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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NwUBgzGc2U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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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한복음 3:1~7 |
믿음과 영생
요 3:1~17, 사순절 둘째 주일, 2023년 3월 5일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면서 동시에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다고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 식민 통치를 받던 당시 유대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기구입니다. 오늘날의 국회와 대법원을 합한 정도의 조직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개인 자격으로 왔는지 공회를 대표하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밤에 왔다고 합니다. 낮에 오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는 요 3:2절에서 예수께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당시에 예수께서는 유대교 권력자들에게 이미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요 2:13절 이하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장사꾼들을 쫓아내고 환전 꾼들의 상을 뒤엎으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을 보이는 것(요 2:18)입니다. 고전 1:22절에 따르면 유대인은 원래 표적(기적)을 중요하게 여긴 민족이었습니다. 요 2:23절에는 유월절에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사람들이 보고 그를 믿었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표적과 거듭남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런 표적에 관심을 보입니다. 일류 대학에 입학생을 많이 배출한 고등학교, 일 년에 매출을 5백 배 성장시킨 벤처 기업체, 관객 5백만 명을 달성한 영화, 교회 개척 5년 만에 1천 명 출석 교인이 되는 교회 등등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성과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일에 최대한의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표적이 우리 삶을 신바람 나게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일에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걸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고,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와서 표적 운운한 이유도 예수께서 더 강력한 표적과 기적을 행하시기를 원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표적에 관심을 보였는데, 예수께서는 ‘거듭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표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거듭나야만, 즉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이, 말하자면 궁극적인 행복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거듭남이 다시 모태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냐고 묻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질문입니다. 니고데모는 당대의 지식인이요 유대교 신학자였으니까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을 사람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보로만 아는 거와 실제로 아는 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지식인이고 재산가이고 지도급 인사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세상살이의 ‘노하우’를 아주 많이 알고,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삶을 실제로 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사실이 복음을 안다는 증거는 전혀 아닙니다.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태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반문한 니고데모처럼 말입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뒤로 이어집니다. 어떻게 보면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예수께서는 거듭남을 영(πνεῦμά)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라고 말입니다. 영의 일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는 영이 바람처럼 ‘임의로’ 불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에게 바람은 정말 신출귀몰하는 현상이었습니다. 나무를 뿌리째 뽑아낼 만한 강한 바람이 불다가도 조용해지면 종적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바람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그리고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요? 바람의 느낌이 왜 매번 다를까요? 바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8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어머니 모태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만 생각하는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영에 의해 거듭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소통이 잘 안 되는 대화가 이어지다가, 본문에는 자세한 이야기가 생략되었지만, 이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 16절에 나옵니다. 이 구절에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앞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주신 ‘거듭남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즉 영적인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실제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11절을 들어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영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라고 외칩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증언을 세상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문제는 둘째 치고 먼저 우리의 증언이 왜 확실한지를 아는 게,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게 실제로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
우선 ‘믿는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종종 오해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니까 절대자를 의지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종교적 열정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는 맹신이나 광신으로 여기는 겁니다. 제가 사는 원당 마을은 ‘돌할매로’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돌할매로를 따라가다 보면 ‘돌할매 마을’이 나옵니다. 그곳에는 마을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수호신으로 섬기는 ‘돌할매’가 있습니다. 10킬로 정도 무게가 나가는 화강암 돌덩이입니다. 그걸 드는 느낌에 따라서 소원이 성취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입소문을 탔는지 때로는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일 년에 10만 명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팔공산 갓바위도 비슷하게 기능합니다. 큰 틀에서 무속신앙입니다. 사람은 실존적으로 약하기에 그런 방식으로라도 어떤 대상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성경에도 믿음을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 읽힐만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세 군데만 예로 들겠습니다. 마 9:18절 이하에는 예수께서 한 관리의 딸을 다시 살리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관리의 집으로 가는 중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의 겉옷을 손으로 만졌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10:25절 이하에는 시작 장애인 바디매오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바디매오에게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7:11절 이하에는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이 치료되자 돌아와서 감사의 예를 표하는 한 사람에게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믿음이 병 고침을 받고 복을 받는 수단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믿음을 병 고침과 행운으로 연결키면 불행한 일을 당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없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기에 행운과 불행을 믿음 문제와 직결하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게 됩니다. 그런 치유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관한 해명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믿음과 그의 희망과 그의 사랑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의지이자 결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전에 예수님의 정체를, 즉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다 알고 있다고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오해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면 구체적으로 그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유대인의 신앙 전통에서 살았던 예수께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을지를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셨나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당시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로우심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성전에 얼마나 충실했냐를 보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를 보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이 금지한 세리와 죄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스스럼없이 어울렸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온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유대교 고위층 인사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오히려 위선자였습니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훼손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일갈하셨습니다. 결국에 그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독생자는 인생살이가 잘 풀려서 출세한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했으나 십자가 운명에 떨어진 예수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우리 모두 실제로 십자가 운명에 떨어져도 좋다는 말일까요? 그럴 리가 있나요. 믿는 자는 영생에 이른다고 약속하셨는데요.
