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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9sb8j5850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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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베드로전서 2:2-10 |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23년 5월 7일
프뉴마티코스
오늘 설교 성경 본문의 첫 구절인 벧전 2: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듣는 구절이라 생각하면서 들어보십시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위 구절이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나 그 의미는 아주 깊고 오묘합니다. 여기서 세 대목만 짚어보겠습니다. 1) 일단 ‘순전하고 신령한 젖’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를 그대로 짚겠습니다. ‘λογικὸς, ἄδολος, γάλα’ 여기에 해당하는 영어는 각각 reasonable, pure, milk입니다. 헬라어 ‘로기코스’는 ‘합리적’(rational)이라는 뜻과 ‘영적’(spiritual)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로기코스를 뭔가 산신령 같은 그림이 떠오르는 ‘신령한’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리려면 ‘이성적인’(루터- vernünftig)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공부하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이성을 무시하고 열광적인 종교심에 치우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서 이렇게 권면한 것입니다.
2) ‘아돌로스’는 혼합이 없는 것(without admixture)을 가리킵니다. 신앙적인 혼합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혼 구원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혼합주의입니다. 우유도 좋고 포도주도 좋아한다고 해서 우유에다 포도주를 섞으면 어떤 음료가 되겠습니까. 이 본문에서 우리는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도 이미 비이성적인 신앙과 혼합주의 신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모한다.’라는 말은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그리워하십시오.’라고 했고, <공동번역>은 ‘구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crave나 desire이고, 독어로는 begierig입니다. 이 단어들은 사모함과 그리움보다 더 강한 의미인 갈망이나 열망에 가깝습니다. 시 42:1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130:6절은 이렇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기 위해서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살폈던 여인(눅 15:8)이나 집 나간 둘째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버지(눅 15:20) 비유도 이런 갈망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해야 할 이유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함입니다. 몸이 자라려면 균형 잡힌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혼이 자라려면 균형 잡힌 말씀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구도자와 수행자처럼 이성적인 태도와 일관된 태도로 말씀을 갈망하는 사람만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고 말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신령한 제사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가 본문 3절 이하에 나옵니다. 5절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신령한 집이라거나 신령한 제사라고 할 때의 그 ‘신령한’은 헬라어 ‘프뉴마’의 형용사 변형인 πνευματικὸς입니다. 영어 성경은 spiritual이라고 번역했습니다. 2절에 나오는 신령한 젖과 여기 5절에 나오는 신령한 제사에 똑같이 ‘신령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었으나 헬라어 성경으로는 다른 단어입니다. 2절은 로기코스이고 5절은 프뉴마티코스입니다. 로기코스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성적인’이고, 프뉴마티코스는 ‘영적인’입니다. 물론 로기코스에 ‘영적인’이라는 뜻도 있긴 합니다. 고대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이성과 합리성과 영성과 보이지 않는 내면의 힘을 비슷한 현상으로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영적인 사람은 내공이 강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이라는 말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의 의미를 협소한 구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거꾸로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어떤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이 프뉴마티코스를 ‘신령한’이라고 어색하게 번역한 게 아니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적이라는 말은 겉모양이 경건하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가장 심층적인 깊이에서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심층적인 깊이는 표면적이라는 말과 대비됩니다. 예를 들어서 연주 실력이 뛰어난 기타 연주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고난도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런 기타 연주 기술로만 뛰어난 기타리스트가 될 수 없습니다. 연주 기술을 통해서 뚫고 들어가야 할 그 음악의 깊이를 알아야만 실제로 감동적인 연주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에도 표면이 있고 깊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도 그렇고 삶 자체도 그렇습니다. 철학과 삶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철학을 살아내고 일상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내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 생활을 능숙하게 잘하는 것과 실제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사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한쪽은 정보가 제공하는 표면에 머무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정보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의 일상에 심층적 깊이가 있다는 말의 근거는 세상과 일상이 하나님의 창조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게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이한 빛
이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는 말은 일상의 깊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 9절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 9절을 설명하면 영적인 제사와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더 분명해질 겁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나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이 말하는 기이한 빛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일상의 깊이에 대한 경험입니다. <새번역>은 ‘놀라운 빛’이라고 번역했고, NIV 성경은 ‘wonderful light’라고, KJV은 ‘marvellous light’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삶은, 또는 생명 경험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되기에 놀라운 빛이라고 말한 겁니다. 이를 성경 말씀에 조금 더 친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창조의 빛이고, 종말에 재림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고 오실 구름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빛을 말하기 전에 어둠을 말했습니다. 빛이 있다는 건 어둠이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생명 없음이고 빛은 생명 있음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살이에서 어둠을 더 느끼시는지, 아니면 빛을 더 느끼시는지요. 여기서 어둠이라는 말은 부도덕하게 산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이고 교양 있게 살아도 어둠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내면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다는 말은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어둠에서 놓인 것이라는 말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거부하고, 오히려 거꾸로 생각할 겁니다. 자신들은 인생을 즐기면서 멋지게, 그리고 나름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울하고 재미없게, 그리고 왠지 모르게 위선적으로 산다고 말입니다. 그런 현상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기는 하나 그게 그리스도교 영성의 본질이 아니니까 그런 비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없는 세상이 어둠이라는 사실을 설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빛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둠을 어둠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놀이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듯이 말입니다.
