과 역사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인류의 미래는 미국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게 주어진다는 말이 가능할까요? 구원의 현실들은 강남 타워팰리스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등포 쪽방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가능할까요? 예수님 당시에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말은 오늘 이런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펄쩍 뛸 수밖에요. 그 베드로는 솔직한 사람이며, 그가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내다보는 행복한 삶이라는 기준은 이미 이런 방식으로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절) 예수님은 좌고우면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었다면, 베드로가 무안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래? 조금 더 잘 생각해보게.” 하고 타일렀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사탄에 비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한정으로 너그러우시면서, 동시에 심하다싶을 정도로 매정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요즘 말로 일종의 담론을 나누지 않았을까요? 베드로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복음운동이 물거품이 됩니다. 그러니까 제발 엉뚱한 생각은 마시고 몸 보존 잘하세요. 베드로의 설득이 예수님에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 겁니다. 원로들과 대사제들, 율법학자들과 다투지 말고 천천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선택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베드로의 제안은 예수님에게 일종의 유혹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요청에만 영적인 촉수를 맞추고 걸어가고 있는 예수님에게 베드로의 솔깃한 말은 바로 사탄의 말과 비슷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의견을 일축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이 이미 결정해 놓으신 고난과 죽음의 길을 말리는 것을 책망하신 걸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계적으로, 숙명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고난의 길이 결정된 게 아니라 열려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하고 오랫동안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도 있었겠지요. 부처처럼 천수를 누리면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할 수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볼 때는 바로 이 길이 더 바람직했습니다. 그래서 그걸 예수님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내린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완전히 일치해서 살았던 예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길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한 베드로의 시도는 바로 사탄의 행동과 같았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마가는 34절부터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38절)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말씀을 중심을 놓치는 겁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선택하시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고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고난의 길을 그리스도가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그 일은 여러분 모두에게 동일한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우리 삶에서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고난을 외면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도 고난의 길을 가셨는데, 오늘 우리가 그걸 어떻게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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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포스(강신태)

October 07, 2006
*.235.128.20

"지렁이가 손톱을 알 수 있을까.?" - 어느 목사님(설교비평에 올라오신)이 간혹 쓰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 사이트에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어느 귀한 분으로부터 사이트를 소개 받고, 거의 매일 방문을 드렸습니다.
감히 어느 곳부터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시간이 허락되면, 무조건 읽어 나갔습니다.

위 베드로 사도의 사건은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테마로 거쳐 갔을 것 입니다.
저라도 그 시대의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지 않았을 겁니다.
더 더욱 거두절미하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고 하신 예수님이 야속하게까지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제대로 모르는 베드로사도에게 조금 친절하게 알려 주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 그 시대 공감이 어려운 시간에 살면서, 당시의 예수님의 말씀이 깨달음 없는 당연한 사건처럼 세뇌되어진 영성을 염려 해 봅니다.

한 때 부활신앙에 대하여 매우 고민하고, 감격하고 했던 일이 목사님의 오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는군요.

번데기가 나방이 되었는데.. 죄인 되었던 내가 주님 만나 상상 할 수 없는, 새사람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되어 있으며, 베드로사도같이 주님의 앞 날에 대한 역사를 깨닫지 못 해 책망을 들으셨듯, 새사람으로 맞이할 부활의 나라가 그려지지 않아서, 지금 나는 시간에 부끄럽게 살고 있지는 않은건지.?

오늘도 목사님의 말씀으로 제 자신의 신앙상태를 상고 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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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7, 2006
*.150.14.52

강신태 님,
반갑습니다.
다비아가 입소문으로 여러분들에게 알려진다니, 다행입니다.
닫히지는 않았지만 무조건 자유분망하지도 않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의 현실에 두 발을 굳게 디딘,
그렇게 전통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영성을 심화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다비아가 되었으면 합니다.
강신태 님 같은 분들에게 좋은 읽을거리를 제공해야겠습니다.
50년대에 세상에 나오신 분을 만나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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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594
186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8230
185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618
184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478
183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484
182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355
181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379
180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793
179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352
178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9337
177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1662
176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717
175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10799
174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806
173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6322
172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732
171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8164
170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969
169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655
16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4047
167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603
166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782
165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6172
164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652
163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638
162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727
161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6229
160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613
159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6273
158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6004
157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5316
156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934
155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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