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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성령강림절 조회 수 15241 추천 수 0 2023.05.28 19:50:26
설교보기 : https://youtu.be/C-MY1XtaG8E 
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9-23 

평화-파송-성령-사죄

20:19~23, 성령강림절 주일, 2023528

 

 

20장과 21장은 예수님의 부활 현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중에서 오늘 설교 본문은 요 20:19~23절입니다. 이 대목은 공관 복음서에도 나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 후 첫날저녁때 제자들이 모인 방에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문을 닫았고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도 예수께서 그 자리에 함께하셨다고 하니까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21절에서도 다시 평화의 인사를 반복합니다.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2절에서는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23절에서 죄의 용서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씀만 이어지고 제자들은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20절에서 제자들이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 기뻐했다는 말만 나옵니다. 사실은 기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놀라자빠질 이야기인 거지요. 바로 며칠 전에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히신 분이 제자들 앞에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이 이야기 앞에는 예수 무덤에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만 나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하나가 빈 무덤에 관한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에 달려가서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나 아직 부활을 믿지는 못했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정사실로 전제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 전승의 역사에서 부활 신앙이 먼저 성립한 뒤에 빈 무덤과 부활 현현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이 가리키는 핵심을 네 가지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과 직접 연결됩니다.

 

1) 평화

앞에서 짚었듯이 예수께서는 평화 인사를 반복하셨습니다. 당시 근동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사가 평화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샬롬이라고, 아랍인들은 살람이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하나님을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천사들의 찬송을 전하고,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에서도(19:38) 똑같은 찬송을 전합니다. 교부들은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에 맞서서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비롯한 로마 문명에 의한 제국의 번영을 가리키고, 그리스도의 평화는 사랑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의 평화는 아무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부동한 이념이라서 그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말한다는 건 비웃음을 당하기 맞춤합니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의 미래를 자신들이 책임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그런 비웃음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왕이라고 믿었고, 그걸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설득력이 있는 주장인가요?

평화를 일단 소극적으로만 보면 싸움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유엔의 평화 유지군이 하는 일입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전쟁을 그치게 하는 일이 평화 운동입니다. 그러나 싸움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아닙니다. 남존여비 사상에 떨어진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겉으로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나 평화로운 가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힘으로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걸 평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이 하도급 기업에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서 불합리한 요구를 받아들이게 하는 일도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는 아닙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약한 사람들이 제 권리를 찾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평화를 찾아가는 일이 쉬운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좋은 게 좋다, 조용한 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종 예로 드는 장애인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계층에 속한 그들에게 평화는 무엇일까요? 장애인 시설에 갇혀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서 조용하게 사는 건 분명히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누리려는 그들의 요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면서 실제적인 방법을 찾아가야 합니다. 정답을 우리는 찾지 못했고, 정확하게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이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에서 핵심이라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2) 파송

예수께서는 19절에서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하고 이어서 21절에서 다시 평화의 인사를 전한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 공동체는 부활 현현 전승을 전하는 이 대목에서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셨고, 따라서 자신도 제자들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관복음도 제자들의 파송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10:1절 이하를 따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당신도 그러하고 제자들과 요한 공동체에 속한 이들도 모두 자신들의 삶을 소명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말이 소명이지 실제로 소명의식으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그런 말을 어색하게 생각합니다. 돈 많이 벌고 건강하며 재미있게 살면 충분하지 왜 하나님이 보내셨고, 예수께서 보내셨다는 말을 하냐, 하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파송과 소명은 목사나 선교사에게나 어울린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지요. 일반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목사나 선교사라고 해도 모두 소명의식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소명은 자기 삶의 주인을 자기가 아니라고 여길 때, 즉 자기를 부정할 때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삶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거의 세뇌하듯이 가르치는 세상에 살면서 자기 부정이 쉽습니까? 아니에요.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망의 발현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삼자는 더더욱 모르고 자기 자신도 사실은 모릅니다. 그래서 신천지나 JMS , 사이비 교주들의 행태에 속는 사람들이 많은 겁니다. 그들의 말만 들으면 그들이야말로 소명감으로 충만한 사람처럼 보이거든요.

요즘 젊은이 중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가도 몇 년 사이에 이직하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직업을 찾아서 쉽게 자리를 옮기는 겁니다. 특히 교사들에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교권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다는 말도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교사로서의 소명감이 없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게 아닐는지요. 사실 교사만이 어디 문제이겠습니까. 인간 생명을 구하고 지킨다는 의사들에게서도 소명의식을 찾기가 힘들고, 자기방어 능력이 없는 이들을 법으로 지키는 법조인들에게도 소명의식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21세기 전체가 완전히 탈() 소명 시대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소명의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을 거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싶고, 그렇게 희망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자기 부정을 소명의 소극적인(negative) 차원이라고 한다면 여기 적극적인(positive) 차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특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가 스승이고 우리가 제자라는 관계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뒤를 따릅니다. 아직 자기 손에 잡히지 않은 길이라 하더라도 스승이 가라고 하면 순종하고 가는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자기의 운명을 건 모험입니다. 요한 공동체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3) 성령