어둠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놀라운 빛 안으로 들어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예를 세 가지만 설명해보겠습니다. 1) 1990년 2월14일에 보이저 1호가 카메라의 방향을 지구 쪽으로 돌려서 찍은 사진에는 지구가 작은 점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구와의 거리는 61억 킬로미터였습니다. 그 사진의 제목을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우주 안에서 지구가 얼마나 작은 행성인지를 아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지구가 얼마나 소중한 행성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경험도 일종의 빛입니다. 2)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일과 가족과 여행과 취미생활이 가득했습니다. 어느 날 급하게 회사로 들어가다가 건물에 딸린 작은 정원에 핀 민들레가 그의 눈길을 끌어당겼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세상에 자기가 하는 일만 중요한 게 아니라 민들레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니 자기의 연봉과 관련된 일보다 민들레의 일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민들레가 그에게 빛으로 다가온 겁니다. 3) 일본 전통 문학 장르 중에 ‘하이쿠’가 있습니다. 간노 다다토모의 하이쿠 중에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습니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은 언제나 우리에게 빛으로 경험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다. 일상에서 이런 경험들이 깊어진다면 영혼이 늘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겠지요.
‘하나님의 놀라운 빛’을 경험한 구약 인물 중에서 아브라함과 모세가 대표적입니다. 1) 창 15:1절에서 아브라함은 환상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 당시 아브라함은 극심한 두려움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실향민으로서 늙어서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했습니다. 창 15:12절은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과 산비둘기로 번제물을 준비한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떨어졌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했다고 다시 강조합니다. 17절에는 해가 저물고 어두워질 때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고 번제물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는 게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둠 가운데서 하나님을 불빛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2) 출 3장은 모세의 소명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제사장 이드로의 데릴사위로 산 지 40년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어둠의 시절입니다. 어느 날 그는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현상 가운데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무미건조했던 그의 삶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순간입니다.
복음의 빛
베드로전서가 가리키는 가장 결정적인 ‘하나님의 놀라운 빛’은 예수 그리스도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둠의 삶에서 빛의 삶으로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즉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자기 생명을 성취해야 한다는 강요와 유혹에서 벗어난 겁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0절이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말도 멀리 느껴질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우리는 왜 하나님의 긍휼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까요? 삶이 곧 하나님의 자비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왜 놓치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요?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 본문 2절이 말하듯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지 못할까요?
한 마디로 대답한다면 ‘회개’(메타노이아)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뻔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교회에서는 늘 회개하라고 말하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혁명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저도 사실은 그렇게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도 완전한 회심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중입니다. 어둠에서 불러내서 빛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본문 9절과 연관해서 저는 두 가지 삶의 방식에서 회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바알숭배로부터의 회심입니다. 바알숭배가 어둠인 이유는 거친 표현으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로 생존의 불안을 자극하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에서 빠져나오기가 정말 힘듭니다. 현대판 바알숭배인 자본주의가 오늘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옥죄는지를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장 큰 죄악을 바알숭배로 규정한 이유가 이해됩니다. 우리 개인이 바알숭배라는 시대정신에 대처하기는 정말 어렵기는 하나 우리의 영혼이 삶에서 wonderful 빛을 경험하려면 거기서 회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들이 그런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도록 생존을 보장해주는 나라가 괜찮은 나라이겠지요. 우리나라는 지금 어중간한 것 같습니다.
둘째는 율법주의로부터의 회심입니다. 율법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립합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기에 복음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인식하기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구원의 길로 인식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얼마나 율법적인지는 여러분이 충분히 아실 겁니다. 교회당 건축과 교회 조직의 활성화와 제자 훈련과 선교와 전도 전략 등이 모두 큰 틀에서 볼 때 율법 패러다임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업적주의이자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욕망입니다. 그런 업적 중심의 신앙은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기진맥진하든지 위선에 떨어집니다. 그게 바로 어둠입니다.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 어떻게 복음의 빛으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빛이 가득하신가요? 자유와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시나요? 혹은 세상이 말하는 행복한 조건들이 턱없이 부족해서 삶이 어둡다고 느끼시나요? 이제부터라도 신앙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어내어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사실을 영적인 화두로 삼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 새로운 출발을 감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상의 깊이에서 경험되어지는
그 분의 창조능력과 창조의 신비가
하나님 경험이요 기이한 빛 경험이다....
'존재의 신비' '일상의 깊이'
이런 표현들은 목사님 설교에서만 접해볼수 있답니다.