영생을 얻음
영생이라는 단어를 사전적인 의미로만 보면 영원한 생명, 즉 끝이 없는(endless) 생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시간이 무한히 늘어나는 걸 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질적으로 변화되는 걸 가리킵니다. 질적으로 변화된 생명이 곧 영생입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똑같이 불치병이 걸린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끊임없이 병원 신세를 지다가 급기야 생명 연장술에 의존하여 20년을 채운 다음에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의료 도움을 최소화해서 일상을 그대로 살다가 10년 일찍 죽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10년을 무조건 연장하기보다 양질의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일부러 빨리 죽는다거나 병원 치료를 무조건 거부하는 게 좋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생명인 영생을 경험했다는 게 핵심입니다.
최근에 몰트만의 책 중에서 재미있게 읽은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Im Ende- der Anfang, 2003)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영생을 믿는다』(Auferstanden in das ewige Leben, 2020)입니다. 두 책 모두 영생을 주제로 합니다. 각각의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죽음 이후의 영생은 하늘 어딘가가 아니라 지구라는 땅에서 일어납니다. 땅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창조한 세계이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장소입니다. ‘주기도’에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땅을 제외하고 영생을 말할 수 없습니다. 2) 사람이 죽은 다음에 일정한 기간 일종의 ‘잠’(살전 4:13 이하)에 떨어졌다가 마지막 심판이 시작할 때 영생을 얻는 게 아니라 죽는 즉시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이 현실로 나타나는 그 마지막이 되면 죽음 이후의 ‘잠’ 시간이, 즉 죽음과 영생 사이의 중간시기가 말소하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영생에 관한 몰트만의 이런 신학적 착상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에 바로 그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충만하게 살았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믿음과 그의 사랑에 결속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 ‘살아있는 자’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이제 죽음의 권세가 무너졌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폭력도 무섭지 않았고, 인간 실존이 감당해야 할 외로움과 슬픔과 자기 한계 앞에서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영원한 빛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게 곧 영생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대수롭지 않다거나 비현실적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자기를 돌아보니, 예수를 평생 믿었으나 여전히 세상일로 염려하고 삶 자체가 불안하니까요. 죽음을 끔찍하게 여기고, 일상에서 영혼이 자유롭지도 못하니까요. 영생은커녕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니까요. 그 문제는 설교자인 제가 해결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수영을 배울 때 물에 몸을 완전히 맡기라는 말을 들어도 몸에 힘을 주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다만 저는 영생 경험이 무엇인지를 한 마디만 보충하고, 나머지는 여러분 스스로 알아서 돌파하시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이 전하는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결합하는 사건입니다. 백 살, 이백 살까지 수명을 연장하거나 호화로운 삶의 총량을 늘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곧 영생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지금’ 충만하게 경험한다면 이 순간이 바로 여러분에게 영생의 순간입니다.
모모 님이 질문하시니까 저도 궁금한 생각이 드는군요.
1)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니까 예수 이전에도 당연히 존재했지요.
다만 그 개념이 예수에게서 더 명확해졌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운명에서 현실이 된 거지요.
2) 눅 17:20절이 가리키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신 걸
전제하는지, 바리새인이 독자적으로 한 질문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세례 요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니까 바리새인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고 봐야지요.
문제는 그 개념이 서로 달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 개념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다르듯이요.
눅 17:20 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묻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리새인들도 이미 알고있던 개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