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이 22절에 이어집니다. 말씀하기 전에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보입니다. 요한은 이 대목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창조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2:7)라는 구절을 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은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를 아주 세밀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고별 연설에서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요한이 성령을 언급한 이유는 평화 지향적인 삶과 파송 및 소명의식이 그냥은 안 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을 아주 낯설어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걸 오해하기도 합니다. 열광주의적이고 은사 중심적인 성령론에 떨어진 사람들은 자기도 예수님 흉내를 내면서 성령 받아라!’ 하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런 발언은 예수에게만 가능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명령을 내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카리스마가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청중들이 자신의 말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현상을 보면서 자기가 성령을 다룰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은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창조의 영이고 부활의 영입니다. 창조도 생명이고 부활도 생명이니까 이를 하나로 묶으면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생명의 영이 우리 안에 있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의미에서 평화의 왕으로 선포할 수 있고 각자의 삶을 파송과 소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도 이런 방향에서 어느 정도는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의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있는지, 그런 마음이 생기는지, 죄와 죽음의 문명을 의와 생명의 문명으로 바꿔나가는지를 돌아보면 됩니다. 이런 데에 관한 마음은 ‘1’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와 자기 가족이 잘 되는 일과 자기 교회 부흥에만 신경을 쓴다면 그가 아무리 성령을 받은 사람처럼 기도하고 찬송해도 성령과는 거리가 먼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믿었던 성령은 개인의 내면과 종교 형식에 한정되는 영이 아니라 인류와 지구와 우주 전체의 생명까지 포괄하는 영입니다.

독일은 지난 415일 자정을 기해 남아있던 3기 원전까지 완전히 폐기함으로써 원전 가동 62년 만에 탈원전을 달성했다고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프랑스는 여전히 원전을 가동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남아있습니다. 독일이 유럽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경제 대국인데도 과감하게 원전을 완전히 폐기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1986년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2011년에 있었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탈원전 정책을 밀고 나가는 직접적인 동력이었습니다. 핵전쟁이 인류의 재앙이듯이 원전 사고도 재앙입니다. 현재(2022) 가동 중인 전 세계 원전 숫자는 33개 나라에 437기입니다. 10기 이상인 나라만 따지면 미국 92, 프랑스 56, 중국 55, 러시아 37, 일본 33, 대한민국 24, 인도 22, 캐나다 19, 우크라이나 15입니다. 1위 미국의 원전 숫자가 우리보다 4배가량 많으나 땅 크기로 보면(미국은 남한의 백배)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의 원전 밀집도가 가장 높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남북이 대치해 있고, 극동의 지정학적 위험도가 아주 높습니다. 만에 하나 북한이나 중국 미사일이 우리나라 원전에 떨어지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저는 지금 원전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에 관해서 더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믿고, 생명의 영인 성령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과감하게 탈원전을 실현한 독일이 부럽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4) 사죄

본문 23절에는 뜬금없는 듯이 들리는 말씀이 나옵니다. 평화, 파송, 성령을 말씀하신 직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들이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의 죄를 마음대로 용서해줄 수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이 구절은 세례를 가리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는 죄의 용서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해서 산다는 의미의 종교의식이 바로 세례입니다. 죄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성취해야 한다는 유혹과 강요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거기서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죄는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불화이고,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 죄의 가장 막강하고 세련된 형태는 로마 문명이었습니다. 로마 문명이 세상을 구원했나요? 로마 제국의 주류로 사는 사람들이 생명 충만하게 살았을까요? 표면적으로 그들은, 특히 로마 귀족들과 시민들은 세련되고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리품과 노예가 그런 풍요로운 삶의 밑바탕이었습니다. ‘먹방을 방불케 하는 사치가 극에 달했습니다. 연회장 바로 옆에는 구토할 수 있는 방이 따로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배불러서 더는 먹기 힘들 때 사용하는 방입니다. 고급스러운 문학과 예술과 오락을 즐겼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Omnes viae Romam ducunt)라는 아포리즘을 입에 달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런 로마 제국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인류 역사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연봉이 높아도,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도, 아무리 주변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아도 그것만으로는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공허한지, 즉 자유롭지 못한지 여러분도 다 인정하실 겁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소수 중의 소수였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로마 제국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21세기 현대사회에서 그들의 믿음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운명을 통해서 참된 의미의 평화와 파송(소명)과 생명의 영과 죄로부터의 해방을 정말 새롭게, 마치 죽은 자가 살아난 거와 같은 차원에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그들은 유대 종교 권력과 로마의 정치 권력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그 경험 안으로 조금씩이라도 깊이 들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멀어지고 있는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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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소유와존재

June 01, 2023
*.254.11.100

"아무리 연봉이 높아도,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도, 아무리 주변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아도 그것만으로는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공허한지, 즉 자유롭지 못한지 여러분도 다 인정하실 겁니다."


목사님! 인정이 안 돼도 인정을 해야 할까요? 이해는 되는데 동의가 안되는 것에는 믿음으로 응수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들의 이면에 공허와 자유롭지 못함이 있을꺼야... 라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요?


그런 사람들 음.... 좀 얄밉더라구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01, 2023
*.104.32.110

얄미운 사람들이 누군가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인가요?

연봉, 건강, 미모를 다 갖춘 사람들인가요?

'그것만으로는'이라는 단서를 잘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연봉과 건강과 미모가 빛을 발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조건에 매달리게 하는 삶이 허상이라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것이 허상이 아니라 실체라고 생각하겠지만요.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라는 질문을 반복하면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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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5721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 2023-11-07 15288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5152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5353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5277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4870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5081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5175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5278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4947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5402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4911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183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5788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419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5752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5280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246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4880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5137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965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190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112
»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5241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5500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272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5367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4930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33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15423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15786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5344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538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5477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16659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15746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15327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15833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15815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15869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17180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16662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16026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16127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17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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