"목사구원"이라는 저서에서 이런 언급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폴 틸리히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신비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과 하나되는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 내가 하나님을 의식할수 있는 눈이 열려지고
그 분과 소통할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 분의 가장 신비롭고 가장 경이로운 피조물인 나란 존재를 위시하여,
나와 연루된 이웃들과 내가 만나는 피조물속에 깃들어 있는
그 분의 창조능력과 창조의 선하신 뜻을 문득 발견할수 있게 될때
그것이 존재의 신비, 존재의 깊이, 존재의 경이로움에 대한 벅찬 각성이요
하나님 경험, 구원경험이 아닐까요
그 경험이 더 깊어지고, 잦아지고, 성숙해지는 비밀이 오늘 베드로전서의 이 말씀이겠군요
일상의 깊이, 존재의 깊이, 삶의 심층....
이런 표현들을 평소 화두로 삼고 살아가지 않는 이들에겐
한낱 언어의 유희나 현학적 제스처 정도로 폄하될수밖에요.
내가 오늘 없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빚으시고 세상 우주를 지으신 그 분과 지금 내가 접속할수 있게 되었다는 것
손에 잡힐듯 말듯한 그 아득한 시원적 비밀에
거룩한 의심과 영혼의 갈증을 품게 된 것이
오늘 더 낯설고 기이하게 다가옵니다
어제와 다를바 없는
늘 그날이 그날같은 오늘이란 시공간과
그 속에서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음이
문득 빛으로, 보석으로, 거룩한 낯섬으로 다가오는 순간을 섬광처럼 포착할때
하나님의 생명에, 창조의 비밀에 접속되는 것이요
세상이 줄수없는, 세상에서 얻을수 없는 자유함을 맛보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럴때 나를 근심케 하고 우울하게 하는 일상사가 아주 작게 여겨질테고요.
하나님 살아계심의 가장 큰 증거가
오늘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음이라는
어느 신학자의 일갈과 맥을 같이 하는거겠군요
늘 부끄럽고 면목없이 보내고 있음에도
또 다시 허락된 오늘이란 시공간속에서
감추어진 보화를 거룩한 낯섬으로 얼마나 경험하게 될지...
평소라면 무심하게 지나쳤을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이 어떻게 낯설게 다가오게 될지...
설레는 마음으로 선물로 주신 오늘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예, 부스러기 님의 대글에 저도 백번 공감합니다.
그렇게 살아보려고 저도 노력하면서 그분의 도움을 기도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신비 안에서 오늘을 생명 충만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세상과 삶에 대한 철학적이며 인문학적인 통찰과 깨달음에서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2천년전 성육신의 주님으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운명을 살았던
바로 그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예수를 향해서, 예수와 함께
주어진다는 사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건 그렇고,
창조와 종말, 처음과 마지막,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오늘' 바로 이 순간이란 무엇일까요? ...
베드로전서 2장 1절과 2절에는 두 가지가 있다. 1절은 ‘버려야’ 할 것, 즉 다섯 가지 부정적인 것이고, 2절은 3가지 긍정적인 것을 사모(갈망, 열망)해야 할 것이다.
헬라어 ‘로기코스(logikos)’는 ‘합리적’(rational)이라는 뜻(롬 12:1)과 ‘영적’(spiritual)이라는 뜻이 있다. 이 단어는 ‘말씀’이라는 명사(logos)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그러므로 ‘말씀의’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몸과 대립되는) 생각, 즉 이성적 능력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것을 뜻한다. 말씀의 젖은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혼, 즉 내적 존재를 위한 것이다. 이 젖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전달되어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에 따른 이해를 통하여 우리의 속사람을 양육하며, 또한 우리의 지적인 능력을 통하여 흡수된다.
‘‘아돌로스(adolos)’는 a(negative)+ dolos(bait(미끼, 유혹), snare(덫), deceit(사기, 속임수))이므로 이는 guile(교활, 간교)이다. 따라서 ‘아돌로스(adolos)’는 교활, 간교 없음의 순전한 것이므로 1절의 ‘기만(속임수)’의 돌로스(dolos)와 대립된다. 즉 거짓된 목적이 없는 영혼을 양육하는 것 외에는 어떤 목표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우유, 즉 혼합이 없는 것(without admixture)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단어는 고후 2장 17절이나 4장 2절의 혼잡하게 하다는 단어와 다른 단어이다.
‘사모한다.’라는 말 에피포테오(epipotheo)는 영어로는 crave나 desire나 long for이므로. 이 단어는 사모함과 그리움보다 더 강한 의미인 갈망이나 열망에 가깝다.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해야 할 이유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믿는 이들은 거듭남을 통하여 태어나(벧전 1:3, 23) 아기들이 되고, 영적인 것으로 양육받음으로써 생명이 자라 더 전진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구원은 영적인 집의 건축을 위한 것인데 이는 생명의 빛 비춤으로 말미암는다.
베드로후서 2장의 단어를 묵상하고 설교 말씀을 묵상하면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